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조회 수 57 댓글 0

부활의 자리

 

본문: 사도행전 10:34-43; 마가복음 16:1-8

설교: 홍정호 목사 (2018.4.1. 부활절, 부활주일)

 

[안식일이 지났을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가서 예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래서 이레의 첫날 새벽, 해가 막 돋은 때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돌을 무덤 어귀에서 굴려내 주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런데 눈을 들어서 보니, 그 돌덩이는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 돌은 엄청나게 컸다. 그 여자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웬 젊은 남자가 흰 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그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보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이오.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시오.” 그들은 뛰쳐 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다.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

 

1.

 

기쁜 부활절 아침에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기독교 최고의 축일인 부활절입니다. 유럽에서는 부활절 기간에 휴가를 보내고, 학교 수업도 휴강한다지요? 유럽 곳곳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크고 작은 행사들이 열립니다. 기독교가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문화로 자리매김했기에 가능한 일이겠습니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는 부활절의 의미가 성탄절보다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들뜬 연말 분위기와 소비를 자극하는 계기들이 없는 탓인지, 부활절은 신자들에게조차 그리스도교 최대의 축일로 체감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심을 선포하는, 부활과 참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믿는 이들입니다. 나의 옛 사람은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죽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날마다 거듭날 것을 소망하는 이들이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초대 교회의 놀라운 성장을 연구한 로드니 스탁이라는 종교사회학자는, 유대교 소수 종파에 불과했던 그리스도인들이 불과 3세기 만에 로마 제국을 뒤덮은 종교로 성장한 요인을 밝혔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며 철저히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기독교 윤리라는 것은 세속의 지혜, 처세술, 도덕철학과 달랐다는 겁니다. 기독교인의 윤리적 삶은, 부활의 능력을 믿는 데서 기인합니다. 지금 잠시 손해보고 실패하는 것 같아도, 아니, 누가 봐도 손해를 보고 실패한 것이 명백해도, 그것이 옳은 일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면, 결단하며 그 일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이들, 그들이 부활의 능력을 믿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겁니다. 초대 교회는 이렇듯 철저한 부활신앙의 토대에서 사랑을 실천한 공동체였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영광을 압도할 수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계몽된 세계에 사는 이들, 과학이 주는 혜택을 일상에서 누리며 하는 현대인들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했던 부활의 능력을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성서를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똑똑한 신자들은 늘어나지만, 부활의 능력을 믿으며,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숫자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계몽된 세계라는 거대한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보다 더 발전해야 하고, 남들보다 더 가져야 하고, 남들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는 진보의 신화’(myth of progress)가 우리시대를 지배하는 정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앎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믿음과 실천을 위한 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의 지혜는 다릅니다. 죽는 것이 사는 길이고, 기꺼이 지는 것이 이기는 길이고, 내 손에 쥔 것을 나누는 것이 하늘에 보화를 쌓아두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윤리는 우리시대 진보의 신화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지금 이기는 길, 지금 높아지는 길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 가신 곳에 나도 가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도 하는 것,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복음이 말하는 영광의 길입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후 안식일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 세 여인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수제자를 자처하던 남성들은 모두 도망가 버리고 세 여인만이 두려움을 안고 주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무덤에 도착한 그녀들은, 무덤을 막고 있어야 할 큰 돌이 굴려진 채 무덤이 열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가자 흰 옷을 입은 한 젊은 남자가 앉아있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께서 누워계셔야 할 그곳에, 주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빈 무덤, 이것은 강력한 부활의 상징입니다. 지금 로마와 유대의 불의한 권력은 죄 없으신 예수를 죽여 무덤에 봉인하려고 했지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는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불의한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수 없고, 죽음의 권세는 그를 무덤에 묶어둘 수 없다는 해방의 선언이 바로 빈 무덤 이야기의 핵심인 것입니다.

 

남자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시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왜 갈릴리입니까? 갈릴리가 고통의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 갈릴리는 예루살렘과 대척점에 있는 장소입니다. 갈릴리는 대도시 예루살렘의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기득권과 대비되는 주변화 된 공간입니다.

 

예수님의 활동 당시 헤롯 가문의 왕들은 갈릴리 지역에 세포리스와,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딴 티베리아스라는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이 두 도시의 건설을 위해 헤롯 왕가는 인근 지역으로부터 물자를 조달하는 방식으로 수탈을 지속했습니다. 세포리스는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이었고, 테베리아스는 예수님의 선교활동의 주 무대였던 가버나움과 갈릴리 호수를 두고 맞은편에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보다 먼저 가 계시는 갈릴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인 주역들, 로마의 식민지배자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공모 속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일상화된 고통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갈릴리로, 제자들보다 먼저 가 계신다는 것이, 오늘 부활절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작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사순절 묵상집 제작에 필자로 초청을 받아 몇 개의 묵상글을 함께 실었습니다. 그런데 내용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묵상집의 제목이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다였습니다. 교회 오는 분들 나눠드리라고 교회협의회에서 만든 묵상집인데, 제목이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다”, 이상하지 않으셨나요? 예수님을 찾아 교회에 왔는데, 교회에서 나눠주는 묵상집의 제목이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다라니요. 그런데 이 묵상집의 제목만큼 부활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제목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는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들보다 먼저, 지금 고통당하는 이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 계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려면, 우리는 부활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가 계신 그곳에 우리도 가야 합니다. 빈 무덤 앞에서 그분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 혹은 그분의 부활을 경축하는 것은 참된 부활신앙이 아닙니다. 부활의 자리로 가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시는 그 일을 우리도 함께 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참된 부활신앙입니다.

 

3.

 

사랑하는 여러분, 또 한 해의 부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오늘 우리가 가야 할 부활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모인 우리보다 앞서 주님께서 먼저 가 계신 부활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바라기는, 부활하신 주님 가신 곳에 우리도 가고, 주님 계신 곳에 우리도 거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을 모신 무덤은 이제 비었습니다. 빈 무덤 앞에서의 경배는 부활하신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몫이 아닙니다. 주님은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 시대의 갈릴리, 고통의 자리에 우리보다 먼저 가 계십니다. 그 주님과 만나, 부활의 참 기쁨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부활의 아침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다시금 기원합니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87 진리의 영이 오시면 (2018.5.20. 성령강림절) 홍목사 2018.05.20 8
786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18.5.13.) 홍목사 2018.05.13 18
785 친구 되신 예수님 (2018.5.6. 어린이주일) 홍목사 2018.05.06 16
784 머물러 있어야 할 곳 (2018.4.29. 야외예배) 홍목사 2018.05.01 17
783 주님께 맡긴 삶 (2018.4.22. 교회창립기념주일) 홍목사 2018.04.22 43
782 우리의 주님 (2018.4.15.) 홍목사 2018.04.15 37
781 부활의 증인 (2018.4.8.) 홍목사 2018.04.08 33
» 부활의 자리 (2018.4.1. 부활절) 홍목사 2018.04.01 57
779 종말의 시간 (2018.3.30. 성금요일) 홍목사 2018.04.01 35
778 나귀를 타고 오시는 분 (2018.3.25. 종려주일) 홍목사 2018.03.25 50
777 밀알 신앙 (2018.3.18.) 홍목사 2018.03.18 67
776 예수를 통하여 (2018.3.11.) 홍목사 2018.03.12 80
775 우리가 세울 성전 (2018.3.4. 삼일절기념주일) 홍목사 2018.03.04 88
774 베드로의 오판 (2018.2.25.) 홍목사 2018.02.25 104
773 진리를 사랑으로 말하기 (2018.2.18.) 이원로 2018.02.18 136
772 변화의 조건 (2018.2.11. 주현 후 마지막 주/변화주일) 홍목사 2018.02.11 95
771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 (2018.2.4.) 홍목사 2018.02.04 104
770 권력과 권위 (2018.1.28.) 홍목사 2018.01.28 103
769 우리는 나그네 (2018.1.21.) 이원로 2018.01.21 101
768 부름에 앞선 부르심 (2018.1.14.) 홍목사 2018.01.14 128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40 Next
/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