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

 

본문: 예레미야 33:14-16; 누가복음 21:34-36

설교: 홍정호 목사 (2021.11.28. 대림절 제1)

 

[“너희는 스스로 조심해서, 방탕과 술취함과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너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게 하고, 또한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게 하여라. 그 날은 온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닥칠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또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한 해의 교회력을 마감하고, 2022년의 새로운 신앙 여정을 시작하는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 기다림 초의 불 하나를 밝히면서 주일을 맞이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어둠을 밝혀 주시길 기원하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이 어둠을 밝히는 작은 촛불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을 맞습니다.

 

교회력에 따른 순례는 절기를 지나며 완성됩니다. 오늘 대림절을 시작으로,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그리고 성령강림절을 지나 마지막 주일인 왕국주일에 이르는 전 과정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삶의 부족함 없는 이정표입니다. 절기마다 교회력에 담긴 의미를 잘 묵상하고, 교회력의 안내를 따라 한 해를 잘 지나다 보면, 어느덧 우리의 생활이 그리스도를 닮은 삶에 가까워지며, 오랜 시간 교회가 다듬어 온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를 조화롭게 체화하며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교회력에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실천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교회가 오랜 시간 다듬어 온 그리스도교 복음의 조화와 균형이 교회력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조화와 균형이야말로 교회력을 따른 신앙순례가 지닌 장점이며, 이 극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든 신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 믿습니다. 특별히 교회력에 따른 신앙순례는 그리스도교의 특정한 역사적 관점에 함몰되지 않는 전체적이고 균형을 갖춘 시각을 갖게 해 줍니다. 예컨대 예수님을 인간적인 스승으로만 보는 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견해라든지, 그와는 반대로 예수님의 인성을 무시하고 신격화하는 영지주의와 근본주의 신학의 양극단을 포괄하는 신앙의 조화와 균형이, 교회력을 따르는 가운데 우리의 삶과 신앙의 태도로 자리잡게 됩니다.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참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성육신하시어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임하셨습니다. 광야의 시험을 이기시고 공생애를 통해 섬김과 사랑의 본을 보이시며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율법의 의로 구원받을 수 없는 모든 인류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공중권세 잡은 악한 마귀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어 날마다 동행케 하시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마지막 심판 날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력에 담긴 그리스도교 교리와 신학의 요체입니다. 교회력은 이 모든 교리와 신앙고백을 조화와 균형 속에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 모든 신자들을 안내합니다.

 

교회력은 집밥 같습니다. 집밥만 제때 잘 챙겨 먹어도 건강히 잘 자랍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건강히 살아갈 수 있는 기초 체력과 좋은 식사습관이 생깁니다. 자녀를 제일 사랑하고 아끼는 분이 부모님이기 때문에 집밥에는 엄마의 경험과 지혜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건강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이 조화와 균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밖에서 몸에 좋다는 거 따로 챙겨 먹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밖에서 아무 음식이나 막 먹지 않고, 집에서 사랑을 담아 차려주시는 소박한 한 끼가 더 건강하고 풍성한 삶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런데 집밥은 별다를 게 없습니다. 집밥 반찬이 매번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교회력도 3년마다 반복되고, 그다지 새로울 게 없어 보입니다. 아는 말씀을 또 듣게 되지만, 이 의례(리츄얼)의 반복이야말로, 교회력에 담긴 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새롭게 신앙순례를 시작하는 첫 주일이기에 교회력에 대해 길게 말씀을 드렸습니다대림절로 한 해를 시작합니다. 매 주일 '복음의 집밥을 여러분 삶과 신앙의 양분으로 삼아 영육간 건강하고 풍성한 삶에 이르게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올해는 요한복음 16장의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파송의 말씀으로 정했습니다. “너희가 근심에 싸여도,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중략) 지금 너희가 근심에 싸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볼 때에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며, 그 기쁨을 너희에게서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중략) 구하여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16:20-24) 세상 일에서나 영적인 일에서나 도전과 어려움이 있지만,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그리고 올 한 해 신앙 순례를 떠나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교회력 첫날 우리가 만나는 복음은 종말을 주제로 한 말씀입니다. 알파요 오메가가 되시고, 처음과 끝이 하나이신 하나님 신앙을 되새기고자 하는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는 것을 보고 때를 알라고 하셨습니다.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압니다. 인자의 오심도 그러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무화과나무에서 잎이 돋는 것을 보고하셨는데, 복음서에서 본다는 건 깨닫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말에도 본다는 낱말이 갖는 의미는 중의적입니다. ‘본다는 것은 시각적인 응시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사태를 이해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통찰력을 갖췄다는 뜻이기도 하고, 장차 일어날 일을 예견하는 안목을 갖췄다는 뜻도 담겨 있고, 그리고 어떤 일의 결과를 기다리며 판단을 유보하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는 것을 보고 때를 알라는 비유의 말씀은, 삶의 때를 식별하는 안목과 지혜를 갖추고, 그때가 언제일지 늘 관심을 기울이며, 종말을 준비하며 살아가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항상 마지막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해서, 방탕과 술취함과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너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게 하고, 또한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게 하여라.”(21:34) 하셨습니다. 세상살이는 모두에게 녹록치 않습니다. 그렇다 해도 자기에게 해악을 끼치면서 근심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잠깐의 동정은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자기와 타인,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합니다.

 

주님은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너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게 하라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아마도 세상살이의 걱정이 마음을 짓누른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도 아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왜 모르셨겠습니까? 갈릴리 출신의 가난한 목수이셨던 예수님께는 세상살이의 걱정이 마음을 짓누를 수 있을 만큼 무거운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을 겁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그런 데 마음이 짓눌리지 않게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살이가 녹록치 않은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걱정에 짓눌리지 말고, 오히려 이런 일들을 능히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꼭 붙잡고, 그대로 실천하면 됩니다.

 

3.

 

앎을 추구하는 삶은, 무지의 어둠으로부터 빛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계몽을 뜻하는 영어가 ‘enlightenment’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전에는 몰라서 캄캄했는데, 알면서 환해진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배움을 통해 일종의 깨어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배움은 깨어 있는 삶의 조건입니다. 그렇기에 무엇이든 배우지 않으면, 환해지는 체험, 깨어 있는 삶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배움을 통해 빛을 받아들일 때 어두운 것이 밝아지고,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면서 지적인 해방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하게 덧붙여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갑자기 기도라니, 배움과 기도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요? 상관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단지 깨어 있는삶으로는 부족하다는 깨달음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왜냐하면 단지 깨어 있는삶에는 방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되, 어떤 방향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문제가 여기에는 빠져 있습니다. 배워서 뭘 합니까? 알아서 뭘 합니까? 배워서 나쁜 일을 더 잘 하고, 알아서 정죄하는 걸 더 잘 한다면 그 배움과 앎이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20세기의 서양 지성인들이 그들의 근대 계몽주의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한계에 봉착한 이유입니다.

 

계몽을 경험한 서양의 지성인들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이렇게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깨어 있는’enlightened 우리가 어떻게 이런 세계대전을 벌이면서 집단적인 광기에 휩싸일 수 있지? 왜 아무도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지? 다들 제정신이긴 한 건가?’, 그들은 스스로 돌아보며 계몽의 한계를 성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도르노와 호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은 이런 문제의식을 담은 대표적인 저술이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깨어 있다는 사람들이 정말로 깨어 있는 게 아니고, 오히려 무지한 상태에 있다는 자각은, 20세기 서양 지성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습니다. 신학에서는 칼 바르트 같은 인물이 이런 성찰을 대변합니다. 근대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의 이성과 자유에 대한 긍정에 토대를 둔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거듭나지 않은 인간의 이성이란, 결국 인간이 지닌 한계를 합리화하고 변명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반성입니다.

 

이러한 계몽의 한계에 대한 성찰,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지난 세기의 반성적 성찰을 바탕으로 저는 오늘 예수님의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하시는 이 말씀을 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기도하지 않으면, 이 깨어 있다는 자의식이 오히려 재앙이 될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듭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자신이 깬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 말도 안 듣고 끝까지, 그야말로 주체적으로계속 그 길로 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저는, 주체적인 삶,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되, 그게 다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 방향이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자가 되는 순간, 복음의 말씀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됩니다. 기도는 이 이정표대로 내가 지금 잘 가고 있는지, 혹 딴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닌지 우리의 방향을 큰 틀에서 점검하는 일입니다. 방향이 맞는다면야, 어느 길을 택해 가든 자유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방향이 틀리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방향이 틀려버리면, 길을 선택할 자유는 이미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는 것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기도하면서, 이 길이 복음에 합당한 길인지를 늘 살피며, 올바른 방향으로, 생명을 살리고 열매 맺는 방향으로 가는지 묻는 일입니다. 또 이렇게 기도해야만 깨어 있는 삶을 지속할 힘과 용기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은 온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닥칠 것이다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예외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어떤 사람은 고난 앞에서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고난을 통해 더 단단해집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하십니까? 믿음입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지금 잠시 잘못된 것처럼 보이지만, 방향이 틀리지만 않는다면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이 갖는 용기와 믿음입니다.

 

4.

 

기도하는 사람은 용기와 믿음을 갖습니다. 어떤 용기와 믿음인가요? 한 걸음 떨어져 비판하는 대신, 한 걸음 다가가 품고 사랑하는 용기와 믿음입니다. 여러분, 삭개오를 생각해 보십시오.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 삭개오는 얼마나 나쁜 사람입니까? 로마에 바짝 붙어서 동족의 고혈을 짜내 갖다 바치면서, 자기는 먹을 거 입을 거 다 누리면서 호의호식하는 나쁜 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남들이 다 손가락질하는 삭개오를 한 걸음 떨어져 비판하시는 대신 오히려 그에게 한걸음 다가가셨습니다. 그와 함께 손가락질을 받는 것을 괘념치 않으시며, 그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 하시고, 삭개오의 회심을 이끌어내셨습니다. 복음서에는 놀라운 장면이 참 많은데, 저는 이 장면이야말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명장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우리 편이라면 잘못해도 잘 했다고 하고, 저편이라면 잘했어도 잘못했다고 하는 게 세상살이의 기술이라면 기술일 텐데, 예수님은 어떻게 당신의 친구인 가난한 사람들이 다 미워하는 저 삭개오 집에 가셔서 그와 함께 교제를 나누실 수 있었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삭개오 집에서 나오시는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앞으로는 가난한 사람의 친구인 양 행세하더니, 뒤로는 결국 부자의 편에 서는 사람이었군,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의혹이 있든 없든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한 영혼의 구원에만 집중하셨습니다.

 

저는 이 예수님의 마음을, 그분의 용기와 믿음을 본받고 싶습니다. 저도 주님처럼 그렇게 사람들을 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깨어 있는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깨어 있으면, 오히려 타인을 정죄하기 더 쉬운 상태가 됩니다. 삭개오가 왜 나쁜 사람이고, 왜 삭개오 같은 사람을 멀리해야 하고, 왜 삭개오는 구원받을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결국 단죄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19:8-9) 하는 삭개오의 회개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19:9) 하신 예수님의 선언은 일어날 기회조자 얻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신 예수님의 용기와 믿음이 이런 변화의 사건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5.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은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하셨습니다. 세상살이의 어려움에 마음이 짓눌리지 않고,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생명의 길을 따르는 용기와 믿음은 기도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염려의 고리, 의심이 고리를 단호히 끊어내십시오. 염려하는 대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올 한 해 우리는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붙잡고, 신앙의 순례에 나섭니다. 여러분을 자꾸만 넘어뜨리고, 믿음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근심이 있습니까? 그 근심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여러분은 자주 넘어지고 마음이 짓눌리는 고통을 당하십니까? 그 근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그 근심 앞에서 걱정으로 마음이 짓눌리는 괴로움을 당하지 마시고, 그 근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약속대로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며, 여러분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올 한 해 우리는 이 믿음의 결단을 담아 파송의 말씀을 나눌 것입니다.

 

희망의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올 한 해 신앙의 순례를 마치는 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우리의 그 근심을 기쁨의 찬송으로 바꾸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985 오늘 이루어지는 복음 (2022.1.23. 주현 후 제3주) 홍목사 2022.01.23 12
984 생명의 샘이 주님께 있습니다. (2022.1.16. 주현 후 제2주) 홍목사 2022.01.16 18
983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2022.1.9. 주현 후 제1주) 홍목사 2022.01.09 15
982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2022.1.2. 성탄 후 제2주, 신년주일) 홍목사 2022.01.02 36
981 처음이며 마지막이신 주님 (2021.12.31. 송구영신예배) 홍목사 2022.01.01 6
980 참 빛 예수님 (2021.12.26. 성탄 후 제1주, 송년주일) 홍목사 2021.12.26 18
979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2021.12.19. 대림절 제4주) 홍목사 2021.12.19 25
978 대림절에 세례 요한을 기리며 (2021.12.12. 대림절 제3주) 이계준 2021.12.12 32
977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 (2021.12.5. 대림절 제2주) 홍목사 2021.12.06 41
»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 (2021.11.28. 대림절 제1주) 홍목사 2021.11.28 51
975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2021.11.21.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 왕국주일) 홍목사 2021.11.21 24
974 견고한 삶의 기초 (2021.11.14. 성령강림 후 제25주) 홍목사 2021.11.14 45
973 마음을 다 바쳐 (2021.11.7. 추수감사주일) 홍목사 2021.11.07 86
972 살아온 은혜, 살아갈 은혜 (림학춘 목사님 설교, 2021.10.31. 종교개혁주일) 신반포 2021.10.31 27
971 복음에 눈 뜬 사람으로 (2021.10.24. 성령강림 후 제22주) 홍목사 2021.10.24 49
970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2021.10.17. 성령강림 후 제21주) 홍목사 2021.10.17 43
969 한 가지 부족한 것 (2021.10.10. 성령강림 후 제20주) 홍목사 2021.10.10 37
968 하나님 나라의 주인 (2021.10.3. 성령강림 후 제19주, 세계성찬주일) 홍목사 2021.10.03 30
967 품이 넓은 사람 (2021.9.26. 성령강림 후 제18주) 홍목사 2021.09.26 55
966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2021.9.19. 성령강림 후 제17주) 홍목사 2021.09.19 30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50 Next
/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