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본문: 시편 27:1-14; 누가복음 13:31-35

설교: 홍정호 목사 (2022.3.13. 사순절 제2)

 

[바로 그 때에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여기에서 떠나가십시오. 헤롯 왕이 당신을 죽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하여라.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보아라, 너희의 집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말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할 그 때가 오기까지, 너희는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주일 아침 교우 여러분과 가정에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고 마음에 간직함으로써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에 들려오는 전쟁의 소식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우크라이나 군인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보름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세계 시민들은 우크라이나인들의 저항을 응원하면서도, 그간 많은 피해가 발생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사태가 장기화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들도 커지고 있습니다.

 

유엔인권사무소에 따르면 지난 24일부터 현재까지 우크라이나에서 37명의 아동을 포함해 모두 516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미국 정보당국은 최소 2천명에서 4천 명의 러시아군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연합뉴스, “[우크라 침공] 사태 장기화 기로... 바이든, 올라가는 전략적 난이도,” 2022.3.11.) 통계에 잡히지 않은 양측의 인명 피해까지 포함한다면 사망과 부상자의 수는 더 많을 것이고,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가 불러온 세계 각국의 경제적 타격까지 생각한다면 그 피해는 이미 가늠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이들은,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34:14b) 한 성경의 말씀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이 짓밟아 버립니다.

 

이런 오만하고 악한 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신자들의 마음에도 상처가 남습니다. ‘세상이 이리 악한데, 나 홀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나님을 믿으나 믿지 않으나 악인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기는 매한가지인데, 기도는 해서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는 자조 섞인 물음들이 우리 안에서 생겨나 신앙에 대한 회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회의감이 조금씩 쌓이다보면 어느 때부터는 신앙으로부터 멀어져 냉담에 이르게 됩니다. 저 역시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만, 흔들리던 어느 날 시편 73편을 만나고 마음을 다잡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건만, 나는 그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했구나. 그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했구나. 그것은, 내가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73:1-3) 내가 바라보고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이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를 평안을 부러워한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2.

 

삶의 큰 시련과 역경 앞에서도 신실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간 의로운 사람에 대해 생각할 때 제일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 매일묵상을 통해 만나기도 한 욥입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뜻을 알 수 없는 고난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한번 닥치기 시작한 고난은, 욥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한꺼번에 그를 찾아옵니다. 하루는 욥의 일꾼 하나가 욥에게 달려와서 가축들을 모두 빼앗기고 종들도 모두 잃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 일꾼이 아직 말을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사람이 달려와서 또 다른 피해 소식을 전합니다. 이번에는 욥의 양 떼와 목동들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사람도 아직 말을 다 마치지 않았는데, 또 다른 사람이 달려와 이번에는 욥의 낙타 떼를 모두 빼앗기고 종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도 아직 말을 다 마치지 않았는데, 또 다른 사람이 달려와 결정적인 비극을 전합니다. 큰 아들 집에 함께 모여 있던 욥의 아들과 딸들이 무너진 집에 깔려 모두 죽고 말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욥은 꿈처럼 한순간에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일평생 땀 흘려 일군 모든 재산과 종들을 잃어버리고, 자녀들까지도 잃어버린 욥은 한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었습니다. 욥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이러한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갑자기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그는 도무지 그 의미를 알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일전에 니체의 책을 읽다 마음에 새겨진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도덕의 계보>라는 책에 나온 구절인데, “인간의 저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다라는 말입니다. 삶의 고난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기에 고난 그 자체를 두고 저주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고난이라 생각했던 이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경험을 우리는 종종 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겪는 고통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무리 작은 고난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한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욥은 어떻습니까? 한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슬픔 속에서 오히려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욥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오,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1:21) 욥기는, 욥이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고 전합니다. ‘믿는다는 말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욥은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믿는다는 것, 믿음으로 사는 신앙생활이란, 달리 말하자면, “의미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앞서 인용한 니체의 말, “인간의 저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라는 말을 뒤집어 생각한다면, “의미로 충만한 삶앞에서는 그 어떤 고통도 저주일 수 없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만난 신실한 신앙인들은, 남들에게는 큰 고난처럼 보이는 일 앞에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삶의 태도를 유지합니다. 그가 특별한 사람이라서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큰일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작은 일 앞에서도 마치 내일 지구가 멸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걱정과 근심에 휩싸여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고, 겪어낼 수 있는 고통의 무게도 다르기 때문에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말할 수는 없는 문제이겠습니다만,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당면한 문제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중하면 길이 보일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완전하신 뜻을 의지하며 산다는 것이요, “의미로 충만한 삶을 산다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오늘 누가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은 믿음으로 사는 삶, 의미로 충만한 삶의 길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3.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과 더불어 대적하는 무리들 가운데에도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몇몇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한 말을 전합니다. “여기에서 떠나가십시오. 헤롯 왕이 당신을 죽이고자 합니다.”(13:31b) 세례자 요한을 처형한 헤롯이었기에 그가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말은 새로운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하여라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13:33)

 

주님은 당신을 해치고자 하는 헤롯의 위협 앞에서도 공포나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으시고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우리 신자들이 삶에서 취해야 할 분명한 지향과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싼 문제들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복음의 한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에서 흰곰효과라고 알려진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다니엘 웨그너(Daniel Wegner)라는 심리학자가 한 실험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하는데,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의 학생에게는 흰곰을 생각하라고 했고, 다른 그룹의 학생에게는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답니다. 그리고는 흰곰이 떠오를 때마다 종을 치라고 했는데, 결과가 흥미로웠습니다.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그룹의 학생들이 종을 더 많이 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ironic process theory)라고 합니다. 흰곰효과는 어떤 생각을 하지 말라고 억누르면 더 떠오르고, 어떤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게 되는 심리작용을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어떻습니까?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흰곰효과를 극복하는 삶의 태도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헤롯의 위협은 실질적인 위협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의로운 세례자 요한을 죽인 사람이고, 로마에 아첨하고 잘 보이기 위해서라면 더한 일도 서슴없이 할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건넨 말이 괜한 협박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여라말씀하시면서,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을 둘러싼 문제들이나 주변 환경에 발목을 잡히지 않으시고, 그들은 그들의 일을 할 뿐,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굳은 믿음으로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십자가의 길, 부활과 영생의 길로 나아가셨습니다.

 

차를 가지고 지방에 갈 때마다 반복되는 경험이 하나 있습니다. 이 지역 주파수에 맞춰두었던 라디오 채널에서 잡음이 들리는 일입니다. 여기서는 깨끗한 소리로 잘 들렸는데, 어느 경계를 지나면서부터는 음악이 지직대는 잡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여러분도 비슷한 경험이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때 여러분은 잡음을 없애기 위해 어떻게 하시나요? 아예 라디오를 꺼버리기도 합니다만, 그게 아니라면 당장에 할 일이 있습니다. 주파수를 다시 맞추는 겁니다. 잡음을 없애는 가장 빠른 길은 주파수를 정확히 맞추는 일입니다. 주파수가 제대로 잡히면 순간 잡음으로 변했던 소리들이 다시 아름다운 음악이 되고, 정보가 됩니다.

 

우리 삶은 어떤가요? 한때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리던 말들이 어느 경계를 지나며 소음이 되는 경험을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었던 지식들이 어느 경계를 지나서는 거짓되고 미혹케 하는 소음들에 둘러싸여버리지는 않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주변 환경을 탓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주파수를 다시 맞춰야 합니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음에 함몰되지 말고, 잡음에 마음을 빼앗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삼아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시금 올바르게 조율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복음의 한길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어쩌면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4.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만났습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인생의 고난과 시련 앞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 그분께 경배를 드린 욥처럼, 죽음의 위험 가운데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신 예수님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복음의 한길로 나아가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크신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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