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조회 수 110 댓글 0

예수를 통하여

 

본문: 민수기 21:4-9; 요한복음 3:14-21

설교: 홍정호 목사 (2018.3.11. 사순절 제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사순절 네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시는 가운데 하신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그 가운데에서도 엘리트 그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런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하고 반문했고, 다시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거듭난 사람, 새로운 존재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새로운 삶을 향한 열망도, 그러한 삶을 살아갈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이에게 강요한다고 될 일은 아닙니다. 거듭남은 주님의 때가 무르익었을 때에 임하시는 은혜입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람을 지금의 모습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때를 향해 그를 이끌어가고 계신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은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것이 지나온 시간에 대한 성찰과 반성, 그리고 타자와의 화해와 용서의 과정이 생략된 내적 체험인 경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잠시 그 말씀을 드리고 말씀을 이어가려고 합니다.

 

1.

 

개신교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교리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은총을 통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는 개신교가 발명한 교리라기보다는 기독교 역사 속의 교리를 다시금 발견해 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개신교가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개신교만의 주장이 아니라 신약성서의 일관된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중세 가톨릭교회는 구원에 있어 은총과 믿음 이외에 다른 요소들을 구원의 조건으로 절대화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행위보다는) 믿음이, (선행보다는) 은총이, (교회의 전통보다는) 성서가 중요하다고 말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입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서, 우리가 잘 아는 프로테스탄트 신학과 신앙실천의 원리는 당시의 상황에서 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행위나 선행이나 교회의 가르침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개신교의 주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금 퇴행했습니다. 그것은 개신교에서 말하는 구원이, 구원받은 이의 선한 삶과는 본질적인 관련이 없다는 주장, 세상에서 무슨 잘못을 저지른다 할지라도 예수를 믿고회개하고 거듭나면, 예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죄 사함 받고 천국에 간다는 이른바 값싼 구원론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입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의 한 장면을 기억하시지요. 아들을 죽인 살인자가, 아들을 잃고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여주인공 신애에게 단 한 마디의 진정한 사과나 용서를 구하는 일도 없이, 감옥 안에서 신자가 되어, 자기의 모든 죄가 사함 받았다고, 그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고 고백하는 것을 듣고, 면회실을 나온 신애가 쓰러지는 장면, 여러분 모두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영화 얘기만이 아닙니다. 구원을 하나님과 사이에서만 결정되는 문제로, 개인의 믿음의 고백의 문제로만 환원시키는 일부 개신교의 구원론이 갖는 폐해는 일상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달랐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웨슬리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가톨릭교회의 전통과 믿음을 강조한 루터교회의 전통 사이에서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면서, 구원에 있어 행위와 믿음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웨슬리는 이를 갈라디아서를 인용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5:6)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사랑을 통해 일할 때 참된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사랑의 행위 없이, 즉 참된 회개의 증거인 화해와 용서의 과정 없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사랑을 통해 일하는 믿음, 사랑의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믿음입니다. 이 점에서 웨슬리는 믿음을 강조한 종교개혁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개신교 구원론이 빠지기 쉬운 이른바 행위 무용론를 경계합니다. 그래서 감리교회는 믿음과 선행, 은총과 행위, 성서와 전통, 그리고 신앙과 이성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합니다. 감리교인은 신앙적 열광주의에 빠진 채 믿습니다를 외치는 이들이 아니라, 성화를 통해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기를 힘쓰는 이들입니다.

 

2.

 

교리적인 설명을 다소 길게 드린 이유는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은 어제의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도 천국행 티켓은 보장되어있다고 말하는 건 신앙적 기만입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자,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야 할 나무와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어제의 구원이 오늘의 행위를 통해 내일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힘쓰는 이들, 그들이 참으로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런 눈으로 본문에 나오는 믿음이라는 낱말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아들을 믿는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제가 앞서 말씀드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더욱이 믿는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 가운데에서, 세상과 더불어, 세상을 향하여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타자와의 관계가 배제된 믿음, 혹은 이웃과의 모든 관계가 오로지 로만 수렴되는 그런 관계에서의 믿음은, 성서가 말하는 믿음은 아닐 겁니다.

 

교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이 다 암송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이 구절로부터 이른바 사영리라는 전도원리가 나왔습니다. 사영리는 신앙을 전적인 개인적 차원의 문제,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만 해결되면 되는 문제로 환원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됩니다. 여기에는 신앙적 관계의 중요한 한 축, 즉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없습니다. 믿음의 문제를, 앞서 말씀드린 영화 <밀양>에서와 같이, 타자가 배제된 하나님과 나의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시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영리에는 오직 믿음의 자리는 있을지 몰라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자리는 없습니다.

 

3.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예수를 통하여 새로운 삶의 길에 이르는 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하신 주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이의 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교리적으로만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표준새번역)는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한다면, 그분을 닮게 되고, 그렇게 주님을 닮은 이라야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동안 그분을 통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분의 성품을 닮지 않고, 그분의 향기가 몸에 배지 않는다면, 예수를 통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길을 걸으면서 예수를 통한다고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인지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요컨대 하나님께로 나 있는 예수라는 길을 자기의 길로 삼아 가는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로 이른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나 안 믿나 유심히 보고 계시다가 믿으면 천국, 안 믿으면 지옥으로 보내려고 화난 눈으로 감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교리적인 말이 아니라 고백적 언급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지옥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게 아니라, 스스로 가는 곳이라고 믿습니다. 요한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고 말합니다. 저도 요한과 생각이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지옥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입니다. 지옥이 뜨거운 화염에 쌓여있고,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려 퍼지는 장소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곳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이 다 모여 있는 장소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하고, 편안하고, 풍요롭고, 걱정근심도 없고, 모든 게 다 있지만, 단 한 가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곳, 초월을 향한 열망이 사라진 곳, 그곳이 제가 갖고 있는 지옥의 이미지입니다. 천국은 그와 반대일 거라 상상해 봅니다. 결코 행복하다고, 편안하다고, 풍요롭다고, 그리고 아무 근심걱정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단 하나,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잃지 않는 곳, 초월을 향한 열망에 굳게 뿌리내린 삶의 장소, 그곳이 천국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이상한가요?

 

4.

 

요한은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빛으로 부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없이 모든 것을 누리는 삶으로부터,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요한복음에 앞서 읽은 민수기에서 모세가 기둥에 달아올린 구리뱀을 쳐다본 이들은 뱀에 물린 상처가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시대 뱀에 물려 신음하는 이들의 소리가 도처에서 들립니다. 상처 입은 그들이 바라볼 대상이 필요합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시대 희망의 이정표가 될 이들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친히 이정표가 되어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닙니까. 길을 잃어버린 이들, 뱀에 물려 신음하는 이들이 그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통하고 있습니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예수를 길로 삼아, 예수를 통하는 이들입니까? 교회가 손가락질 받는 시대입니다. 신자들이 비신자보다 더 낮은 윤리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비판이 일상화된 시대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감히 누군가의 희망이 되겠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하고 연약한 이들입니다. 허물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뜻에 순종할 때, 부족한 자들을 통해 당신의 귀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될 줄 믿습니다. 한 주간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세상 가운데 전하는 일꾼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93 경계를 넘어 (2018.7.1.) 홍목사 2018.07.01 67
792 풍랑이 일 때 (2018.6.24.) 홍목사 2018.06.24 57
791 복음의 일꾼 (2018.6.17.) 홍목사 2018.06.17 44
790 성령의 능력 (2018.6.10.) 홍목사 2018.06.10 46
789 살리는 믿음 (2018.6.3.) 홍목사 2018.06.04 64
788 성령으로 난 사람 (2018.5.27. 웨슬리회심기념주일) 홍목사 2018.05.27 70
787 진리의 영이 오시면 (2018.5.20. 성령강림절) 홍목사 2018.05.20 66
786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18.5.13.) 홍목사 2018.05.13 67
785 친구 되신 예수님 (2018.5.6. 어린이주일) 홍목사 2018.05.06 58
784 머물러 있어야 할 곳 (2018.4.29. 야외예배) 홍목사 2018.05.01 54
783 주님께 맡긴 삶 (2018.4.22. 교회창립기념주일) 홍목사 2018.04.22 85
782 우리의 주님 (2018.4.15.) 홍목사 2018.04.15 71
781 부활의 증인 (2018.4.8.) 홍목사 2018.04.08 69
780 부활의 자리 (2018.4.1. 부활절) 홍목사 2018.04.01 86
779 종말의 시간 (2018.3.30. 성금요일) 홍목사 2018.04.01 63
778 나귀를 타고 오시는 분 (2018.3.25. 종려주일) 홍목사 2018.03.25 78
777 밀알 신앙 (2018.3.18.) 홍목사 2018.03.18 98
» 예수를 통하여 (2018.3.11.) 홍목사 2018.03.12 110
775 우리가 세울 성전 (2018.3.4. 삼일절기념주일) 홍목사 2018.03.04 116
774 베드로의 오판 (2018.2.25.) 홍목사 2018.02.25 134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41 Next
/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