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조회 수 69 댓글 0

부활의 증인

 

본문: 사도행전 4:32-35; 요일 1:5-2:2

설교: 홍정호 목사 (2018.4.8. 부활절 제2)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부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부활의 증인이라는 제목으로 신앙공동체를 주제로 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도망쳐 버렸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복음을 전하는 자리로 돌아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유대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모여 그들을 심문하는 자리에서 담대히 말합니다. “예수는 너희들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4:11-12)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이제 예수의 이름으로예수께서 하시던 일들을 계속 해 나가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만이 아니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이들 모두 베드로와 열한 사도와 더불어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성령을 체험한 이들은 함께 지내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면서 한 몸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왔고, 사도들은 필요한 이들에게 이를 나눠주었습니다. 또한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고,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을 함으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호감을 샀습니다(2:44-46). 그들 성령으로 하나가 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우는 이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는, 참 사랑의 연합을 이루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통하여 사랑의 연합을 이룬 공동체의 소문은 사람들 사이에 날로 퍼져나갔고,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고, 사도행전의 저자는 전합니다.

 

2.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댄다는 뜻입니다. 나의 슬픔이 너의 슬픔이 되고, 나의 기쁨이 너의 기쁨이 되어,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한 몸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기대려는 이들은 어떤 이들입니까? 대체로 연약한 이들,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버거운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가난했습니다.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의 짐을 짊어짐으로 고난의 자리를 축제의 장소로 바꾸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치다 타츠루 선생의 글을 읽다가 공상성(公傷性, co-vulnerability)’이라는 개념을 배웠습니다. 공상이란 말 그대로 공무로 인한 상처, 즉 공무 중에 입은 부상이라는 뜻인데, 공상성이란, 내가 상처를 입으면 구성원 전체가 상처를 입은 것처럼 느끼는 집단 감정이랍니다. 일종의 통증의 공유입니다. 이 공상성이 조직의 통합력과 전투력을 담보한다고 합니다. 미국의 해병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해병대의 전투력이 뛰어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전선에 전우를 남겨 놓고 가지 않는다는 규칙이 조직 안에서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가 작전을 수행하다 어려움에 처하면 동료들이 반드시 나를 구해 줄 것이라는 강한 신념, 그것이 병사들을 적진 깊숙이 들어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는 설명입니다. (우치다 타츠루, 곤란한 성숙, 김경원 옮김, 105-119)

 

타츠루 선생은 오늘날 기업들이 이 공상성을 규칙으로 삼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직장인들은 그들의 직장 안에서도 직장 바깥에서와 똑같이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고 있고,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직장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동료들에 대한 신뢰라는 것을 도무지 갖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런 직장이라는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하면 동료에게 버림을 당할 뿐 해병대와 같은 전우애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 오늘날 직장 공동체의 비극이라는 겁니다. 요새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 퇴준생’(퇴사준비생)이라는 낱말이 자주 입에 오르내립니다. 오랫동안 취업준비에 매진해서 어렵사리 들어간 직장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를 준비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답니다. 왜 그럴까요? 단지 월급이 적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공상성없는 조직, 조직을 위해 일평생 헌신적으로 일해도 결국 또 다른 무한경쟁에 내몰려야 하는 삶에 대한 피로감 때문에 젊고 유능한 직장인들이 퇴준생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오늘 사도행전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는 놀랍기만 합니다.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그야말로 공상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주의 일에 힘쓰다 상처를 입어도, 낙심하고 지쳐도, 실패해도, 나와 한 몸을 이룬 교회가 나를 지지해주고 버팀목이 되어준다, 이런 믿음만큼 큰 위로와 힘이 되는 일이 또 있을까요? 농경사회의 대가족에서 산업화시대의 핵가족으로, 그리고 이제는 1인 가구가 다수인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혈연을 매개로 한 가족의 의미는 점차 퇴색합니다. 이제는 사회적 가족이 더 중요한 시대입니다. 여러분, 부모님, 혹은 동기간 일 년에 몇 번이나 만나시나요? 같이 살지 않으면서 일 년에 52회 이상 만나시는 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만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데 옆에 계신 분 한 번 보십시오. 어제도, 엊그제도 만난 분들입니다. 누가 가족입니까? 누가 내 어머니이고 형제들입니까? “보아라, 내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3:33-34)

 

3.

 

사도행전이 전하는 초대교회의 나눔과 공유는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도덕적 정당성과 당위성을 앞세워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제한다고 될 일이 아니고, 설사 그렇게 된다한들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이렇게 기적 같은 일을 이뤄냈고, 지금도 이뤄내고 있을까요? 교회는 부활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이들이, 부활의 능력 안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사도행전 속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 나가야 할 기적입니다.

 

20세기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핑켄발데(Finkenwalde) 신학교 기숙사인 형제의 집’(Bruderhaus)에서 생활을 신도의 공동생활(Gemeinsames Leben)(1939)이라는 책으로 펴냈습니다. 여기에서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귀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귀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성만찬을 통해 연합하는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신앙공동체의 완성된 모델로 제시합니다.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정지련손규태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5, 125-126) 신앙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다른 사람에게 나가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영원히 하나가 되는 성례전적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례전적 공동체라는 것, 이것이 교회가 다른 세속의 결사체 혹은 친목단체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입니다.

 

본회퍼는 성만찬을 받는 날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가장 기쁜 날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고, 형제들과 화해하면서,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습니다. 그 살과 피 안에서 신자인 우리는 용서와 새 생명과 복을 받습니다.(본회퍼, 앞의 책, 125)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 그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 우리도 하나가 되어,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사랑과 섬김의 삶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만찬은 애찬이나 공동식사와 다릅니다. 성만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부활의 증인으로 살겠다는 다짐이기 때문입니다. 교리적으로 세례 받지 않은 이들의 성만찬 참여를 허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 논쟁이 있습니다. 일본 기독교회는 이 개방형 성찬 인정여부를 두고 보수와 진보 그룹으로 나뉘어 있는 형편입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세례 받지 않아도 예수 믿기로 결심한 이들의 성만찬 허용을 인정하는 개방형 성만찬을 시행해 왔으나, 얼마 전에 이를 철폐했습니다. 좋게 생각하면, 성찬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성례에 참여함으로 성찬의 본래 목적을 상실할 우려에 따른 조치라고 생각됩니다.

 

세례는 거듭남의 의례이고, 성만찬은 거듭난 삶의 지속, 즉 성화와 완전을 향한 의례입니다. 성찬은 공동체의 사랑과 섬김을 지향합니다. 성찬을 통해 하나 되는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이루어지는 사랑과 나눔을 지향합니다. 이 그리스도 중심성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교회의 의례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성만찬은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시간입니다. 세례를 통해 거듭난 이들이,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부활의 증인된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시간이 성찬의 시간입니다. 이렇게 성례전적으로 연합한 공동체, 주님의 살과 피를 함께 모심으로 하나가 된 이들은 신앙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형제자매라고 해서 다 친하지는 않습니다. 형제 중에도 모난 형제들이 있고, 더 친밀함을 느끼는 이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 형제요 자매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운 형제 고운 형제는 있을지 모르지만, 형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 그것이 성만찬을 통해 하나 된 신앙공동체의 형제애입니다. 형제의 영광은 나의 영광이요, 형제의 수치는 나의 수치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의 형제애, 자매애입니다. 저는 우리 개신교가 가톨릭교회로부터 배웠으면 하는 것 중 하나가 이 형제애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성폭행으로 문제가 된 사제의 잘못을 모든 사제들이 한 목소리로 사죄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한 사제의 잘못을 비난하고 선을 긋는 데 그치지 않고, 저 형제의 잘못이 곧 우리 모든 사제들의 잘못이라고 회개하는 모습이, 피해자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랐고, 또 한편으로는 진정성 있는 회개가 이루어지는 출발이 되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4.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 그것은 부활의 증인이 된 이들의 공동체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며, 한 몸을 이루어가는 이들이 주님의 교회입니다. 초대교회의 기적과 같은 이야기는 이렇게 부활의 증인이 된 이들이 한 몸을 이루어 갔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교회를 통해 주님의 한 몸을 이루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십자가 달려 돌아가심으로 막힌 담을 허무신 주님,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입니까? 우리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한 마음으로 믿고 따르는 이들이 부활의 공동체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십시오.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십시오. 혼자가 아닙니다. 주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된 이들이 여러분과 한길을 걷고 있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부활하신 주님께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우리에게 날마다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한 주간도 우리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93 경계를 넘어 (2018.7.1.) 홍목사 2018.07.01 67
792 풍랑이 일 때 (2018.6.24.) 홍목사 2018.06.24 57
791 복음의 일꾼 (2018.6.17.) 홍목사 2018.06.17 44
790 성령의 능력 (2018.6.10.) 홍목사 2018.06.10 46
789 살리는 믿음 (2018.6.3.) 홍목사 2018.06.04 64
788 성령으로 난 사람 (2018.5.27. 웨슬리회심기념주일) 홍목사 2018.05.27 70
787 진리의 영이 오시면 (2018.5.20. 성령강림절) 홍목사 2018.05.20 66
786 시냇가에 심은 나무 (2018.5.13.) 홍목사 2018.05.13 67
785 친구 되신 예수님 (2018.5.6. 어린이주일) 홍목사 2018.05.06 58
784 머물러 있어야 할 곳 (2018.4.29. 야외예배) 홍목사 2018.05.01 54
783 주님께 맡긴 삶 (2018.4.22. 교회창립기념주일) 홍목사 2018.04.22 85
782 우리의 주님 (2018.4.15.) 홍목사 2018.04.15 71
» 부활의 증인 (2018.4.8.) 홍목사 2018.04.08 69
780 부활의 자리 (2018.4.1. 부활절) 홍목사 2018.04.01 86
779 종말의 시간 (2018.3.30. 성금요일) 홍목사 2018.04.01 63
778 나귀를 타고 오시는 분 (2018.3.25. 종려주일) 홍목사 2018.03.25 78
777 밀알 신앙 (2018.3.18.) 홍목사 2018.03.18 98
776 예수를 통하여 (2018.3.11.) 홍목사 2018.03.12 110
775 우리가 세울 성전 (2018.3.4. 삼일절기념주일) 홍목사 2018.03.04 116
774 베드로의 오판 (2018.2.25.) 홍목사 2018.02.25 134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41 Next
/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