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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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눈 뜬 사람으로

 

본문: 욥기 42:1-6; 마가복음 10:46-52

설교: 홍정호 목사 (2021.10.24. 성령강림 후 제22)

 

[그들은 여리고로 갔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 가에 앉아 있다가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외치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눈먼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말하였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그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로 왔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그 눈먼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시월도 이제 다음 주 한 주를 남겨놓고 있습니다. 코로나 백신접종완료자 수가 늘어나면서, 이제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들도 조금씩 모임을 재개하면서 경건 생활의 일상회복을 위한 기지개를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다가오는 추수감사주일 무렵부터는 백신접종을 완료하신 분들 중심으로 현장예배 참여를 단계적으로 늘려가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바라기는 내년 4월 교회창립 40주년을 기점으로는 우리 어린아이들을 포함해서 모든 교인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여 예배드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의 말씀은, 마가복음 10장의 눈먼 바디매오가 고침을 받은 이야기입니다.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전하기에 앞서, 마가는 앞선 이야기들에서 눈을 뜨고도 진리를 외면하는 제자들을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자기들끼리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를 두고 다투고,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어린아이 같은 약자들을 외면하고, 훗날 영광을 받으실 때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는 청탁이나 하는 제자들을 모습을 보여주면서, 마가는 멀쩡히 눈을 뜨고 살지만, 진리를 향해서는 눈을 감은 제자들을 모습을 복음서의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제자들 앞에서도 예수님은 낙심하시거나 그들을 가르치시기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복음의 진리를 계속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시면서,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섬기는 사람, ‘디아코노스는 그림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없는 듯 존재하면서 다른 사람을 빛내는 존재가 디아코노스’, 즉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위대하게 되고 싶거든, 이런 디아코노스가 되라고 제자들에게 일러주셨습니다. 또한 으뜸이 되고 싶으면, ‘디아코노스보다도 더 낮은 존재인 둘로스’, 즉 종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아무 힘도 없고, 아무런 자기 주장도 펼칠 수 없을뿐더러, 언제든 주인의 변덕에 의해 희생양이 될 수도 있는 존재인 둘로스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정말로 으뜸이 되고 싶다면, 섬기는 존재보다 더 낮은 종이 되어야 한다니, 논리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설이야말로 복음의 제자로 살기로 다짐하는 우리 신자들이 늘 새겨야 할 말씀이겠습니다.

 

어느 때나 세상의 정치인들은 누가 더 크냐를 두고 다퉜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모함하기도 하면서 자신이 더 높고 으뜸이 되는 사람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곤 했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우리도 그런 모습들을 일상에서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이런 세상 가운데에서도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다짐을 해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사는 게 예외 없는 보통 사람의 모습입니다만, 말씀을 잊고 있다가도 기억하고 돌아오고, 또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우리가 있어야 할 복음의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복음의 자리란 섬기는 사람의 자리입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신자로 산다는 것은, 이 예수님의 말씀이 머무는 자리에 나도 머물기를 바라며 사는 것입니다.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끊임없이 주님 닮기를 소망하며 사는 삶이 신자의 삶입니다. 누가 이런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요? 누가 그러라고 한다고 이게 될 일인가요? 신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신자로 사는 삶이 더 큰 은혜라고 교회가 말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로 큰 사람, 참으로 으뜸이 되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가장 낮은 사람이 되어 섬기는 사람입니다. 섬기는 사람 디아코노스’, 다른 사람의 종 둘로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계십니다. 주님의 시선은, 세상 사람들이 올려다보는 그 자리에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자리에,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이들의 낮은 자리에 머물러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본 마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2.

 

오늘 본문에는 앞선 제자들의 모습과 대조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입니다.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끝으로 마가복음은, 새로운 장으로 진입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다시피, 마가복음은 세례 요한의 출현에서부터(1:2-8) 빈 무덤 이야기까지(16:1-8) 예수님의 공생애 초점을 맞춘 복음서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수태나 탄생, 성장 이야기 등이 마가복음에는 없습니다. 마가복음의 전반부라 할 수 있는 1장에서 9장까지는 주로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에 대해 증언합니다. 그리고 후반부인 11장에서 16장까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그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나오는 10장은, 전반부와 후반부의 이야기를 연결하는 장입니다. ‘전반부의 결론이자, 후반부의 서막으로 읽을 수 있는 장입니다. 편집상 이런 구조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 10장의 말미에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의 의도는 명확합니다. 누가 정말로 눈뜬 사람이고, 누가 정말로 눈먼 사람인지를 복음서의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곁에서 모시면서도 멀쩡히 눈뜬 제자들은 진리의 말씀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곳을 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가 아닌 엉뚱한 데 그들의 시선이 닿아 있습니다. 눈을 뜨고 살지만, 눈이 먼 사람이나 다름없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10장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바디매오는 눈먼 거지입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이며, 그러다 보니 길가에 앉아 타인의 자비를 구하며 살아야 하는 낮은 자리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거지입니다. 이 바디매오라는 이는, 섬기는 사람, 종보다도 더 낮은 사람입니다. 디아코노스나 둘로스는 어디 머물 곳이라도 있지만, 눈먼 거지 바디매오는, 거두는 이 하나 없이 그저 길가에서 타인의 자비의 손길에 의지해서 살아가야만 하는 눈먼 거지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복음서는 이 사람의 이름을 특정합니다.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마가가 그 이름을 전하는 사람은 바디매오가 유일합니다. 그만큼 이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 온 바디매오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은 질문 아닌가요? 앞서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하신 질문과 같은 질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요청드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질문이 바로 오늘 바디매오에게 하신 이 질문과 같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마가는, 예수님의 같은 질문 앞에서 완전히 다른 대답을 하는 제자들과 바디매오를 의도적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멀쩡히 눈뜬 제자들은, 빛이신 예수님 곁에서 눈을 감아버린 이들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곳을 그들이 함께 바라본다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그들에게 임하겠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눈을 떴지만, 눈을 감은 사람에 다름 아닙니다. 반면에, 바디매오는,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구합니다. 주님을 만나 눈뜬 사람이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눈뜬 사람이 되기를 바디매오의 이 요청에 대하여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셨습니다. 바디매오는 눈을 떴고, 눈뜬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게 너무 박한 말이 되겠습니다만, 이제 예수님에게도 눈뜬 제자가 한 명 생겼습니다. 눈먼 거지 바디매오가 눈뜬 제자가 되어,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은 이 10장을 끝으로 후반부의 이야기로 새로운 장이 전개됩니다.

 

3.

 

성경에서 본다는 것은 여러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그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 영적인 눈을 뜨는 것을 의미합니다. 매일 경험하던 일상을 복음의 눈으로 보게 되는 체험, 이것이 영적으로 눈을 뜨는 체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울이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러 주님을 만나 잠시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9:4) 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사울은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면서 다시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눈을 뜬 사울은, 일어나 세례를 받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사울이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 바울이 된 이야기입니다.

 

사울도 멀쩡히 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향해서는 눈먼 사람이었습니다. 다소 출신의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그였지만, 사울은 정작 바라보아야 할 분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분을 따르는 이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이전에 밝았던 눈은 멀고,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새로워진 것입니다. 이런 경험 때문이었을까요. 훗날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지식이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알아주십니다.“(고전 8:1b-3)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율법에 누구보다 해박했던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 이제 율법의 한계를 넘어선 이방인의 사도, 바울로 거듭났습니다. 이전에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가졌던 자부심을 내려놓게 되자 비로소 진리에 눈뜬 바울로 거듭난 것입니다. 사실 사울은 히브리식 표기이고, 바울은 헬라식 표기일 뿐 둘은 같은 이름입니다. 그럼에도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은, 영적으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사람의 표상입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말하자면, 사울은 예수님 곁에서 눈을 감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고, 바울은 눈먼 바디매오가 눈뜬 제자가 된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4.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신지 얼마나 지나셨나요? 몇 세대에 걸쳐 기독교 신앙을 이어받아 모태신앙인 분들도 계시고, 성장기에 신자가 된 분들도 계시고, 성인이 되어 신자가 된 분들도 계실 겁니다. 기독교의 언어와 문화에 익숙한 기간은 신자로 살아온 시간만큼 다르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향해 눈 뜬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언제 신자가 되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태어난 순서는 있어도, 하나님 앞에 가는 순서는 정해진 것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언제 신자가 되었는지와 별개로 복음에 눈 뜬 사람으로 살아가는 시간은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 눈뜬 사람으로 살기를 마음 깊이 간구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그때가 우리가 복음에 눈뜬 사람이 되는 시간이겠습니다.

 

바라기는 우리도 바디매오처럼 복음에 눈 뜬 사람이 되어,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서는 사람들로 세워지길 기도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이 자리에 계십니까?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으면서도 눈먼 사람에 다름없던 제자들의 모습인가요, 아니면 눈먼 바디매오처럼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주님의 은총과 자비를 구하는 겸손하고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계신가요? 주님의 시선이 머무는 자리에 우리의 눈길도 머물고, 주님의 손길이 닿는 곳에 우리의 손길도 닿길 바랍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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