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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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광야에서

 

본문: 신명기 26:1-11; 누가복음 4:1-13

설교: 홍정호 목사 (2022.3.6. 사순절 제1)

 

[예수께서 성령으로 가득하여 요단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그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그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그 기간이 다하였을 때에는 시장하셨다. 악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하였다.” 그랬더니 악마는 예수를 높은 데로 이끌고 가서, 순식간에 세계 모든 나라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서 악마는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이것은 나에게 넘어온 것이니,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준다. 그러므로 네가 내 앞에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하였다.” 그래서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해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다.’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하였다.” 악마는 모든 시험을 끝마치고 물러가서, 어느 때가 되기까지 예수에게서 떠나 있었다.]

 

1.

 

사순절 첫 번째 주일 아침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주님께서 당하신 십자가 수난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 실천함으로써 주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를 소망하는 절기입니다. 부활절은 춘분이 지난 만월 직후 일요일로 정한다는 니케아 공의회의 전통에 매년 날짜가 다르며, 올해는 417일이 부활절이 됩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에 이르기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 동안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 기간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시며 마귀와 싸워 이기신 것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잡아 기도에 힘쓰는 때입니다. 특별히 올해 사순절은 매일아침 교우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듣고 묵상함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기쁘고 감사합니다. 수고해 주시는 우리 봉사자들 덕분입니다.

 

우리교회 매일묵상은 교회력에 따라 매일 정해진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전부입니다. 사실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기도입니다. 말씀을 경청하는 기도에 관한 테레사 수녀님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님이 미국을 방문해서 한 방송에 출현하셨는데, 진행자가 물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무슨 말씀을 하시나요?” 그랬더니 수녀님은, “저는 듣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상 밖 대답에 당황한 진행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수녀님이 듣고 계실 때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나요?” 그랬더니 잠깐의 침묵 끝에 수녀님이 다시 대답했습니다. “그분도 듣고 계십니다.” 기도를 바치는 이와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사랑 안에서 서로에게 귀를 기울여 듣는 시간, 그 순간이 최고의 기도 시간입니다.

 

경청하는 기도에 관한 유명한 일화입니다만, 테레사 수녀님의 이 일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힘써 귀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분께 바칠 수 있는 최고의 기도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그분이 들으시는 기도는 우리의 유창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삼상 16:7)이시며, 그분은 우리의 찢겨지고 짓밟힌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시는 분(51:17b)이십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우리의 찢겨진 마음을 보듬어 안으시는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올해 사순절에는 말씀이 들리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셔서, 말씀으로 새로워지고, 기도로 거듭나는 새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죽은 문자로 새겨져 있던 성경의 글자들이, 살아있는 영의 말씀이 되어 우리의 심령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합니다.

 

2.

 

교회는 전통적으로 사순절 기간 동안 세 가지 실천을 강조해 왔습니다. 기도와 금식과 자선입니다. 매일 시간을 정해 기도하고, 주중 끼니를 정해 금식하고, 금식과 절제를 통해 모은 물질로 연약한 이들을 돌보는 일에 힘씁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본질을 기억하고 되새기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본질은, ‘타자를 위한 존재’(본회퍼)이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고, 우리도 그분처럼 타자를 위한 존재로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신학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에 대한 숙고와 성찰의 결과물들입니다. 그런데 인간 본성에 대한 신학적 성찰의 결론은 여러분들께서 잘 아시다시피 밝지 않습니다. 4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16세기의 마르틴 루터와 20세기의 칼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인간 존재가 지니고 있는 자기중심성의 문제, 즉 죄의 문제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자 연결이 끊어져 버린 단절의 근본 원인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로 인해 막힌 담을 허무시는 분,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구원자시라는 것이 우리 모든 갈라진 그리스도교인들의 일치된 신앙 고백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바르트와 같은 한 시대를 대표한다 할 수 있는 신학자들은, 인간이 그리스도를 닮은 타자를 위한 존재로 거듭나기에 앞서 자기에게로 구부러지는 존재’homo Incurvatus in Se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인간이 지닌 자기중심성에 대한 고찰은 오랜 신학적 숙고의 결과이지만, 대중들에게 더욱 친숙한 것은 심리학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인지심리학자들 말하는, 가까이 하지 말고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지내는 것이 좋다고 조언하는 성격적 특징을 지닌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공감능력이 결여된 소시오패스’, 모든 일과 관계에서 자기가 중심이 되는 나르시시스트’, 그리고 타인을 자기 뜻대로 조정하고 길들이려고 하는 마키아벨리스트의 성격적 특징을 지닌 이들입니다. 심리학자들, 특별히 인간 본성에 관한 과학적 데이터 분석에 의존하는 인지심리학자들에게 이들 소시오패스, 나르시시스트, 마키아벨리스트의 성격적 결함을 지닌 이들은, 좀처럼 수정되기 어려운, 그래서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지내는 것이 좋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신학적 성찰의 결과들인 자기에게로 구부러지는 인간존재의 본성, 즉 타자이신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못하고 모든 일을 내가 중심이 되어 처리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원적인 죄성에 대한 신학적 성찰의 연장선에 있는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인간존재의 어두운 면에 대한 비슷한 결론에 이른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교의 해법은 그들과 거리를 두는 방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비록 소시오패스나 나르시시스트나 마키아벨리스트처럼 험악한 용어들로 규정될 만한 어떠한 결함을 지닌 존재라 할지라도, 그리스도교의 방식은 그들이 사랑으로 변화될 수 있는 존재임을 긍정하고, 어려움 앞에서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담대함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다”(5:41) 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2:17) 말씀도 하셨습니다. 피하고 싶고 멀리하고 싶은 이들이지만, 주님의 마음을 닮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어려운 일이 많더라도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습니다. 비록 내 안에 사랑 없으나, 온전한 참사랑이신 하나님 사랑을 의지하면서, 그 사랑 내 맘에 부어주시기를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이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이러한 예수님 사랑의 힘을 의지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지지만, 사랑은 없어지지 않는다”(고전 13:8)고 말씀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전 13:7) 말씀했습니다. 모두가 멀리하고픈 그들은 어쩌면 누군가로부터 허물을 용서받는 경험, 잘못을 사랑으로 덮어주는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 사랑이라 했는데, 다른 누군가로부터 이처럼 지속적인 믿음을 받지 못하고, 희망의 대상이 되지도 못했으며, 인내의 대상이 된 경험도 많이 부족했기에 깨진 그릇처럼 상처 난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기에 공감력을 잃어버리고, 모든 일에 자기를 앞세우고, 타인을 제뜻대로 조정하고자 하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거리두기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했던 그 사랑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처럼 어렵더라도 붙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듯 사순절은 어떠한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며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분, 사랑이신 하나님과 마침내 하나이신 주님의 길을 우리로 길로 삼기로 결단하는 절기입니다. 교회와 신자들이 사순절을 보내며 기도와 금식과 자선에 힘쓰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결단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되새기기 위함인 것입니다.

 

3.

 

사순절 40일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와 싸워 승리하신 40일의 기간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담은 복음을 전하면서, 성령의 능력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누가가 전하는 거룩한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가 되실 때에 성령이 임하시어”(1:35)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 위에 내려오셨다”(3:22) 전합니다. 비록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으나, 그분이 요한의 제자가 아니라, 성령의 뜻을 행하는 성령과 하나이신 분이심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실 때에도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4:1) 가셨으며, 광야에서 갈릴리로 돌아오실 때에도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4:14)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복음, 즉 그분의 말씀과 행적은, 모두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에 이끌리어 된 것이지, 그분이 당신의 인간적인 뜻과 바람대로 행하신 일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담은 복음은, 예수님의 태어나심에서부터 세례와 공생애의 모든 과정에서 성령께서 임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의 이끌림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거기에서 40일 동안 악마의 시험을 받으신 일은, 성육신하신 주님께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간이 다하였을 때 주님은 시장하셨습니다. 먹고, 자야 생활할 수 있는 우리처럼 주님도 그러셨습니다. 그분의 육신이 지치고 약해지셨을 때에 악마는 자기의 할 일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시험은, 첫째, 40일을 금식하신 분 앞에서 돌로 떡을 만들어보라는 것, 둘째, 자신에게 절을 하면 자기 손에 쥐고 있는 천하만국의 권위와 영광을 다 주겠다는 것, 셋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하나님 아들의 능력을 대중에게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각각의 시험이 지닌 의미가 다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험들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적으로 의지할 만한 것들을 앞세워, 하나님보다 그것들을 더 의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첫째는, 타인의 호의와 사랑에 의지하지 말고, 나아가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지하지 말고, 돌을 떡으로 만드는 이른바 경제적 자유를 얻는 삶이 더 낫지 않느냐는 유혹입니다. 둘째는, 기왕이면 남들이 우러러보는 높은 자리에 올라 선한 영향력을 펼치며 사는 삶이 더 낫지 않느냐는 유혹입니다. 마지막은, 기왕이면 사람들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어디에 가든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얻는 삶이 좋은 삶이 아니냐는 유혹입니다. 어쩌면 악마의 이 세 가지 유혹은, ‘이것이 과연 악마의 유혹인가?’ 라고 의심이 들 정도로 우리에게 설득력이 있는 목소리입니다. 심지어 신앙인들이 바라는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물질의 축복을 받아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 높은 자리에 올라 선한 영향력을 펼치고,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는 보람있는 삶의 결실을 거두는 것, 이를 두고 누가 나쁘다고 할 수 있으며,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것들을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맞이하신 큰 시험이라고 말하는 복음서가 바라는 삶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복음은, 우리가 항상 가난해야 하고, 선한 영향력은커녕 제 한 몸 겨우 가누고 살고, 남들의 인정과 존경받는 삶은 꿈도 꾸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각자의 모습대로, 우리가 처한 현실 가운데 풍성한 삶의 결실을 맺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불행하게 여길만한 이런 것들을 원하실 리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바로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구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말씀하셨습니다. 떡도 있어야 하고, 권력을 선용하는 것도 중요하고, 성실히 자기 삶을 가꾸어 부끄러움 없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삶을 사는 것 모두 다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에 앞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없으면, 이 모든 것들은 다 악마의 유혹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일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손에 붙들려서 하면 그것은 축복이 되고, 하나님을 의지함 없이 제 뜻대로 하면 그것은 악마의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축복은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요, 결과입니다. 그러나 축복이 목적이 되고, 재물이나 권력이나 영광이 목적이 되면, 그것은 유혹이 되어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만듭니다. 광야의 시험은 오늘 우리에게 이 사실을 전합니다. 삶이라는 끝없이 펼쳐진 광야에서,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광야와 같은 인생에서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하는 말씀입니다.

 

4.

 

예수님은 악마의 시험에 맞서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는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악마는 시험을 끝마치고 물러가서, 어느 때가 되기까지 예수에게서 떠나 있었다고 전합니다. 끝으로 한 말씀을 더 드리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바로, 악마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시험을 마치고, 물러갔는데, 아주 가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에게서 어느 때가 되기까지떠나있었습니다. 때가 되면, 예수님께서 이기신 유혹이 또 찾아와 그분을 넘어뜨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부하시기를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21:36)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또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힙 입어 시험을 이겨낼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이들은 더욱 자주 이런 일들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교만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번에 시험을 이겨냈다고 해서, 다음에도 또 이기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오늘의 은혜로 맞서야 하고, 내일의 문제는 내일 주시는 은혜를 의지하여 맞서야 합니다. 오늘 은혜를 쌓아두었다가 내일 싸워야지 하면, 광야의 하늘양식이 썩어버린 것처럼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오늘 시험을 이겼다 해도 하나님 앞에 늘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이긴 게 아니라 성령께서 함께하셔서 어느 때가 되기까지잠시 시험이 내게서 물러나 있는 것뿐입니다. 또 틈을 타서 원수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려 믿음의 길에서 떠나게 하려 온갖 부정적인 말과 생각을 집어 들고 와서, 어떻게든 우리를 넘어지게 만듭니다. 그것이 악마의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싸움은, 삶이라는 광야를 건널 때까지 지속되는 싸움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라, 최후 승리를 믿으며 날마다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선한 싸움인 것입니다.

 

5.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맞습니다. 올해 사순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신 예수님 말씀 의지하여, 삶이라는 광야에서 때로 시험을 당할 때에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크신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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