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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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숨

 

본문: 창세기 1:1-5; 사도행전 19:1-7

설교: 홍정호 목사 (주현 후 제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하시니, 빛이 생겼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셔서, 빛을 낮이라고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주현절(主顯節, Epiphany)을 지나 맞이하는 주현 후 첫 번째 주일입니다. 교회는 매년 16일을 주현절로 지킵니다. 개신교에서는 주현절이라고 하고, 가톨릭에서는 주님 공현 대축일로 칭합니다. 주현절은 그리스도교에서 부활절 다음으로 오래된 축일이자 절기로서 전례상 성탄절과 같은 대축일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나 동방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주현절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당신의 존재를 세상에 환히 드러내신 날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주현절은 성탄절과 부활절 사이에서 예수님의 세례와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날, 새로운 창조를 선포하는 축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탄절과 부활절에 세례예식을 행하지만, 전통적으로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날을 기념하여,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을 세례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빛이신 당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신 것처럼 우리도 세례를 받음으로, 혹은 이미 받은 세례의 의미를 되새김으로써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거듭난 존재로 세상에 드러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세례는 거듭남의 의례입니다. 이전까지 내가 중심이 된 삶이 있었지만, 이제 옛 사람은 죽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남을 자기 자신과 회중 앞에서 공표하는 행위가 세례입니다. 말하자면,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새롭게 창조된 존재로서 제2의 삶의 시작을 알리는 의례가 세례식입니다.

 

저는 우리 개신교에서 세례명이 사라진 것을 참으로 아쉽게 생각합니다. 모든 신자가 세례명을 갖는 대신 교회에서 맡은 역할에 따라 집사, 권사, 장로, 목사로 불리는 직분이 이름을 대신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존재로 호명되느냐 하는 것은 자아 정체감 형성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나를 불러주는 그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름이 곧 존재는 아닙니다만, 이름과 존재는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세례를 받으며 새로운 이름을 받는 것은 삶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됩니다. 물론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옛 이름을 간직하면서도 거듭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와 더불어 새로운 세례명을 얻고, 교회와 이웃들로부터 그 이름으로 기억되고 호명될 때 우리는 이름에 걸맞은 삶에 더 가까이 가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이름값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지난 마당에, 개신교와 가톨릭이 그리스도교의 한 형제로서 서로 좋은 점을 더 많이 배우면 좋겠습니다. 가톨릭은 개신교로부터 다양성과 개방성의 가치를 배우고, 개신교는 가톨릭으로부터 의례와 질서의 가치를 배워 사이좋게 조화를 이뤄나가면 참 좋겠다, 생각합니다. 아무튼 우리 개신교에 세례명은 없습니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존재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빛 되신 주님의 은총이 주현절을 맞이하는 교우 여러분과 가정에 함께 하시길 빕니다.

 

2.

 

주현 후 첫 번째 주일에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장 천지창조의 첫째 날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아니라도, 성경의 맨 처음 시작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오해도 많습니다. 특별히 과학이 일상을 설명하는 보편언어로서의 지위를 누리기 시작한 17세기 이후,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선언은, 성경을 믿을 수 없는 말로, 과학적 사고에 어긋나는 비합리적인 말로 각인시키는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실제로 오늘날까지도 창세기 11절을 오로지 자연과학적 관점에만 접근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천지창조 이야기가 과학적으로납득이 가지 않으면 거짓이 된다는 신념 하에서, 어떻게든 하나님의 말씀을 과학적으로증명하려는 시도에 매진합니다.

 

성경이 굳이 비과학적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반드시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언어여야 할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되는 부분도 있고, 안 되는 부분도 있고, 도덕적으로 납득가능한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말씀은 그냥 말씀입니다. 조금 어렵게 말씀드리면, 성경은 타자성으로 충만한 텍스트입니다. ‘타자성이란 주체의 이해로 귀결되지 않는 타자가 지닌 특성입니다. 타자가 내가 아닌 이유는, 타자라는 존재는 나의 이해로 안착하지 않는 타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늘 내 생각과 다르고, 기대를 어긋 내는 존재가 타자성을 지닌 타자의 특성입니다. 이렇듯 타자인 다른 사람의 마음 하나도 다 알 수 없는 인간이, 초월적 타자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주 작은 일부분만, 그것도 파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과학의 언어는, 초월적 타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는 있지만, 전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구약학자들은 창세기를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인 기원전 6세기에 기록된 문헌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멸망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후 바벨론의 그발 강가로 끌고 가서 그곳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에 기록된 책이 바로 성경의 맨 처음 시작을 알리는 창세기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선언 뒤에 나오는, 혼돈, 공허, 어둠과 같은 낱말들에는, 하루아침에 생활의 터전을 잃고, 낯선 땅에 끌려가 포로로 지내야 하는 이들의 절망감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혼돈과 공허, 그리고 어둠이라는 낱말 속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깊은 혼돈과 공허, 그리고 어둠 가운데에서 빛이 생겨라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의 강력한 임팩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창세기는 설명이 아닙니다. 창세기는 선언입니다. 깊은 혼돈과 공허, 어둠 가운데 빛이 생겨라하신 하나님의 선언이, 바로 창세기에 담긴 신학적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절망을 새 희망의 빛으로 만드시는 분이시며, 천지의 모든 것이 그분에게 속해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3.

 

여기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창조의 첫째 날 빛이 창조되기에 앞서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혼돈과 공허, 깊은 어둠이 빛이 창조되기 전에 있었습니다. 빛은 이런 것들 위에 빛이 생겼습니다. 혼돈과 공허, 어둠이 있었기에 빛의 광명함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희망은 어떤 이에게 가치가 있습니까? 희망을 잃어버린 이에게,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이들에게 가치가 있습니다. 자유는 어떤 이에게 가치가 있습니까?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가치가 있습니다. 사랑은 어떤 이에게 가치가 있습니까? 참된 사랑을 갈망하는 이에게 가치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희망이나 자유나, 사랑과 같은 가치들 모두, 그것들이 결핍된 상태에서, 말하자면 혼돈과 어둠과 공허 속에 빛을 잃어버린 상태에 빛이 임할 때 더욱 그 가치가 빛나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인생에서 혼돈과 공허, 어둠을 경험하는 상태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임하는 순간이요, 그분의 빛으로 우리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순간이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는 이 혼돈과 공허, 어둠이 깊은 곳에 하나님의 영이 움직이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이란, 루아흐 엘로힘, 하나님의 숨결과 같은 말입니다. 루아흐는, 바람, 숨결이라는 의미를 갖고, 성령을 뜻하는 낱말로도 사용됩니다. 혼돈과 공허, 어둠이 깊을 때에 하나님의 숨결, 성령이 그곳 가운데 함께 계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혼돈과 공허와 깊은 어둠 가운데에서도 운행하시며, 창조의 바탕이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창조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왜 낙심하지 않는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자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왜 절망을 이기고 희망의 사도로 살아갈 수 있는지, 창조신앙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 깊은 어둠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영은 이미 움직이고 계셨고, 그분의 숨결은 창조의 힘이 됩니다.

 

창조신앙은, 우리 존재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창조된 존재이자, 그분의 숨결로 생기를 얻은 존재입니다. 루아흐 엘로힘, 하나님의 숨결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있는 존재가 됩니다. 최근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좀비가 있습니다. 많은 문화연구자들은 영화 속 좀비를, 정신과 영혼을 잃어버린 채 욕망의 노예가 되어 표류하듯 살아가는 현대인의 표상으로 해석합니다. 육체를 지닌 좀비가 사람이 아닌 이유가 무엇인가요?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존재처럼 먹고 걷고 있지만, 그 안에 숨결이 사라진 존재의 표상입니다.

 

창조신앙은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육신만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로 충만한 존재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힘이 바로 창조신앙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깊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 절망의 심연 가운데에서도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 그분을 믿고, 그분을 주인으로 삼아 살아가는 신앙이 바로 창조신앙이요, 구약과 신약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우리 신앙의 근원적 힘입니다.

 

이렇듯 창조신앙은, 과학의 언어가 아닌, 삶의 언어로 이해할 때 더욱 풍성한 의미를 갖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은, 설명이 아닌 선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선언은, 우리 존재의 근원이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오늘 우리가 누구인지를 선언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존재이며, 빛의 자녀입니다. 혼돈과 공허과 깊은 어둠 속에 갇혀 있지 않고, 하나님의 숨결과 더불어 희망의 새 빛을 맞이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창조신앙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끝으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하는 말씀도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의 하루는 저녁부터 다음 날 저녁까지입니다. 아침, 점심, 저녁의 순으로 하루가 지나간다고 생각하는 문화와 다릅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에서 특별한 절기에 해가 지면 식사하는 관습은 이런 시간관념이 바탕이 된 때문이겠습니다. 하루의 시작이 저녁이라는 사실, 동틀 녘이 아닌 해질 녘이라는 사실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해질 녘은 어둠을 향해 가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해질 녘은 밝았던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향해 나아가는 변화의 시간입니다. 혼돈과 공허, 어둠을 견뎌내야 하지만, 하나님의 숨결과 더불어 새로운 창조의 빛에 이르는 시간이 바로 해질 녘이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 인생의 저녁과 같은 순간이 왔을 때, 그때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시간에 다가서는 은혜의 시간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4.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밝은 빛으로 세상 어둠을 밝히는 주현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숨결로 어둠을 밝히는 우리의 주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작년 한 해 힘든 삶을 지나왔습니다. 올해는 나아지기를 바랍니다만, 당분간은 또 이렇게 힘든 삶이 지속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에 창조신앙으로 우뚝 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혼돈과 공허와 깊은 어둠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숨결이 언제나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립니다. 그래서 빛이 생겨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 각 사람과,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 가운데 임하길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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