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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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

 

본문: 시편 147:1-11; 마가복음 1:29-34

설교: 홍정호 목사 (2018.2.4. 주현 후 제5)

 

[할렐루야, 우리의 하나님께 찬양함이 얼마나 좋은 일이며, 하나님께 찬송함이 이 얼마나 아름답고 마땅한 일인가! 주님은 예루살렘을 세우시고,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신다. 마음이 상한 사람을 고치시고, 그 아픈 곳을 싸매어 주신다. 별들의 수효를 헤아리시고, 그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주신다.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니, 그의 슬기는 헤아릴 수 없다. 주님은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시며, 악인을 땅 바닥까지 낮추시는 분이다. 주님께 감사의 노래를 불러드려라, 우리의 하나님께 수금을 타면서 노래 불러드려라. 주님은 하늘을 구름으로 덮으시고, 땅에 내릴 비를 준비하시어, 산에 풀이 돋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이를 주신다. 주님은 힘센 준마를 좋아하지 않으시고, 빨리 달리는 힘센 다리를 가진 사람도 반기지 아니하신다. 주님은 오직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과 당신의 한결 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을 좋아하신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2월의 첫 주일, 주현 후 다섯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절기상 입춘이지만, 한파특보가 내렸습니다. 한겨울 추위는 겨울이니 추운가보다 하지만, 봄의 길목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가운데 엄습하는 추위는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그래도 우리는 압니다. 겨울은 가고 봄은 옵니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추위가 한창입니다만, 이제는 봄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1.

 

오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경외(敬畏)’공경하고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삶이란 어떤 삶인지, 잠시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을 닮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존경하는 인물을 닮는 게 아니라, 닮고 싶어서 존경합니다. 나는 존경하는 사람이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간혹 만납니다만,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면, 누구를 존경한다는 말은 안 해도, 어떤 부류의 사람을 존경하겠구나,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멀리하겠구나 하는지는 대충 을 잡을 수 있습니다.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보면 말 속에 녹아 있는 그 사람의 세계관과 만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세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 세계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하기에는 힘에 부치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어린아이나 어른이나 다 그들의 세계가 있습니다.

 

저이와는 대화가 어렵다, 말이 안 통한다, 어떤 이들을 만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말이 안 통한다는 건 그가 와 대화가 어렵다는 것이지, 모든 사람과 그렇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나랑은 안 통해도 다른 이들과는 잘 통하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차이가 뭘까요. 세계관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나와 말이 안 통하는 건 그와 나의 세계관 사이에 접점을 마련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접점을 마련하기 어렵고, 그렇다 보니 말이 안 통하고, 말이 안 통하니 일도 안 됩니다. 이런 경우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편을 가르는 것입니다. 아무 명분이나 하나 내세워서 분리를 주장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이해관계가 앞선 집단의 분열은 늘 이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십시오, 그렇게 쪼개진 이들이 또 쪼개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분열이라는 해결책, 상대방에 대한 무시와 단절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에 첫 걸음을 내디딘 이상, 한두 걸음, 열 걸음 더 걸어 들어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인이라고 해도 자기의 세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앙인이기에 앞서 자연인으로서 우리 모두는 자기만의 고유한 경험과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신앙공동체인 이상, 이러한 자기의 경험과 세계에 대한 확신보다는 성서의 말씀과 공교회의 전통에 대한 존중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한 원칙입니다. 개인의 경험은 물론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 복음의 말씀보다 개인의 경험이나 인식이 앞설 수는 없습니다. 밥 하웃즈바르트라는 네덜란드의 경제학자 겸 기독교윤리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의 우상숭배 경향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습니다. “혁명 이데올로기,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물질 번영 이데올로기, 안보 이데올로기가 서방 세계를 지배하는 우상이다.” 성서의 가르침을 제일의 원칙이자 삶의 근본 토대로 삼아야 할 교회에서조차 이런 이념들이 우상으로 군림하고 있는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제일 원칙은 성서의 근본 가치들을 신앙의 토대로 삼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 대한 여타의 이데올로기적 해석들로 인해 성서의 근본가치가 훼손되지 않도록 원칙을 굳게 지켜내는 것, 그것이 진정한 보수의 역할입니다. 그러면 성서의 근본가치들이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차별, 폭력, 배제, 혐오, 불평등 이런 것들을 정당화하는 것이 성서의 근본가치라고 믿는 분은 여기에 안 계시겠지요? 우리시대에 읽어내야 할 성서의 근본가치는 사랑, 자비, 관용, 자유, 정의, 평등, 평화와 같은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가치들이 우리의 일상에서 그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힘쓰는 것, 그것이 우리시대 신앙인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시대의 조류에 흔들림 없이 성서의 가치를 꼭 붙들고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공경을 삶의 원칙으로 굳건히 세워야 합니다. 식상한 얘기처럼 들리실지 모르지만, 저로서는 다른 말씀을 드릴 게 없습니다. 하나님 공경을 삶의 원칙으로 굳건히 세워야 합니다. 우리시대 무신론의 문제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이론적 공격이 아닙니다. 이론적 공격은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의 편협함을 깨고, 그 넓이와 깊이를 더하는 이론적 저항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말로 경계해야 할 무신론은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투덜거림이 아니라, 실천적 무신론, 즉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하고, 정말로 그렇게 믿고, 아주 확신에 차 있으면서도, 생활에 있어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사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실천적 무신론이야말로 우리시대에 경계해야 할 무신론적 삶의 태도입니다.

 

3.

 

앞서 닮고 싶은 인물을 존경하게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그분의 성품을 우리도 닮기 원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 자비와 용서, 그분의 넓은 품을 우리도 닮고자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일어날 때 그분을 참으로 공경하는 일도 가능합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시인의 노래를 들어보십시오.

 

그분은 흩어진 백성을 모으시는 분입니다. 흩어져 사는 이들을 제 갈 길 가도록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세우시고, 그곳으로 흩어져 사는 이들을 불러 모으시는 자비의 아버지이십니다. 또 주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고, 아픈 곳을 싸매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치료자가 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웃는 얼굴에서는 남들이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 앞에 차마 내놓고 말하기 힘든 내밀한 아픔과 상처까지도 그분은 아시고 싸매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또한 하늘의 별들을 세시고, 그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주시는 분입니다. 하늘의 많은 별들을 보고 우리는 은하수라고 부릅니다. 주권자인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국가는 국민이라고 부르고, 목사는 교인이라고 뭉뚱그려서 칭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 분이 아니랍니다. 그 수많은 별들 하나하나에 다 이름을 붙여주시는 분이랍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건 의미로 충만한 존재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냥 있는존재가 아니라, “의미 있는존재로 우리를 대하시는 분, 그분이 별들에 이름을 붙여주시는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불쌍한 사람은 도와주시고 악인은 땅 바닥까지 낮추시는 분입니다. 혼돈으로 가득한 세계일수록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높이시고 악인을 낮추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없을 때 우리는 작은 바람에도 흔들립니다. 조금만 억울한 일이 생겨도 참지 못하고, 작은 손해도 감수하지 못합니다. 억울하고 손해를 입어도 무조건 참으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억울한 마음을 사람들에 앞서 하나님께서 먼저 알고 계신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아시고,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식으로 갚아주신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땅에 내릴 비를 준비하시고, 산에 풀이 돋게 하셔서, 들짐승과 까마귀 새끼에게도 먹을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돕는 손길을 통해 먹이시고 입히심으로써 당신의 일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능력이 많다고, 힘센 다리를 가졌다고 주님의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을 통해 그분의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4.

 

하나님께서 이런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닮고자 열망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공경하고 한편으로 두려워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는 축복,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누리는 축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그를 경외하여라. 그를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젊은 사자들은 먹이를 잃고 굶주릴 수 있으나, 주님을 찾는 사람은 복이 있어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34:9)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자족함의 복을 누립니다. 젊은 사자처럼 힘세고 날렵한 자도 먹이를 잃고 굶주릴 수 있으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시인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명에 따라 사는 사람은, 그 어누 누구나 복을 받는다. 네 손으로 일한 만큼 네가 먹으니, 이것이 복이요, 은혜이다.”(128:1-2)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보람의 결실을 누리는 기쁨을 얻습니다. 우리가 하는 수고가 헛된 것이 되지 않고, 때가 이를 때에 보람의 결실을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애써서 한 일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고,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때가 반드시 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낙심하지 않고 우리의 할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과 잠언에 보면,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누리는 축복이 참 많이 나오지만, 시편에 나오는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누리는 복 가운데에서도 제가 참 사모하는 복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의논하시며, 그들에게서 주님의 언약이 진실함을 확인해 주신다.”(25:14) 아멘입니다. 하느님은, 옳은 길이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몰아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과 의논하시며, 그들에게서 당신의 언약이 진실함을 확인해 주시면서 당신의 길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놀라운 말씀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의 예배를 받는 자리에 머물지 않으시고,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과 친히 의논하시면서, 그분의 일을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하심을 통해, 당신의 언약이 진실한 것임을 확인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신앙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뭇사람의 하나로 대하지 않으시고, 내 이름을 지으시고 기억하실 뿐만 아니라, 나와 의논하시며 당신의 일을 함께 해 나가신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당신의 언약이 참되다는 것을 증거 해 주신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앙생활의 감격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기쁨입니다.

 

5.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과 그분의 한결 같은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을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좋아하실 뿐만 아니라, 그와 의논하시며, 그분의 일을 함께 해 가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이 흘리는 땀에 보람의 결실로 응답해 주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 누구나 중심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교회란 무엇을 하는 곳인가, 신자들이란 사람들은 뭘 하자는 사람들인가 의구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신앙의 근본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근본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교회의 어떤 말도, 교회가 하는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는 근본에서 벗어날 수 없고, 벗어나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위해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고, 날마다 그렇게 세워져가는 사람들입니다.

 

봄의 문턱에 들어선 주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근본으로 돌아가, 그분과 동행하는 생활의 기쁨을 누리는 한 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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