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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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우쳐 고치는 용기

 

본문: 이사야 55:1-9; 누가복음 13:1-9

설교: 홍정호 목사 (2022.3.20, 사순절 제3)

 

[바로 그 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다가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었는데,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포도원지기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내가 세 해나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열매를 본 적이 없다. 찍어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그러자 포도원지기가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가정에 함께 하시길 빕니다. 사순절 세 번째 주일 아침입니다. 오늘 만나는 말씀은, 누가가 전한 회개에 관한 두 개의 복음 말씀입니다.

 

1.

 

누가는 갈릴리 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당한 재난에 관한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합니다. 하나는 빌라도의 살육에 의한 고의적 인재이고, 다른 하나는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 일어난 비고의적 자연재해 성격의 재난입니다. 두 사례 모두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비극에 대해 전해 들으신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재난은 그들이 과거에 지은 어떤 죄와 관련이 있다는 유대 사람들의 종교 문화적 편견을 겨냥하신 질문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다.” 그들이 당한 재난은, 그것이 빌라도와 같은 악인에 의해 자행된 인재이든, 실로암의 탑이 무너지는 자연재해와 같은 비고의적 재난이든, 그들의 더 많은 죄 때문에 받게 된 징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오히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들이 당한 슬픔을 과거의 죄로 인한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시각으로 본다면, 그렇게 보는 너희 자신도 그러한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타인의 아픔을 죄 때문에 당한 일이라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너희 자신도 같은 일을 겪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픔을 겪는 타인과 대면한 이들의 할 일은, 할 수 있는 한 우리의 품을 내주고 그들의 곁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재난을 당한 이들 곁에서 미약하나마 지친 몸을 누이고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주고, 손이 닿는 한 그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꾸짖음을 당한 이들처럼 타인이 겪는 아픔의 의미를 섣불리 해석하고, 그 원인을 분석해 인과응보의 고리를 밝히는 일은, 고난당하는 이들을 대면한 우리가 당장에 할 일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같은 일의 반복을 피하기 위한 성찰의 과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반성과 성찰의 과정에서 원인에 대한 여러 분석과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거센 풍랑이 한 차례 지나간 다음에, 타인의 아픔이 잦아든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우선 할 일은, 고난당하는 이들의 곁이 되고, 품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갈릴리 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당한 재난의 소식을 들으며,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기보다는 그들이 지은 죄를 먼저 떠올리는 고착된 율법주의를 경계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율법을 주신 분의 본뜻인 사랑과 자비의 정신을 신앙의 근본으로 되새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2.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이야기는, 이 이야기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이 앞선 이야기와 다릅니다. 갈릴리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당한 재난 이야기의 시선이 타인에 비추어 자기에게로 향하는 것이라면, 뒤따라 나오는 이야기의 시선은 보다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향합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듣는 청중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다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었는데, 세 해가 지나도록 열매를 보지 못했습니다. 땅만 낭비한다 생각한 주인은 그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명합니다. 그러자 종이 말했습니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

 

앞선 이야기에서, 무고한 이들이 당한 재난이 그들의 더 큰 죄 때문이 아니라는 말씀을 듣고 어떤 이들은 안도감을 가졌을 겁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하는 말씀 앞에서 안도감은 당혹스러움으로 바뀌었습니다. 비유는, 듣는 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야기의 형식입니다. 듣는 이의 상황에 따라 같은 말씀도 달리 들을 수 있고, 이전 해석과 다른 해석이 가능한 것이 비유가 가진 이야기의 힘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 나오는 포도원지기를 예수님의 목소리, 성령님의 목소리로 읽어왔습니다만,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면서는 이 포도원지기가 마치 제 자신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신 분께서 당신의 땅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으시고, 잘 가꿔 열매 맺도록 힘쓰라고 하셨는데, 세 해가 지나도록 열매가 없다, 그러면 어떨까요? 우선, 핑계를 댈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땅이 원래 무화과나무가 자라기는 힘든 땅이고요, 주변 나무에 가려 빛이 잘 안 드는 땅이고요, 주변 돌무더기들도 그대로 있고요, 포도원에 왜 무화과나무를 심었냐고 불평하고 뽑아버리자는 사람들도 있고요, 하루밤새 잡초가 허리만큼 자라나서 자르고 잘라도 끝이 없고요... 아무튼 저는 한다고 한 것 같은데, 열매가 하나도 없네요. 죄송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포도원주인이시라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계속 일을 맡기고 싶으신가요? 예수님 비유에 나오는 주인처럼 찍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하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종은 주인에게 핑계를 대지 않았습니다. 대신 재빨리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주님께 간청했습니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르니, 그 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때 찍어버리십시오말했습니다. 이 종이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는지는 복음서가 전하고 있어 모르겠습니다만, 제 나름대로 말씀의 행간을 읽어보자면, 아차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저 주인님은 항상 자비롭기만 하신 분인 줄 알았습니다. 매년 열매를 맺으라고 닦달하지 않으시니, 열매가 중요하지 않은 분이구나, 그냥 취미로 나무를 심은 분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며 게을리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주인이 와서는, ‘내가 세 해나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왔으나, 열매를 본 적이 없다. 찍어 버려라하고 말씀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포도원에는 관심 없는 분인 줄 알았는데, 관심 없는 게 아니라 모든 과정을 인내로 지켜보고 계셨고, 포도원지기가 스스로 돌이켜 주인의 뜻을 알기를 바랐습니다. 그것이 자비로운 주인이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변화가 없자 주인은 결단했습니다.


3.

 

지난 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헤롯의 죽음의 위협 가운데에서도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한분이신 하나님의 뜻만을 바라보며 당신의 길을 나아가신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주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오늘 포도원지기에게 하신 말씀은, 여러분과 나누는 설교이기에 앞서, 제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이 갑자기 오셔서 저에게 묻는다면 뭐라고 말씀을 드릴까? 포도원을 잘 가꿔 열매를 맺으라고 했는데, 왜 아직 열매가 없나, 물으신다면 저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요?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만...’ 하는 변명을 시작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저도 이 포도원의 종처럼 말하겠습니다. 아니, 저는 이미 주님께 그렇게 말씀을 드리고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교우 여러분들, 듣기에 따라 섭섭한 말씀처럼 들리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이제 주님만 바라보고 목회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안 그러셨어요? , 스스로에게 솔직해지자면, 그럴 때도 있었고 안 그럴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명분과 이유를 내세워 제 할 일을 미뤘고, 최선을 다해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지 않았음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반성합니다. 이제 저는 최종 평가를 받고 인정을 받아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제 스스로를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얼마의 마음, 이만큼이면 그래도 잘 살아왔다는 안일한 생각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이제 일 년여 기한밖에는 남지 않은 절박한 포도원지기의 마음으로 남은 목회에 임하려고 합니다.

 

이런 마음을 먹은 포도원지기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변사람들의 평가나 이런 저런 말들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열매를 맺어 주인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 포도원에서 주님께 드릴 결실을 거둘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가?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주인께 간청한 포도원지기의 마음은, 목회자인 저만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여러분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대해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하고, 결실이 없는 데 대한 반성을 통해 뉘우쳐 고치려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한 일이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3월 첫 주일에 전도사님이 오셨습니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전도사님과 이런저런 말씀을 나누면서 제가 그랬습니다. ‘전도사님, 우리 교회에 잘 오셨어요. 하나님이 보내주신 분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에요. 인생에서 성실한 노력을 통해 보람의 결실을 거둔 분들이 많이 계신 교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이걸 잊지 맙시다. 그건 나와 전도사님의 열매가 아니에요. 원로 목사님과 먼저 있던 교우들이 거둔 열매에요. 우리는, 이제 시작입니다. 이제는 때가 됐어요. 이제는 심으면 납니다. 같이 심어서 같이 거둡시다.’ 그랬습니다. 절박한 상황이 되었으니, 일손이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다시 오셔서 열매를 찾으실 때가 멀지 않았는데, 그 때도 또 읍소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를 남기지는 못하더라도, 한 달란트를 가지고 땅에 묻어 두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4.

 

오늘 말씀의 제목을 뉘우쳐 고치는 용기라 했습니다. 회개라는 말을 그래도 푼 것입니다 뉘우칠 회(), 고칠 개() 자입니다. 회개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허위의식으로 포장된 자기 껍질을 걷어내고, 자신의 민낯을 대면할 용기입니다. 모든 변화는 자신에 대한 솔직한 대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한 꽤 많은 이들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변화에 나서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가 뉘우쳐 고치는 길로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이전까지 살아온 방식, 이전까지 타인을 대면해 온 방식, 이전까지 내가 나 자신을 생각해 온 그 모든 익숙함을 내려놓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여 새날을 향해 나아가라 명령하십니다. 거듭남, 변화된 삶은, 이렇듯 뉘우쳐 고치는 용기를 가진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삶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이미 변화에 참여하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어제까지 불신앙의 삶을 살았더라도 오늘부터 믿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 해도, 오늘 주시는 은혜를 의지하지 아니하면 계속 그 길을 갈 수 없다는 사실도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자리에서 계승할 것들은 계승하고, 두고 갈 것들은 과감히 두고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사람들 속에 살지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누가 뭐라 하든,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하겠다하신 예수님처럼,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그분 앞에 보람의 열매를 바치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삶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교우 여러분, 저는 다시 한 번 이 믿음으로 사는 삶을 결단합니다. 뉘우쳐 고쳐,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삶을 다시금 결단합니다. 여러분도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맡기신 이 포도원에, 그리고 이 포도원에 속한 교우 여러분 각 사람과 가정 가운데 알찬 열매가 맺히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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