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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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조건

 

본문: 시편 19:7-14; 마가복음 8:27-38

설교: 홍정호 목사 (2021.9.12. 성령강림 후 제16)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길을 나서셨는데, 도중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시기를,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추석을 앞두고, 아침저녁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 가을이 느껴지는 계절입니다. 성령강림 후 열여섯 번째 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가복음 8장의 베드로의 고백과 여기에 얽힌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의 말씀입니다.

 

1.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가 통치하는 가이사랴 지방의 여러 마을로 길을 나서셨습니다. 빌립보는 헤롯 대왕의 세 아들, 헤롯 아켈라우스, 헤롯 안티파스와 더불어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이스라엘을 분할 통치하던 지역의 분봉왕입니다. 예수님은 안티파스의 통치 영역에서 많은 활동을 펼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필립이 통치하는 가이사랴 지역의 마을로 가시는 중에 제자들과 나누신 말씀이 그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길을 가시던 중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 주된 활동을 펼치셨던 안티파스의 통치 영역에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펼치신 많은 이적을 경험했고, 복음의 말씀에 감화된 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또한 당신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지리적으로는 인접해 있지만, 통치자가 달랐던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대답은 예수님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이사랴 지역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답을 들으신 것에 그치지 않으시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질문을 동행하던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은 제자들은 당황하지 않았을까요? 남들이 예수님을 이러저러한 분으로 생각합니다, 하는 사실을 예수님께 전달해 드리긴 했지만, 정작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준비되어 있지 않은 제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을 것 같습니다. 그때 당황한 제자들 사이에서 베드로가, 훗날 교회 역사에 길이 남을 대답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오늘의 본문인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대답을 담백하게 전합니다. 그러나 같은 내용을 전하는 다른 복음서인 마태복음에는 베드로의 대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적극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고 응답한 베드로에 대해 예수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6:17-19) 예수님은 약속대로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권능을 교회에 허락하셨습니다.

 

2.

 

, 만약, 여기에서 말씀을 맺는다면,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합시다’, 하는 교훈으로 말씀을 맺을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인정과 칭찬 바로 다음에 나오는 오늘 본문의 말씀은, ‘베드로와 같은 신앙인이 되자하는 교훈으로 말씀을 끝낼 수 없게 만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8:33b)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말씀하셨을 때의 그 사람과, 지금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하셨을 때의 이 사람은 같은 베드로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의 반석이 되는 베드로 따로, 예수님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탄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 베드로라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도대체 어떤 차이가 이런 간극을 만들어낸 것일까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꾸짖음을 듣기 전에 펼쳐진 상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문제는 이때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를 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싹 잡아당기고, 예수님에게 항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제자들이 예수님께 항의를 했다는 구절은, 지금 이 본문을 제외하고는 한 군데도 나오지 않습니다. 개역개정판에는 아예 없고, 새번역에도 여기 딱 한 군데만 나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베드로가 항의하였다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 에피디마오’ἐπιτιμάω라는 낱말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어 내쫓으실 때(17:18), 바람을 꾸짖어 잠잠하게 하실 때(8:28), 그리고 제자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실 때(12:16) 사용된 낱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항의하였다고 번역된 구절은,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어 악령을 내쫓으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바람을 꾸짖어 잠잠케 하셨던 것처럼,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지한 제자들을 꾸짖어 일깨워주셨을 때처럼, 지금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고 있는 모양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아무튼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은, 베드로의 격렬한 항의와 반발을 불러일으켰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한 나머지 이런 도에 넘는 항의까지 하는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마지않는 베드로의 인간적인 마음을 모르셨을까요? 저는 충분히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의 마음 깊이 숨겨진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베드로의 그 마음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면서도 그에게 이처럼 모질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바로 이 말씀 가운데 해답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3.

 

여기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일과 반드시 달라야만 하나요? 하나님의 일이 사람의 일이고, 사람의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닌가요? 옳은 말씀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이런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전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기도할 때마다 떠오르고 새겨지는 말씀입니다. 내가 에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내가 원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는 믿음을,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전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는 말씀에 밑줄을 긋고, 이 구절을 응답받는 기도의 근거로 삼아 기도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무엇을 구하는 데 제일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제일 목적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도록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도록 하나님과 연결되는 행동,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렇게 연결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는 말씀이 우리 삶에 이루어집니다.

 

저는 이런 가르침을 신학생 시절 좋은 스승을 만나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제가 배운 것은, 기도는 기준음에 악기를 조율하는 것과 같다, 하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악기라도, 그리고 아무리 훌륭한 연주자라도 기준음에 조율되지 않은 악기가 손에 들려 있다면, 아름다운 선율은커녕 제소리도 낼 수 없습니다. 지금 내 손에 들린 악기가 얼마나 좋은 악기인지, 겨우 연습용으로만 쓸 수 있는 악기인지, 아니면 장인의 숨결이 깃든 수억 원에 이르는 악기인지,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장인이 만든 훌륭한 악기라 할지라도 기준음에 제대로 조율이 되지 않은 악기는 그 어떤 곳에서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줄이 너무 느슨해도 안 되고, 너무 팽팽해도 안 됩니다. 기준음을 잡고, 거기에 정확하게 조율이 되어야만 그 악기가 제 역할을 다할 수 있습니다. 기도란 바로 이렇게 영혼의 기준음에 우리를 조율하는 행위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조율이 되어 있으면, 우리가 조금 부족한 악기라 하더라도 최고의 연주를 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상의 연주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새는 종로 낙원상가에 갈 일이 많이 없습니다만, 음악과 악기에 관심 있는 분들은 낙원상가 모르시는 분들이 안 계실 겁니다. 거기에 가면, 매장 밖에 놓인 피아노나 기타를 가지고 정말 훌륭한 연주를 하는 분들을 가끔 만날 수 있습니다. ‘, 이 악기가 이런 소리를 내는 악기구나하는 마음에 그 악기를 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집에 와서 연주하면 아까 들었던 그 소리가 안 납니다. 악기가 불량인가요? 아니죠. 연주자가 달라 제소리가 안 나는 겁니다. 훌륭한 연주자는 다소 부족한 악기를 가지고도 정확한 기준음에 조율해서, 최고의 소리를 냅니다. 반면 연주자가 변변치 않으면 아무리 비싼 악기를 손에 든다 하더라도 제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그 악기의 가치를 온전히 살려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최고의 연주자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손에 들린 저와 여러분이, 우리 인생을 통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 최고의 퍼포먼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조금 부족한 악기라도, 또 꽤 괜찮은 악기라면 괜찮은 대로 우리가 낼 수 있는 고유한 소리를 가장 잘 연주하실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있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기준음으로 삼아 그분에게 우리 영혼을 조율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기도하고, 이 믿음이 있어야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 없이 인간적인 생각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면, 교회 나오는 것만큼 지루한 일이 세상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15:7)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지금 베드로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말씀하신, 악기로 비유하자면, 최고의 악기라 할 수 있는 베드로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기준음 이탈이 일어났습니다. 조율이 틀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악기가 얼마나 훌륭한가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정확히 조율되어 있느냐,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 칭찬을 들은 훌륭한 베드로라 할지라도, 인간적인 생각이 앞서는 순간, 기준음 이탈이 일어나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제아무리 훌륭한 연주자라 하더라도 기준음이 틀어진 악기를 가지고서는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 없게 됩니다. 교회 전통의 영적 스승들이 개인의 탁월함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 비할 바 없이 중요하다고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이유입니다. 조금 부족한 악기라도 겸손히 하나님 뜻 앞에 조율되어 있으면 최고의 소리를 내지만, 자신이 꽤 괜찮은 악기라고 해서 기준음 없이 살아간다고 한다면, 그 악기로는 아무 선율도 연주할 수 없다고, 교회의 영적 스승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4.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설교의 제목을 신자의 조건이라고 했습니다. 신자의 조건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을 기준음 삼아 그분의 말씀에 우리를 조율하는 것입니다. 조율은 한 번만 하는 게 아닙니다. 좋은 연주자들은, 한 곡 연주가 끝나면 다시 조율하고 또 조율하기를 반복합니다. 조율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연주를 하는 내내 틈틈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우리 감리교회가 구원과 성화를 말하는 이유입니다.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우리 영혼의 기준음인 복음의 말씀에 우리를 조율해 나가는 삶을 끝까지 지속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제 받은 은혜가 끝이 아닙니다. 어제 안수를 받고, 어제 직분을 얻었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오늘은 오늘의 은혜로 살아가야 합니다. 날마다 은총의 새날을 열어가야 합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기준음에서 이탈하면 제아무리 베드로라 할지라도 주님의 마음에 합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반석베드로가 사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8:34-35) 우리 영혼의 기준음이 되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바 되어, 우리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는 악기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분의 손에 붙들린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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