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

 

본문: 이사야 61:1-4; 데살로니가전서 5:16-24

설교: 홍정호 목사 (2020.12.13. 대림절 제3)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예언을 멸시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분간하고, 좋은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갖가지 모양의 악을 멀리 하십시오. 평화의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흠이 없이 완전하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시니, 이 일을 또한 이루실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코로나19 확산세가 다시금 심각해지는 모양입니다. 올해 많은 어려움을 이기며 지금까지 지내오신 것처럼, 올 겨울도 몸과 마음의 건강에 유념하셔서 모두 무탈하기 지내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의 말씀입니다.

 

1.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글인 데살로니가전서는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보다도 20여년 앞서 기록된,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글입니다.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를 거쳐 아테네로 이동한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 안에서 잘 성장하고 있는지 살피기 위해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냈고, 디모데는 데살로니가를 다녀와 그곳의 상황을 바울 일행에게 전했습니다. 이 편지는 디모데로부터 전해들은 데살로니가교회 상황에 대한 바울의 응답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을 전해 듣고, 그곳 교회의 형제자매들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형제자매들을 두고 감사한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들의 믿음의 행위로 인해 감사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른 유대인과 그리스인이 연합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문화란 삶의 모든 양식을 폭넓게 일컫는 말이기 때문에, 문화가 다르다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고, 인식하고, 경험하는 차원에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상사적으로 본다면, 유대인과 그리스인은 각각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라는 서로 다른 문화역사적 물줄기에 속해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 관점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러한 문화적 차이에 따른 갈등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디모데로부터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믿음 안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들의 믿음의 행위로 인해 감사했습니다. 유대인과 그리스인이 섞이면, 그들 각각의 자부심과 문화적 차이로 인해 다투고, 나뉘지만, 그리스도 신앙을 중심으로 연합하여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소식에 바울은 가장 먼저 감사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교회가 본받아야 할 첫 번째 신앙의 이정표입니다.

 

둘째는, 그들의 사랑의 수고로 인해 감사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형제자매들은 복음을 말로만 전하지 않았습니다. ‘로만 전하지 않았다는 것은, 책임이 없는 말, 그냥 하는 말, 대상에게 사건을 일으키지 않는 죽은 말로 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을 본받아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말을 책임지는 주체가 되었습니다. 책임을 잃은 헛말이 아니라, 책임 있는 말의 주체가 됨으로써, 말에 따른 사랑의 수고를 기꺼이 감당했습니다. 이들은 로마 당국의 위협 속에서도 바울 일행을 환대했고, 이후로도 나그네를 환대하는 사랑의 수고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셋째는, 그들의 인내로 인해 감사했습니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살전 1:3b) 하고 인사를 전했습니다. 데살로니가 형제자매들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수고로 인해 박해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믿음과 사랑이 왜 박해를 불러왔을까요?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차이를 편파적으로 옹호하기보다 그리스도의 화해와 일치를 지향하며 조화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믿음의 행위로 인해 그들은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의 차이를 넘어서는 사랑의 공동체를 가꿔오고 있었습니다.

 

차이는 어느 사회에서나 갈등과 적대의 요소를 갖습니다. 특히 위기에 처한 시대, 그러한 사회일수록 차이는 갈등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곤 한다는 것을, 역사로부터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차이의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경우에, 차이를 아우르는 더 큰 가치가 확고히 존재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르지만, 더 큰 가치 안에서 하나라는 인식을 사회 구성원들이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서구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이러한 차이의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더 큰 가치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생각이 달라도, 입장이 달라도, 참된 믿음 안에서 조화와 일치를 이루기 위한 노력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는 교회의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속화된 사회에서 신앙은 교회 밖 사람들에게, 심지어 신자들에게도 이러한 근본 가치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세속화된 근대사회에서는 교회 대신 국가가, 신앙 대신 신념이 전통적으로 교회가 해 온 역할을 대체해 왔습니다. 그러나 궁극의 초월자이신 하나님 중심성이 없기 때문에 국가와 신념이 갖는 통합 기능이란 또 다른 갈등 요소가 될 우려가 큽니다.

 

그러면 차이를 인정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왜 어려울까요? 인간의 자기중심성때문입니다. 인간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론에 따르면, ‘자기에게로 구부러지는 존재’(homo incurvatus in se)의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초를 놓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 가운데 하나인 원죄론, 인간 존재의 죄된 본성을, ‘자기에게로 구부러지는 존재의 모습에서 찾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을 자기에게 유익한 대로, 자기 관점으로, 자기 편의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이 뿌리 깊은 자기중심성을 인간 존재의 본성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 뿌리가 얼마나 깊다고 느꼈으면, 그가 이를 원죄’(original sin)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죄된 본성을 간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이러한 인간의 본성, 자기에게로 구부러진 존재의 모습을 극복한 새로운 아담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분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인간은, 뿌리 깊은 원죄를 이기고 새로운 존재로, 이타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는다는 교리의 본래적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의 자기중심성을 넘어 이웃과 화목하고, 차이를 더 큰 믿음으로 넘어서는 참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길이 십자가 신앙에 있는 것입니다. 신학생 시절 저는 주로 원죄론이 미쳐온 해악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 제 안에 있는 자기중심성을 인지하면서부터는, 원죄론을 인간 이해의 바탕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편입니다. 아무튼, 이렇듯 자기에게로 구부러진 존재의 세상에서, 차이는 갈등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문화적 경계에서 믿음으로 하나 된 교회를 가꿔왔기 때문에 그만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어려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안에서 인내했고, 이로써 데살로니가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교회와 신자들이 모범이 되었습니다.

 

2.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 가운데, 마지막 권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짤막한 권고를 전합니다. 바울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잘 섬기고 그들을 사랑으로 존경할 것을 당부하고, 형제자매들에 대한 섬김의 의무를 강조했습니다. 무질서하게 사는 이들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이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십시오, 하는 것이 바울의 권면의 내용입니다. 이 권면 후에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세 가지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으로 번역된 낱말의 헬라어는 텔레마’(thelema)입니다. 이것은 보통 영어로 ‘will’로 번역하지만, ‘desire’(갈망) 또는 ‘wish’(소원)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나남의 뜻이 있다는 바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어떤 소원이 있다는 의미로 풀이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만 하나님께 소원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향해 소원을 갖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첫 번째 소원이 바로 항상 기뻐하십시오하는 말씀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기뻐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 형제자매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첫 번째 소원입니다.

 

이 편지를 받을 당시의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은 마냥 기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로마의 박해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고, 그리스도교는 전통적 유대교인들과 그리스인 모두로부터 낙인찍힌 이들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하는 권면은 무리한 요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기뻐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낱말은 카이레테’(chairete)입니다. 기뻐하라라는 뜻의 카이레테동사는 기쁨을 뜻하는 카라’(chara)은혜를 뜻하는 카리스’(charis)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기뻐하십시오하는 요청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상황을 보고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기뻐하라, 이것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전한 첫 번째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두 번째 소원은,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일상을 잠시 멈추고,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고, 은혜 안에서 거듭남을 체험합니다. 우리 안에 미움이 차오를 때, 원망과 근심과 염려가 차오를 때,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고,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해 새 힘을 얻도록 하는 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는 단지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시간이 아닙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소원을 우리 안에 담아내는 시간입니다. 우리 안에 가득 찬 자기중심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원죄라고 말한 뿌리깊은 자기중심성을 덜어내고, 그 빈 자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는 시간이 바로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그렇기에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를 채우고, 하나님의 소원을 우리의 소원으로 삼게 됩니다. 바울이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하고 말씀하는 이유입니다.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마지막 소원은,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범사란 모든 일입니다. 좋은 일만 아니라, 나쁜 일, 슬픈 일, 좌절하게 만드는 일, 무기력하게 만드는 일, 낙심하고 주저앉게 만드는 일, 이 모든 일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는 권면입니다. 얼마 전 유튜브를 통해 80년대 한국교회 부흥 성장기를 이끈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다시 들게 되었습니다. 여러 편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 가운데 믿음에 관한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일단 믿기로 하면, 그때부터 마귀들이 온갖 시험을 가져온다고 합니다. 믿으려고 하면, ‘그게 되겠어?’ ‘그런다고 변하겠어?’ ‘아무리 기도해봐야 똑같아하는 합리적인의심들이 막 밀려오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심들이 말이 안 되면 귀 기울이지 않겠는데, 내가 생각해도 말이 되기 때문에, 믿음을 택하기보다 의심을 택하고, 절망하게 되고, 실패하게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이라는 말씀입니다. 믿기로 결단한 순간, 이 모든 의심과 싸워 이겨야 하는 전쟁이지, 감정에 치우쳐서 믿다가 말다가 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익숙한 말씀이었지만, 그날 저는 이 말씀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오늘 바울의 권면도 같은 맥락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하는 권면은, 믿음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기로 결단하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의심을 끊어내고, 불평과 원망과 불안을 끊어내고,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세 번째 소원,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이렇게 항상 기뻐하시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결단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거듭난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은혜 안에서 기뻐하고, 기도 가운데 은혜를 체험하고, 감사의 결단으로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신 뜻을 우리 가운데 이루어 가십니다. 바울은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시니,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하고 말씀합니다.

 

3.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몸과 마음이 힘든 분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도 시들해지는 것 같고, 믿음의 열정도 식어가는 것 같은 생각에 고민이 된다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교회도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조건이 어떠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합니다. 우리 인생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주님이 가신 복음의 길이 우리의 길입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 바울은, 그 길에 이르는 세 가지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풍요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과 한 주간도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31 부름과 응답 (2020.1.17. 주현 후 제2주) new 홍목사 2021.01.17 0
930 빛과 숨 (2020.1.10. 주현 후 제1주) 홍목사 2021.01.10 17
929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 안에서 (2021.1.3. 신년주일) 홍목사 2021.01.03 15
928 덕분에 살아가는 삶 (2020.12.31. 송구영신예배) 홍목사 2021.01.03 9
927 밤은 깊고 낮은 다가오는데 (2020.12.27.) 이계준 2020.12.29 5
926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2020.12.25. 성탄절) 홍목사 2020.12.25 8
925 주님이 계신 곳 (2020.12.20. 대림절 제4주) 홍목사 2020.12.20 12
»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 (2020.12.13. 대림절 제3주) 홍목사 2020.12.13 28
923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2020.12.6. 대림절 제2주) 홍목사 2020.12.06 30
922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 (2020.11.29. 대림절 제1주) 홍목사 2020.11.29 26
921 주님께 한 일 (2020.11.22.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 왕국주일) 홍목사 2020.11.22 16
920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 (2020.11.15. 이계준 목사님 연세대학교회 주일설교문) 이계준 2020.11.16 21
919 자기를 낮추는 사람 (2020.11.15.) 홍목사 2020.11.16 16
918 신앙의 계승 (2020.11.8.) 홍목사 2020.11.08 23
917 주님의 믿음 (2020.11.1. 추수감사주일) 홍목사 2020.11.02 24
916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 (2020.10.25. 종교개혁주일) 홍목사 2020.10.25 24
915 교회의 이정표 (2020.10.18.) 홍목사 2020.10.18 38
914 은총과 구원 (2020.10.11.) 홍목사 2020.10.12 18
913 맡은 자의 본분 (2020.10.4. 세계성찬주일) 홍목사 2020.10.04 19
912 행동하는 믿음 (2020.9.27.) 홍목사 2020.09.28 28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47 Next
/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