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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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조건

 

본문: 시편 50:1-7; 마가복음 9:2-9

설교: 홍정호 목사 (2018.2.11. 주현 후 마지막 주/변화주일)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말을 주고받았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랍비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들이 문득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고, 예수만 그들과 함께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명하시어,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기 직전 주일인 주현 후 마지막 주, 변화주일입니다. 수난을 당하시기 전,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시어 당신의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산 위에서 제자들은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도 보았습니다. 산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진술이라기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나님의 현존(現存) 가운데 있음을 증언하는 이야기입니다. 산 위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빛나는 모습을 보고, 하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주님과 동고동락했던 그들이었지만, 거기에서 그들은 주님의 낯선 모습과 다시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다는 복음서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청중들은 모세의 빛나는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고, 출애굽기는 전합니다(34:29). 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이 모세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을 모세에 빗대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율법이 주어졌듯이,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계명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새 계명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4-35) 주님은, “너희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시면서,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라고 친히 밝히셨습니다(7:12).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사랑의 마음이 없을 때 율법은 칼이 됩니다. 율법이 본래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선하신 분이며,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문제는 율법을 독점하고, 율법의 권위를 빌어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인 양 왜곡하여 전하는 무지하고 교만한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엉뚱하게도,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 상대에 대한 존중과 사랑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자기 손에 쥐어진 율법을 칼로 휘두르는 이들입니다. 이렇듯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이 본뜻을 잃어버렸을 때 주님은 율법의 본뜻이 사랑에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다른 생명을 희생시켜서 자기가 의로워지는 제사가 아니라, 자기를 희생해서 남을 의롭게 하는 십자가 사랑의 길이 그분의 길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이 십자가 사랑의 길을 자기의 길로 삼기로 결단한 이들, 일상을 통해 매일 이 길을 가고자 기도하며 애쓰는 이들입니다.

 

우리가 종종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내가 싫으면 하나님도 싫어하실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미운 사람, 내가 싫어하는 대상을 하나님도 미워하고 싫어하실 거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신앙의 이름으로 혐오와 폭력, 배제와 차별의 말을 정당화하고, 이를 하나님의 이라고 믿어버리고 마는 잘못을 종종 범합니다. 이런 착각이 신앙인을 오만한 자로 만듭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움에 오래 머물지는 말아야 합니다. 밉고, 싫고, 이해가 잘 안 되도, 기도하면 나와 그 사이에 거리두기가 가능해지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내가 경험한 모습이 다는 아닐 거야, 내가 모르는 다른 면이 있을 거야, 저이는 나랑 안 맞고 입장이 다른 거지, 누군가에게는 소중하고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일 거야,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나 같은 사람도 사랑하시고 용서하셨는데, 나나 저이나 다를 게 없지,’ 조용히 기도하면, 이런 마음들이 불쑥 고개를 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기도할수록 미움이 확신으로 변하고, 분노가 깊어지는 건 기도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차라리 기도를 멈춰야 합니다. 기도를 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고요히 귀 기울여야 합니다.

 

3.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 이것이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본문을 읽으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였습니다. 얼마나 아끼셨으면 다른 제자들도 많은데 이들을 따로 데리고 산에 가셨겠습니까? 아무튼 이 세 명은 주님의 뜻을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잘 알고, 그분의 곁에서 위로와 힘이 되어주었던 신실한 제자들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산에 올라 낯선 주님의 모습과 만났습니다. 주님의 옷이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개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빛나는 모습을 보았고, 엘리야와 모세가 주님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당황하여 말했습니다. “랍비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랍비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마가는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합니다. 당황해서 나온 말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때 하늘에 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산 위에 주님과 함께 있던 그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주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제자들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못 들었겠습니까?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안 들었겠습니까? 그들은 누구보다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분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잘 분별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주님의 말씀을 가장 잘 이해하고 가까이에서 경청했을 그 제자들을 향해 말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공생애 기간 내내 주님과 함께 한 그들이었지만, 높은 산 위에서 그들은 낯선 주님의 모습에 당황했습니다. 빛나는 그분의 모습을 뵙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겁에 질렸습니다. 그동안 알고 있던 익숙한 주님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계신 분은 인간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당황한 이유는, 어쩌면 그들이 예수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누구보다 예수님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에, 남들이 모르는 저분의 인간적인 모습을 우리는 알고 있다는 교만이 어느덧 그들 가운데 자리 잡았기 때문에, 그들은 변화산에서 만난 주님의 모습에 당황했습니다. 한 마디로 낯설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늘 힘써왔던 그들이었지만, 그 일은 어느덧 익숙한 일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4.

 

신앙은 일상이 될 때 성숙합니다. 그러나 일상이 된 신앙이 감격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당연한 것이 되고, 구원이 아예 전제가 되어버릴 때 우리의 믿음은 타락의 길로 접어듭니다. 그분 앞에서는 당연한 게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날마다 새로운 은혜입니다. 나의 나 된 것도 은혜이고, 새로움을 입은 것도 은혜이고, 구원받아 성화와 완전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도 은혜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에 있어 어느 것 하나 거저 되는 것, 그냥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전통신학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일입니다. 내가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되다하다의 차이를 다 아실 겁니다. 되는 건 수동형이고, 하는 건 능동형입니다. 믿음은 스스로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 구원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조건 없이 받아들여짐을 경험하는 것,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 그것이 구원을 받는다, 구원되다의 의미입니다.

 

변화도 그렇습니다. 변화도 우리의 능동적 행위이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 되는 것입니다. 새번역은 마가복음 92절의 마지막 문장을 우리말 문법에 따라 능동형으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과 영어성경에는 이 문장이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μετεμορφώθη There he was transfigured before them).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이 변화하신 게 아니라, 변화되신 겁니다. 능동과 수동은 같은 사실을 말하지만, 주체를 달리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신비한 능력으로 모습을 변화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변화되신 것입니다. 수난에 앞서, 주님은 하나님의 뜻 앞에 당신을 온전히 내 놓으시고, 그분의 뜻 가운데 변화되신 것입니다.

 

그러면 변화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변화되기만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변화는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변화는 변화를 향해 열린 이들에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자기를 열어 놓고, 변화를 열망 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복음을 향해 우리의 귀를 열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세워진 높은 편견의 벽이 복음 앞에서 무너져야 합니다.

 

내가 안다는 생각, 내가 경험했다는 특권의식을 넘어, 복음의 말씀 앞에 겸손히 우리의 마음과 귀를 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변화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임한 음성,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하늘의 명령은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도 말씀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10:17)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의 말씀 앞에 자기의 모든 경험과 지식을 내어놓을 마음, 즉 믿음의 결단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변화가 없는 한낱 종교의례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5.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변화주일을 끝으로 사순절을 맞이합니다. 복음의 말씀 앞에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 주님이 보시는 것을 우리도 보고, 주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도 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과 자비의 일꾼으로, 갈라진 이들을 하나 되게 하는 화해의 평화의 사도로 부르십니다. 이 일을 위해 복음으로 날마다 새로워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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