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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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본문: 이사야 40:1-11; 마가복음 13:32-37

설교: 홍정호 목사 (2020.12.6. 대림절 제2)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주민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고 외쳐라.” 한 소리가 외친다. “광야에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아라. 사막에 우리의 하나님께서 오실 큰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계곡은 메우고, 산과 언덕은 깎아 내리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은 평지로 만들어라.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이다.” 한 소리가 외친다. “너는 외쳐라.” 그래서 내가 무엇이라고 외쳐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어서 높은 산으로 올라가거라.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힘껏 높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하고 말하여라. 만군의 주 하나님께서 오신다. 그가 권세를 잡고 친히 다스리실 것이다. 보아라, 그가 백성에게 주실 상급을 가지고 오신다. 백성에게 주실 보상을 가지고 오신다. 그는 목자와 같이 그의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들을 팔로 모으시고, 품에 안으시며, 젖을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새 교회력의 두 번째 주일에, 우리는 대림절 초 두 개에 불을 밝혔습니다.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희망의 때가 그만큼 가까웠음을, 우리 안의 어둠을 이 더해진 빛의 밝기만큼 몰아내고, 희망의 빛으로 이 장소를 채웠음을 상징하는 촛불입니다.

 

주일예배를 비롯한 교회의 모든 예배는 촛불을 밝히며 시작합니다. 촛불은 참 빛이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참 빛이신 주님이 이곳에 계심으로 어둠이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요한은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1:5) 말씀했습니다. 빛이신 주님이 계신 곳, 빛이신 그분을 모신 마음에는 어둠이 머물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의 이 말씀은 기초적인 물리학 이론으로도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2.

 

빛은 물리적인 입자와 파동을 갖는 실재입니다. 빛의 입자는 광자(光子, photon)라고 부릅니다. 이 광자는 질량은 없지만, 장거리에서 상호작용이 가능한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밝힌 불빛이 저 먼 곳을 비출 수 있는 이유입니다. 반면 어둠은 실재가 아닙니다. 어둠은 질량은 물론이고, 입자도 없고 파동도 없습니다. 어둠은 단지 빛이 없는 상태, 광자의 밀집도가 낮아진 상태를 의미할 뿐입니다. 어둠에는 암자(暗子)나 흑자(黑子) 따위로 부를 수 있을만한 실재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어둠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어둠을 밝히려면 조도를 높이면 됩니다. 광자의 밀도를 높이면 어둠은 사라집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선악에 대한 고찰에서 악은 선의 결핍이라고 했습니다. 악이란 실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선한 것이 부족하거나 없는 상태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악과 싸우기보다는 오히려 선을 행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실재가 없는 어둠과 싸우기보다는, 빛의 조도를 높이듯 선을 더 많이 행하면, 악은 어느새 사라진다고 본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만이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 곳곳에서 우리는 선을 행하라는 말씀을 만납니다. 선을 행하는 의인이 받는 축복의 약속을 만납니다. 시편의 시인은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산다”(37:27) 했습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따르라”(34:14) 했습니다. 전도서의 전도자는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다”(3:12)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라”(2:10) 했습니다. 짧은 시간에 모두 말씀드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을 행하라는 각기 다른 이 말씀들이 지향하는 바가 동일하다고 믿습니다. 이 말씀들이 지향하는 핵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네 안의 빛을 밝히라는 것입니다. 네 안에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선을 행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니, 그 빛을 덮어두지 말고, 그 빛을 밝혀 어둠을 몰아내고, 선을 행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증언한 요한의 복음입니다.

 

빛에 관한 말씀을 길게 드린 이유는, 대림절이 이 빛을 우리 가운데 모심으로 한 해를 시작하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밝힌 촛불 두 개는, 이 밝은 공간에서도 환한 빛을 발합니다. 하물며 절망의 어두움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밝힌 촛불 하나는, 희망의 빛으로 그곳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 안에 있는 빛을 밝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주님의 빛을 절망과 근심과 염려의 덮개로 덮어두지 마십시오. 안 된다는 부정적인 생각, 기도해 봐야 소용없다는 불신의 덮개를 걷어버리고,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그분 앞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대림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오늘의 말씀은 이사야서 40장의 희망의 말씀입니다. 구약성서 학자들은 이사야 40장에서 55장에 이르는 장을 일컬어 2 이사야라고 부릅니다. 2 이사야는 기원전 539년 바빌로니아의 붕괴 직전, 혹은 붕괴가 진행되고 있던 때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원전 926년 솔로몬의 죽음으로 다윗의 나라는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를 지난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통치하는 북이스라엘과 르호보암이 통치하는 남유다로 분열되었습니다. 이러한 분단은 약 2세기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북이스라엘이 먼저 기원전 721년에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을 당했습니다.

 

이때 많은 피난민들이 남쪽 유다로 모여들면서 예루살렘의 인구가 급증하게 되었고, 이로써 남유다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의 심장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유다마저도 쇠락의 길을 막지 못했습니다. 남유다는 기원전 6세기(B.C. 586 or 587), 당시 신흥제국으로 부상한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에게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이후 약 50년 동안 이스라엘민족은 주변 나라들로 추방되어 떠돌이 신세가 되었고, 난민이 되었으며, 급격한 사회변동으로 인한 가치관의 혼돈을 겪으며 고난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유다의 바빌로니아 유수의 경험입니다.

 

바빌로니아 느부갓네살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의 파괴가 얼마나 비참한 것이었는지는 고대 여러 문헌들에서 증언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다의 심장부에 있던 대부분의 성읍들을 불태우고 파괴하였으며, 백성들을 유린했습니다.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도주하다가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자신의 눈 앞에서 두 아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고, 이후 그는 두 눈이 뽑힌 채 쇠사슬에 묶여 바빌로니아로 끌려 갔습니다.(왕하 25:7) 야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파괴되고, 율법이 유린당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은 자손들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가고, 각처로 흩어졌습니다. 그들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로부터 구원하셨던 구원의 하나님, 역사를 주관하시는 창조의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데,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러한 일련의 참상을 겪으며 그들은 깊은 회의와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놓여 있는 역사적 배경입니다.

 

2 이사야는 이러한 비극을 경험한 이후 들려 온 희망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주민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고, 지은 죄에 비하여 갑절의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고 외쳐라.’”(40:1-2) 이것이 2 이사야가 외친 희망의 첫 메시지였습니다. 이 무렵 바빌로니아는 페르시아의 고레스(Cyrus)에게 점령을 당했습니다. 페르시아는 바빌로니아를 제패함으로써 바빌로니아 제국의 두 배가 넘는 영토를 다스리는 대제국이 되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영토가 동쪽으로는 지금의 인도 국경지대로부터 서쪽으로는 그리스 맞은편 에게해에 이르는, 그리고 남쪽으로 이집트의 영토를 아우르는 지역이었다고 하니, 그 크기와 위엄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대제국 페르시아의 통치자 고레스는 피지배 민족들에게 관용 정책을 펼쳤습니다. 피지배 민족을 억압하는 대신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용인하는 전략을 펼쳤습니다. 고레스 왕은 이 관용 정책을 원통형 실린더에 새겨 놓았는데, 이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인권선언으로 유명한 고레스 칙령입니다.(1:1-4) 이것은 주후 313년 당시 기독교를 로마의 극심한 박해로부터 해방시킨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보다 약 800년 앞선 관용 선언문입니다. 고레스 칙령으로 인해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예루살렘에 새로운 성전을 짓고 이전의 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1:2-4, 6:3-5).

 

고레스 칙령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통치자를 통하여 언약의 역사를 이어가신다는 기대감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고레스의 등장을 다윗 왕조의 회복(11:1-16, 54:10)과 성전의 재건(44:28, 45)이라는 희망을 실현하도록 돕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이때 이사야가 외친 희망의 선언이 바로 오늘 함께 나누는 말씀의 본문입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40:6b-8)

 

4.

 

모든 육체는 풀이요 들의 꽃과 같다는 이사야의 선언은, 인생의 무상함을 말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들꽃과 같이 사라질 것들에 집착하기보다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위에 각 사람의 인생과 민족사의 토대를 세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될 때에 그들은 느부갓네살이 곧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선한 역사에 대한 믿음을 떠나 낙심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군대는 고레스에 의해 얼마 가지 못해 멸망했습니다. 대제국 페르시아의 영광은 영원했습니까? 로마는 영원했습니까? 그리고 오늘날 세계의 제국을 자처하는 나라들의 영광은 영원합니까?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하는 말씀의 힘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역사 전체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고백입니다. 지금은 비록 고난의 때이고, 지금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사랑받고, 축복의 약속을 받은 이들에게는 이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올해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멀게만 느껴졌던 이들, 남의 일로 여겼던 고난이 나와 내 가족의 일이 된 데 대하여, 희망을 잃고 낙심하게 되는 일들이 그 어느 해보다 잦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사야의 말씀이 우리에게 희망과 위로가 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습니다. 변함없는 하나님의 언약 위에 인생을 세우는 사람은, 흔들릴지언정 좀처럼 넘어지지 않으며, 넘어질지언정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빛 되신 주님께서 우리의 어둠을 몰아내시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그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분노와 좌절 가운데에서도 선을 행할 용기를 얻습니다. 대림절은 이 희망의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오늘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을 맞으며, 빛 되신 주님을 우리 마음에 모심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위에 든든히 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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