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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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신앙

 

본문: 예레미야 31:31-34; 요한복음 12:20-33

설교: 홍정호 목사 (2018.3.18. 사순절 제5)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이 몇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리 벳새다 출산 빌립에게로 가서 청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에게로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은 예수께 그 말을 전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그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거기에 서서 듣고 있던 무리 가운데서 더러는 천둥이 울렸다고 하고, 또 더러는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였다.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를 위해서이다.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날 것이다. 내가 땅에서 들려서 올라갈 때에, 나는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 올 것이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밀알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12:13)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다시 살리셨다는 말을 그들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의 대제사장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소생시키신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이 일로 많은 유대 사람이 떨어져 나가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12:11). 바리새파 사람들 역시 예수님을 맞으러 나온 이들을 보며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라는 위험한인물을 주목하는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체념 섞인 투로 불평합니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12:19)

 

오늘 본문은 이렇듯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의 눈총을 받으시면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이후 하신 말씀입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이 몇 있었습니다. ‘그리스 사람은 유대인과 달리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모르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명절을 지키러 올라왔다는 것은, 그들이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들 그리스 사람들은 빌립과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을 뵙고자 했습니다. 본문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 사람들의 뜻을 전하고자 당신을 찾아온 빌립과 안드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12:23)

 

2.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는 말씀의 의미는, ‘이제야 좋은 날이 오겠구나, 그리스 사람들에게까지 내 소식이 전해졌다니 이제 됐다, 드디어 수고한 보람을 거둘 때가 왔구나,’ 이런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이제 죽을 때가 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광을 받을 때, 주님께서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고,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실 때, 곧 죽음의 때를 말합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뵙기를 청한다는 빌립과 안드레의 말씀을 전해 들으시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놀란 그들에게 주님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12:24) 땅에 뿌려진 씨앗이 땅 속에서도 이전의 형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면 그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하고 이내 썩어버립니다.

 

변함이 없다는 것, 한결같다는 것은, 성서의 여러 곳에서 충실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만, 이 경우에는 완고함을 뜻합니다. 충실함과 완고함은 비슷한 듯 보이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씨앗으로 말하자면, 충실함은 씨 뿌린 분의 뜻에 맞게, 때에 따라 변하는 과정에 충실하다는 뜻이겠습니다. 땅에 뿌려진 씨앗이 썩어져 발아(發芽)하고, 성장(成長)하고, 개화(開花)하고, 결실(結實)을 맺고, 시드는 그 모든 생명의 순환과정을 씨 뿌리신 분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이 충실함, 충실한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반면, 완고함은 첫 단계에서부터 어긋나 발아하지도 못한 채 썩어버리는고 마는 것입니다. 씨앗이 썩어지고 부서지기를 거부함으로써, 즉 죽기를 거부함으로써 이후 생명의 순환 과정에 참여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완고함, 완고한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밀알의 비유 뒤에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12:25) 밀알 신앙이란, 이 역설을 삶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선한 농부이신 그분의 손에 들린 씨앗입니다. 그분이 뿌리시는 곳에, 그분이 심으시는 대로, 뿌리고 심겨져 생명의 열매를 맺는 것이 신앙의 보람이자 기쁨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손에 들린 씨앗이 되면, 스스로를 높이지 않아도, 때가 이를 때에 그분께서 우리를 높여주실 것이라고,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12:26)

 

그러나 이 과정은 우리가 경험하는 바처럼 쉽지 않습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죽음들을 그분의 뜻으로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믿음과 더불어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일평생 열심히 일하고, 일에서 보람을 찾아온 분들에게는 은퇴가 곧 죽음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젊은 연인에게는 갑작스러운 이별통보가 세상의 끝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권력을 생명처럼 여기던 이들은 권력이 사라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죽음, 그것은 곧 상실입니다. 내가 갖고 있던 것,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 지금껏 한 번도 내 몫이 아니라고 의심해 본 적이 없던 바로 그것이 사라지는 고통스러운 경험이 죽음입니다. 이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쉬운 일이었을까요? 요한은 제자들에게 밀알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곧장, 예수님의 고뇌를 전달합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말할까?”(12:27)

 

얼마 전 어느 영성집회에 참여해 강사로 오신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첫 목회지로 성남의 한 빈민촌 전도사로 파송을 받아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목회에 보람도 있었지만, 너무 힘들어서 떠나려고 마음을 먹고, 지역 목회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식사자리를 가지셨답니다. 그 자리에, 성남 그곳에서만 20년 넘게 목회를 해 오시면서 감옥에도 다녀오시는 등 온갖 고생을 다 한 선배 목사님 한 분이 계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젊은 그분이 물으셨답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 겨우 2년 버텼는데, 목사님은 어떻게 20년도 넘게 여기에서 이 사람들과 이렇게 오래 계실 수가 있으세요? 정말 대단하십시다.” 그러자 그분이 남들 안 들리게 귓속말로 이렇게 얘기하셨답니다. “정 목사, 잘 들어, 나 오늘 밤에 짐 싸서 도망 갈거야.” 선배 목사님의 갑작스러운 도피(?) 선언에 놀라 할 말을 잃어버린 사이 그분이 그러시더랍니다. “정 목사, 나 매일 밤 이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왔어. 오늘 밤에도 도망갈 생각하면서 잘 거야성남에서 주민교회 이해학 원로목사님과 관련된 일화입니다. 그 자리에서 오늘 밤 도망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이후, 그만큼의 세월이 더 지나는 동안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원로목사님까지 되신 분의 얘기입니다.

 

3.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말할까?” 어쩌면 예수님도 공생애에 나서신 이후 매일 밤 이 생각을 하시면서 잠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낙심하시는 데 그치지 않고, 낙심을 털고 일어나 아버지의 뜻을 향해 가셨습니다.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12:27b-28) 나는 아버지의 일을 위해 이 때에 왔다, 이 믿음이 역경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흔들리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실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해야 할 분명한 하나의 이유가 있으면 그 일에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 일을 계속하기 마련입니다. 직장인들에게 직장은 되도록 안 가고 싶은 곳입니다. 직장에 가지 말고 인생을 즐겨야 할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은 가야 할 곳입니다.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생계를 위한 돈을 마련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일의 보람도 있고, 사회적 관계를 맺는 즐거움도 있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다는 자부심도 있겠습니다만, 가장 직접적이고 분명한 단 하나의 이유를 꼽으라면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게 솔직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되는 이유, 심지어 나오지 말아야 할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도 저입니다만,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도 저 못하지 않게 정답을 말할 능력이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와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인들끼리의 친교 때문입니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입니까? 이 모든 이유들이 신앙생활에 입문하거나 신앙생활을 지속시키는 계기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이유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일평생에 걸쳐 지속될 만한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인간관계는 변하기 마련이고, 우리의 바람, 욕망의 내용도 삶의 시기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을 지속하는 단 하나의 분명한 이유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유 때문에 신앙인으로 살아가십니까? 하나님 중심의 삶,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창조신앙이 그 분명한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주 평신도아카데미를 통해 박일영 교수님께서 귀한 강의를 해 주셨습니다만, ‘만들어진 것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만드신 분에 대한 믿음이 신앙생활의 굳건한 토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 나를 만드신 분, 나를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오늘 여기에 있게 하심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창조주 신앙이 우리 신앙생활의 흔들리지 않는 토대입니다. 사실 그밖에 모든 것은 때에 알맞게 변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것이 완고함이 아닌 충실함을 지향하는 신앙인의 생활입니다. 변화에 자기를 개방하고, 이끄시는 대로 이끌려가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믿음의 모범이 아닙니까? 설사 그 길이 내가 바라는 길과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듯 보인다 할지라도, 앞길을 열어 주시고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의 손길에 자기를 온전히 내어맡기는 삶이야말로 신앙인으로 사는 보람과 기쁨입니다.

 

창조주 신앙은, 밀알 신앙입니다. ‘만드신 분의 손길에 자기를 내어 맡기는 삶, 하나의 밀알이 되어 썩어지고 부서지는 과정이 때로 불안하고 두려운 과정이라 할지라도, 선한 농부이신 그분의 손에 들린 씨앗임을 믿는 가운데 당당함을 잃지 않는 것이 밀알 신앙이자 창조주 신앙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주님의 이 고백이 우리 일상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5.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린 참 믿음의 사람의 될 때 우리는 완고함을 벗어버린 충실한 신앙으로 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일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당위에 사로잡히는 것은, 비록 그것이 바람직하고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밀알 신앙, 창조 신앙으로 살아가는 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삶의 태도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누구나 계획이 있습니다,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린 사람인 이상 그것은 언제나 잠정적인 계획이요, 말랑말랑한 뜻이 되어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이지 않고,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 이외에는 그 어떤 관계도, 재물도, 건강도, 재능도, 타인의 인정도, 그 무엇도 우리를 삶의 근원적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습니다. 근본을 붙드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손에 들린 씨앗입니다. 밀알 신앙으로 살아가십시오. 창조주를 기억하며 사십시오. 그것이 혼돈의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길입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크신 은총과 평화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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