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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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울 성전

 

본문: 시편 19:1-14; 요한복음 2:13-22

설교: 홍정호 목사 (2018.3.4. 사순절 제3, 삼일절기념주일)

 

[유대 사람들의 유월절이 가까워져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는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걷어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에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구요?”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그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서,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사순절 두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감리교회가 삼일절기념주일로 정해 지키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내년이면 삼일운동 백 주년이 됩니다. 삼일운동 백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모임들이 각 계에서 한창입니다. 얼마 전 어느 모임에 참석했다 한 역사학자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종교인, 특별히 개신교인이 많았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분들이 민족을 대표한다고 할 만큼 모든 면에서 뛰어난 분들이라서가 아니라, 종교인의 책임감 때문에 그 자리에 참석했던 분들이었다는 점입니다. 민족대표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난 이들은 당시에 따로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답니다. 독립이, 모여서 선언문을 작성한다고 될 일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일제를 자극해 무고한 희생자만 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라도 해야겠다고 나선 이들 가운데 종교인들이 많아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종교인이 많았다는 설명입니다.

 

자주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리스도교는 유다의 지혜가 아닌, 베드로의 믿음의 승리를 선포하는 종교입니다. 이 세상에서, 지금 이 시대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유다의 지혜를 따를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분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바라보고, 의의 최후 승리를 믿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어느 원로 목사님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좋은 게 좋은 게 아니고, 옳은 것이 좋은 것이다하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인으로서 지녀야 할 삶의 태도이겠습니다.

 

2.

 

예수님의 일행은 예루살렘에 당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성전 뜰에서 제사에 바칠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을 꾸짖고 내 쫓으셨습니다. 황당한 일이 아닙니까. 그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탐욕에 물들어 큰 이익을 남기려는 목적에서 거기에서 장사하던 이들이라기보다는, 제사에 꼭 필요한 제물을 매매하는, 유대 성전중심체제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역할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하느님께 바칠 제물을 제공하고 있다는 직업적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이들이 펼쳐 놓은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이 장면만으로는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같은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누가복음 19장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누가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셨다고 전합니다(19:41).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이유입니다. 주님은,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면서, 그 가운데에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을 지속해 나가는 이들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종교에는 양면적인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회 체제와 문화를 유지하도록 만드는 제의적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체제와 문화의 변혁을 이끌어내는 예언자적 기능입니다. 제사장의 주된 역할은 기존의 체제와 문화를 유지하고 계승해서 발전시켜 나가는 데 있습니다. 반면, 예언자의 역할은 변화를 요청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과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과 대립각을 세우신 만큼 그분의 삶에 있어서는 예언자적 역할이 두드러졌다고 말씀드려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주님의 가르침이 제도 교회 안으로 편입되고, 조직 안에 직제가 형성됨에 따라, 교회는 예언자적 역할과 더불어 전통적인 제사장의 역할도 하게 된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 크고 작은 공동체를 막론하고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계승하는 종교공동체의 지도자들은 대체로 이 두 가지 역할을 오가며 맡은 바 소명을 다합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예언자의 역할 가운데, 언제 어떤 역할에 힘을 실어야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대체로 종교지도자들의 가치관과 경험, 그리고 경전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뉘곤 합니다. 오늘 본문인 성전정화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제사장들과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따르면서도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제사장들에게는 성전중심체제의 유지가 중요한 가치였던 반면, 예수님에게는 이 성전을 허물고 새로운 성전을 세우는 일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전파괴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분의 율법의 파괴자도 아닙니다. 다만 그분은 마흔 여섯 해에 걸쳐 지은 성전이라 할지라도, 그 성전이 율법의 본뜻에서 벗어났을 때 그것은 허물어져야 할 우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신 것뿐입니다. 주님의 최종 목적은 성전을 허무는 데 있지 않고, 새로운 성전을 세우는 데 있습니다. 복음으로 새로워진 삶, 모든 신자의 삶이 성전이 되는 거듭남이 그분이 세우실 새 성전입니다.

 

3.

 

미국의 총기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언론 보도를 통해 종종 접합니다. 남들이 다 살고 싶어 하는 저 나라에서 그런 비극적인 일들이 어떻게 저렇게 자주 일어나는지 의아해 합니다. 총기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모두가 알지만, 총기 규제는 미국 내에서 풀기 힘든 정치적 과제입니다. 미국 우선주의, 아메리카니즘을 신봉하는 미국의 극우주의자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군산복합체, 그리고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만나, 총기 문제를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뜨린 채 방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렇듯 구조적인 차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책은 언제나 개인의 심리적인 문제, 정신의 비정상적 일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미국 안팎의 양심적인 이들은 질문하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기를 둘러싼 이들의 이해관계의 틀을 벗어나는 다른 말을 하는 건 미국사회 내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상을 둘러엎으신 주님은, 이렇듯 성전을 둘러싸고 한 몸이 된 이들 한 가운데에서 그들의 상을 둘러엎으신 것입니다. 율법의 본질,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의 본질은, 거죽만 남은 율법의 가르침을 반복하고, 로마의 식민지배체제에 종노릇하며 사는 일상을 지속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은, 불의한 체제에 눈 뜨고 저항하는 이들을 길러내는 데 있지, 체제에 순응하는 이들을 길러내는 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우리 신앙이 사회현실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문제는 어떤 현실, 어떤 사회 정치적 현실에 뿌리내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현실에 뿌리내리는 신앙실천을 한다지만, 상황 판단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길에 들어서게 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합니다. 이것은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식민과 분단의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은 나라에서, 그 아픔이 오늘 우리의 일상을 깊이 파고들어 갈등의 뿌리를 깊이 내린 상황에서 이른바 예언자적역할을 한다는 것은, 참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고백을 해 볼까요. 목사는 정답을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정답을 말하는 건 설교하는 목사의 역할이 아닐뿐더러, 공부하는 사람의 기본자세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어쩌면 이 점이 저와 다른 목회자들과의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정답을 말할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그리고 제 자신도 누가 말해주는 정답에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정답이 아니라, 정답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것, 그것이 설교자로서의 저의 역할이라고 믿고 이 강단에 섭니다. 길은 여러분이 스스로 찾는 것이고, 스스로 가는 것입니다. 정답이 아니라, 질문을 갱신하도록 만드는 것, 여러분이 갖고 있는 삶에 관한 질문들을 복음에 비추어 새로운 질문으로 바꾸도록 돕는 것, 그것이 복음의 선생 역할을 맡은 이들의 본분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이 삼일절기념주일입니다만, 일제 강점기 하에서도 현실 인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같은 말씀을 같은 장소에서 들으면서도, 은혜 받는 부분이 저마다 다른 것처럼, 똑같은 성경을 펼쳐놓고서도, 어떻게 저렇게 다른 해석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다른 해석이 많습니다. 정신이 어질어질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말씀드리는 것은, 길은 결국 여러분 자신이 찾고, 여러분이 스스로가 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누가 믿으라고 해서 믿고, 믿지 말라고 해서 안 믿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누가 길이라고 해서 가고, 길이 아니라고 해서 안 가는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신앙의 주체입니다. 목사만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신자 각 사람이 신앙의 주체입니다. 이것이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정신입니다. 신자 각 사람은 성경적 삶의 길잡이인 목사의 인도를 따라 자기 갈 길을 가는 사람이고, 교회는 그렇게 모인 이들이 한 몸을 이루어 보조를 맞추어 가는 공동체입니다.

 

4.

 

주님은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정화사건이 빌미가 되어, 십자가 처형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마흔 여섯 해의 땀과 보람의 결실인 성전이 무너지는 것은 누구도 원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렇게 많은 땀과 눈물로 지어진 성전이라 할지라도 본뜻을 잃어버리면 무너지는 것이 순리라고 하셨고, 이 일로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한 층 한 층 올라갈 때마나 집 짓는 이의 보람과 영광이 됩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지은 집은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것이 오히려 재앙입니다. 오늘 무너지느냐 내일 무너지느냐의 차이일 뿐,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언젠가 무너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집은 빨리 무너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라도 수고를 덜 하고 무너지는 것이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모래 위에 지었는데도, 안 무너지고 계속 잘 올라가기만 한다면, 과연 그것이 기뻐해야 할 일이겠습니까.

 

주님은 마흔 여섯 해에 걸친 성전이라 할지라도,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보신 것 같습니다. 무너져야 새 성전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역설은 십자가가 있어야 부활이 있고, 죽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으면 부활의 영광도 없고, 옛 생명이 죽지 않으면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일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열어 가시는 새로운 세계에 믿음의 발걸음을 들여놓게 되는 것입니다.

 

5.

 

교우 여러분, 우리가 허물어야 할 성전, 그리고 다시 세워져야 할 우리 인생의 성전은 무엇입니까?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다고 생각되시거든 돌이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실패하고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하나님께서 세워 가시는 새 역사에 동참할 길이 열립니다. 사순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열어 가시는 새날의 기쁨이 저와 여러분과 삶과 가정 가운데 충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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