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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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를 타고 오시는 분

 

본문: 시편 118:19-29; 마가복음 11:1-11

설교: 홍정호 목사 (2018.3.25. 종려주일/고난주일)

 

[그들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곧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둘을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서 보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어느 누가 왜 이러는 거요?’ 하고 물으면 주님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 쓰시고 나면, 지체없이 이리로 돌려보내실 것입니다하고 말하여라.” 그들은 가서, 새끼 나귀가 바깥 길 쪽으로 나 있는 문에 매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풀었다.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그들에게 물었다. “새끼 나귀를 풀다니, 무슨 짓이오?” 제자들은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가만히 있었다. 제자들이 그 새끼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등에 걸쳐놓으니, 예수께서 그 위에 올라타셨다.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다.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에 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는 거기서 모든 것을 둘러보신 뒤에,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다니로 나가셨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사순절의 마지막,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에 그분을 맞으러 나온 이들의 손에 종려나무 가지가 들려있었다는 요한복음의 전승에 따른 것입니다. 이날은 또한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이 일어난 한 주일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주님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부터 시작되는 이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키며, 자선과 기도와 금식에 힘쓰는 한 주간으로 보냅니다. 고난주간은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일주일 여정을 따라가면서 그분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의 선포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되묻고 되새기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1.

 

오늘의 복음은 유대인의 대축제인 유월절(passover)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살이하던 그들을 이집트로부터 해방시켜주신 날을 기억하며, 유월절을 대축일로 지킵니다. 이날은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위한 마지막 재앙으로 이집트의 모든 처음 난 것들을 멸하실 때에, 문설주에 피를 바른 유대인 가정을 넘어가”(1212-14) 재앙을 피하게 하신 데서 유래한 날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하신 말씀, 너희는 이 날을 주 앞에서 지키는 절기로 삼아서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켜야 한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이날은 민족의 최대 명절로 지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기간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습니다. 서둘러 이집트를 떠나야했던 그들의 조상들이 누룩을 넣고 빵을 부풀릴 틈도 없이 그곳을 빠져나와야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기억하며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유월절 축제 기간 동안에는 무교병을 만들어 먹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에 온 이유 역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유월절은 예수님 일행처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순례객들로 붐볐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월절 제사에 바쳐진 어린양의 수가 약 25만 마리였다고 하니, 축제를 위해 모인 이들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겠습니다. 주님 일행은 이 많은 순례객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이 이 유월절 기간에 일어났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히 의미가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을, 유월절에 희생 제물로 바쳐진 어린양의 죽음에 비유했습니다. 아무 죄 없는 어린양이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제물로 바쳐진 것처럼, 죄 없으신 그분이 우리를 위해 대신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하셨다는 대속신앙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을 야훼 하나님께서 벌하지 않으시고 넘어가신 것처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의 피로 거듭난 이들, 이따가 성만찬을 합니다만, 희생 제물이신 그분의 살과 피를 우리 안에 모시고, 그 살과 피로 거듭난 이들은, 하나님께서 멸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는 신앙고백이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2.

 

그런데, 유월절에는 예수님 일행 같은 순례객들만 예루살렘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이끄는 제국의 기병대와 보병들로 이루어진 군대 행렬 역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온 이유는, 만일의 소요에 대비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민족해방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이때에 어떤 돌발적인 사태가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이 세력을 규합하여 로마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흐름을 만들어내기라도 한다면, 빌라도의 군대는 그들을 무참히 저지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이집트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뻐하며 이날을 축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 종교적 축제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로마의 식민지배 아래 있습니다. 지금 그들의 정신과 삶을 지배하는 로마제국에 대한 저항은 철저히 차단된 채 과거의 영광을 기념하는 종교적 의례만이 그들에게 허용되는 합법적행위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위와 위엄을 자랑하는 빌라도의 군대 행렬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의 행렬이 대조적입니다. 빌라도의 행렬은 제국의 힘이 보장하는 안전과 번영, 로마의 평화(Pax Romana)의 상징합니다. 그들을 지켜보는 이들은 그 위세에 압도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렬은 어떻습니까? 나귀를 타고 뒤뚱뒤뚱, 흔들흔들, 다리는 땅에 닿을 듯 말 듯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행렬입니다. 근엄함과 위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구약성서 스가랴서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울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운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9:9) 복음서의 의도를 아시겠습니까? 복음을 기록한 이들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할 것 없이, 하나 같이 스가랴의 이 예언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기다려 온 메시아, 공의로운 왕,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선언입니다.

 

스가랴는 그 왕이 오셔서 할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9:10) 나귀를 타고 오시는 왕은 어떤 왕이십니까? 병거와 군마를 없애고, 활을 꺾음으로써 이방 민족들에게 참 평화를 선포하는 왕입니다. 빌라도의 군대가 약속하는 로마의 평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약속하는 예수의 평화(Pax Christi), 그 길을 자기의 길로 삼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길로 삼은 이들입니다. 그리스도를 길로 삼았다는 건, 세상에 다른 여러 지혜로운 길이 있지만, 세상이 말하는 지혜의 길을 택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가신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참 진리의 길로 여기고, 그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자기의 길로 삼은 삶,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입니다.

 

3.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에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펼친 이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그분을 맞이한 이들은 누구입니까? 구원이 필요한 이들입니다. 그들을 현재의 삶으로부터 구원해 줄 누군가를 절실히 바란 이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고통으로부터 해방입니다. 배고픈 이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는 것이 구원이고, 갇힌 이들에게는 자유를 주는 것이 구원이고, 병든 이들에게는 병을 치료해 주는 것이 구원이고, 빚진 이들에게는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런 것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사람들,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가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될 길이 막막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바라며 예수님 일행을 환영한 이들이었습니다.

 

우치다 타츠루라는 일본의 종합지성인이 있습니다. 그는 나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고 싶지 않고 또 폐 끼침을 당하고 싶지도 않다,” 이렇게 말하는 일본인들 잊고 있는 사실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남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살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야말로, 남의 도움이 시스템으로 정착된 풍요롭고 안전한 사회이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라는 사실입니다. 남의 도움 없이도 혼자 잘 살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타인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은 인류사의 90퍼센트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이었습니다. (중략) 혼자라도 살 수 있다는 것을 표준으로 삼는 사회는 역사상 지극히 예외적이라는 사실만큼은 거듭 말해야 합니다” (우치다 타츠루, 어른 없는 사회, 김경옥 옮김, 민들레, 2016, 48-49.)

 

한 사람의 정체성은 보통 소속감에서 비롯됩니다.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느냐, 누가 내 곁에 있느냐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사회적 척도로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안전하고 풍요로운 사람들, 공동체, 사회의 네트워크에 속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권세 있는 자와의 친분을 자랑합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도 그런 장소, 세상에서 권세 있는 자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장소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자랑해야 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국교가 된 것을 자랑하고, 세상 권세자들과의 친분을 자랑하기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의 약함, 그리스도의 겸손과 섬김, 그리고 세상 권세에 대한 그분의 저항의 가르침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점차 자취를 감춰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이 풍요롭고 안전한 네트워크에 속해 있다고 느끼는 한 모든 사람들은 그 안전과 풍요가 지속되기를 바라지, 변화되기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분을 맞이한 이들은 누구입니까? “호산나!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지금 구해주십시오, 주님!” 하고 절박하게 외치는 이들은 어떤 이들입니까? 구원이 필요한 이들입니다. 생의 어떤 절박한 필요 앞에서 구원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는 이들입니다. 재차 말씀드립니다만, 종교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삶에 질문이 없으면, 아직 종교적인 가르침이 말하는 진리에 이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안 물어보고, 안 궁금한 것에 대한 긴 설명이랍니다. 궁금하지도 않은 내용을 참고 듣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드뭅니다. 질문이 있어야 답이 의미 있습니다. 기대가 있어야 의미도 충족됩니다. 여러분은 매주일 교회에 오셔서 저의 이 변변치 않은 설교를 듣고 계시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종교적인 삶, 복음적 삶에 대한 질문과 열망이 있기 때문 아닙니까. 그래도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계시는 게 아닙니까.

 

4.

 

나귀를 타고 오시는 분을 맞이하러 나온 이들, 그들은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 안에서 질문을 잃어버리고 사는 이들과 달리, 자기가 겪는 삶의 고통에 대한 해답을 얻기 원했습니다. 남들처럼 어려움을 호소할 곳 한 군데 없었던 이들, 요즘 같으면 전화 한 통으로 문제를 손쉽게 해결해 줄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었던 가난하고 연약한 그들이야말로, 주님의 구원이 절실히 필요했던 이들이었습니다. 복음서는, 그들이 주님을 맞이하고, 또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이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종려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이 오늘 여러분에게 들린다면, 여러분은 그분을 맞이하러 나가시겠습니까? 남들이 해결해 줄 수 없는, 여러분 각 사람의 문제를 가지고, 저분이야말로 내가 겪는 고통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실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분을 영접하시겠습니까? 또한 여러분은, 빌라도 군대의 위엄이 아니라, 예수의 평화가 세상을 구원하는 참 평화의 길임을 믿으십니까? 예수의 평화는 병거와 군마로 얻는 평화가 아니라, 스가랴의 예언대로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 쓰는 활도 꺾는샬롬의 성취임을 믿으시겠습니까?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일주일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신앙의 근본 물음 앞에 우리 자신을 다시금 세워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사람인가, 예수님은 참으로 나의 구원자인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구원의 길이야말로 의 오늘을 구원하는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길인가. 한 주간 이런 물음을 안고, 우리의 신앙생활을 복음의 터전 위에 더욱 굳게 세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고난주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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