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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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형제

 

본문: 시 32:1-11; 눅 15:11-32
설교: 김준영 전도사 (2022. 03. 27, 사순절 제4주)

 

[눅15:11-32, 새번역] 1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12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 14 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에,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그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 15 그래서 그는 그 지방의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의탁하였다. 그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좀 먹고 배를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17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19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25 그런데 큰 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데,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 소리와 춤추면서 노는 소리를 듣고, 26 종 하나를 불러서, 무슨 일인지를 물어 보았다. 27 종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반겨서, 주인 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다. 29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31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32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1. 평화의 인사

 

자비로우신 주님의 평화와 은총이 신반포 모든 교우와 함께하시길 빕니다. 이번 주에는 굵직한 일들이 너무 일상적으로 벌어졌고, 이어졌습니다.

아직 원인이 밝혀지진 않았지만, 중국에서는 승객 123명과 승무원 9명을 태운 비행기가 산속으로 곤두박질치며 추락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황망하게 가족과 친구, 동료를 잃은 이들에게 주님의 위로를 구합니다.

더불어 시간이 갈수록 지난하게 이어지는 우크라이나 사태에 하루빨리 평화로운 해결책이 나오길 기도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살육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약하고 힘없는 이들이 더는 도망칠 곳도 없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무차별적 폭격 앞에 스러지는 이들의 고통과 무고함은 도대체 누가 항변해줘야 할까요? 멈춰야 합니다. 끝나야 합니다.

우리 한반도의 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목요일 북한은 끝내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쏘아 올렸고,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급격하게 얼어붙고 있습니다. 서로를 향한 적대심은 소모하지 않아도 될 무수한 것들을 소진시킵니다. 그 소진된 힘 때문에 우리가 돌보고, 지켜야 할 것들에 정작 소홀하게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부디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와 화해가 임하길 간절히 구합니다.아울러 러시아와 북한의 지도자들을 포함한 전 세계의 통치자들이 무기와 힘, 폭력으로 국가를 운영하지 않도록 주님께 간구합니다. 심각한 시련을 겪는 이들과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해 주님께 폭력과 전쟁의 종식을 탄원합니다.

 

2. 춘분, 씨를 뿌리는 시간

 

지난 월요일에 춘분을 지났습니다. 춘분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시기, 이때를 기점으로 밤이 짧아지고 낮은 길어짐이 감지됩니다.
완연한 봄의 전령의 역할을 하는 절기가 바로 춘분입니다. 동시에 춘분은 우리 교회에도 의미 있는 절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은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절기지요. 1700년 전에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313년 기독교 공인 이후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부활절을 공식적으로 춘분 다음 보름 후 첫 주일로 정했습니다.이번 4월 17일 부활주일도 그렇게 계산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냐면 그동안 쓰던 달력을 바꿀 정도의 중차대한 일이었습니다. 4세기 당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 1200년 동안 부활 주일을 계산해보니 1200년이 지난 후에는 춘분과 실제 날짜가 무려 10일이나 차이가 났습니다. 실제 춘분은 3월 11일이었으나 당시 교회는 여전히 3월 21일을 춘분으로 간주했던 것이죠. 이런 오류를 발견한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반포한 3월 21일이 실제 춘분과 같도록 1582년에 그레고리력을 반포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양력이 바로 이 그레고리력입니다.

사순 4주일에 접어드는 오늘 여러분에게 사순 주간과 부활은 어떤 의미인지요? 농부들은 춘분부터 파종하기 시작합니다. 언제 싹이 틀지, 얼마나 키가 자라고 얼마만큼의 열매를 맺을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씨를 뿌리며 분명하게 자각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가 손에 콩 씨앗을 쥐고 있으면 콩이 나고, 보리 씨앗을 쥐고 있으면 보리가 날 것입니다.콩 심은 데 보리 나고, 보리 심은 데 콩 날 수 없듯이, 우리도 이제 중턱을 넘은 이 사순절기에 우리가 믿음 안에서 어떤 씨앗을 신앙과 삶에 뿌리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이번 주에도 “매일 묵상”이 어김없이 이어집니다. 날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나를 세워두며 우리가 거두어들일 열매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식별하는 사순절기를 보냅시다.

 

3. 잃어버린 것에 관하여

 

누가가 전하는 복음서에서 15장은 잃어버린 것에 관한 비유로 전해지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첫 번째로 1-7절에서 예수님은 양 백 마리 중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비유로 한 사람의 의미가 하나님께 어떤 의미인지 전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 누구도 제외되거나 소외되는 것을 분명하게 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을 내려놓고 당신의 품에 안기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사실, 심지어 당신이 먼저 애타게 그 한 양을 찾고 계신다고 이 비유는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8-10절의 두 번째 비유 역시 앞선 비유와 맥을 같이 합니다. 한 여자가 당시 노동자의 열흘 치 품삯에 해당하는 열 드라크마 중에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습니다. 눈에 심지를 켜고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습니다. 그 여자의 관심은 이미 가지고 있는 아홉 드라크마가 아니라, 오직 한 드라크마에 있습니다.

11-32절의 세 번째 비유는 15장의 비유 전체를 고조시키는 말씀이자, 이 장에서 가장 길게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탕자의 비유"로 많이 알려진 “잃은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주님께서 우리를 대하는 방식, 우리를 어떻게 여기시는지를 헤아릴 수 있는 본문입니다. 많은 교우님들이 이 이야기를 잘 아시겠지만, 이 이야기의 내용을 간략히 전해봅니다.

한 아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으신 아버지에게 “돌아올 몫"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무런 부연도 없이 아들과 그의 형제에게 각각 “몫”을 나누어 줍니다. 어떤 조건도, 당부도 없이 나누어진 “몫"을 가지고 둘째 아들은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그 재산을 낭비합니다. 자유로운 삶의 대가였을까요? 모든 것을 탕진한 아들은 최악의 상태로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17-18절 말씀입니다.

 

17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눅 15: 17-18, 새번역)

 

그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 이유는 배고픔 때문이었습니다. 굶어 죽게 생기니 아버지께로 도망쳐 온 것입니다. 당당하게 집을 나서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처량하게 돌아옵니다.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아들"의 자격을 손수 포기하기까지 합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봐서는 “잃은 아들"은 분명하게 둘째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앞선 비유처럼 이런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볼품없고 대책 없어 보이는 인간을 품어주시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십니다. 아들이 어떤 삶을 살다가 왔든 아버지의 관심은 “살아 돌아온 아들"이었기에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의 존재는 그동안의 사건들과는 견줄 수 없는 가장 값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조건 없는 용서와 품어줌. 그가 어떤 과거가 있던지 하나님께 그는 여전히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는 한 대목이 더 등장합니다. 돌아온 아들에겐 형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모범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묵묵히 아버지 곁을 지켜왔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그의 사역 메시지에서 맏아들의 항변을 이렇게 풀어냅니다.

 

“제가 집에 남아서 하닛도 속을 썩이지 않고 아버지를 모신 것이 몇 년째입니까? 그런데도 아버지는 저와 제 친구들을 위해 잔치 한 번 열어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돈을 창녀들에게 다 날리고 나타난 저 아들에게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주시다니요!” (눅 15: 29-30, 메시지)

 

일리 있는 항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아버지도 꿈쩍도 하지 않으십니다. 지금은 네 동생이 죽었다가 살아났고, 잃었다 다시 찾았으니 이 기쁨이 “마땅"하다.

아버지의 태도와 말씀은 우리에게 새로운 파문을 던집니다.

 

"과연 잃어버린 아들은 누구일까요?"

 

15장 1-3절은 이 세 비유를 들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소개합니다.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2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3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눅 15: 1-3, 새번역)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자타가 공인할 정도로 종교적 열심과 성실성을 갖춘 이들이었습니다. 삶에 모든 리듬이 종교에 정향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의 등장은 사실 거북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태도와 행적은 못마땅합니다. 예수님의 주위에는 당시 사회, 문화적으로 작은 자, 약한 자, 어쩌면 “죄인"으로 낙인찍힌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소외된 계층 사람들과 예수님이 어울릴 때마다 바리새파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수군거리고,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어쩌면 예수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지금까지는 종교적 행위와 위계로 묶어둘 수 있었는데, 더는 그들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장본인이 바로 예수님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불편함과 거북함으로 당신의 사역을 바라보고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잃어버렸다 되찾은 양과 동전, 한 사람”을 소개하고 계신 겁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저 “죄인"이라 불리는 이들의 돌이킴을 요청하시려던 것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직접 듣고 있는 사람들, 율법으로 자신의 의를 정당화하고, 자신이 정한 규칙으로 성실하게 살아가지만 어떤 왜곡이 심하게 일어난 이들에게 틈을 내고 계십니다.

 

비유를 탐탁지 않게 듣는 이들에게 질문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잘난 너희들에게는 돌이킬 것이 정말 없느냐?"고요. 예수님이 전하시는 회심의 선언은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유대교 사상가 아브라함 요슈아 헤셸은 “누가 사람이냐?”는 질문 앞에서 “사람이 되어감"이란 “끊임없는 결단"이라고 소개합니다. 헤셸의 말입니다.

 

무턱대고 경험에만 따르고자 하는 것, 정확하려는 욕망, 측정할 수 있는 “굳어진” 사실들에만 매달리는 행위는 그 본래의 목적을 허물어뜨릴 수가 있다. 그것은 우리를 소경으로 만들어 사실들 뒤의 사실을, 사람을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기계적이고 생물학적이며 심리적인 기능이 아니라 끊임없이 결단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한다. 삶 속에 드러나는 사실들도, 앞서 있었던 결단이나 판결들로부터, 그것들이 나타나는 동안 보여 준 태도들로부터 그리고 그것들의 결과로서 따라올 반응이나 반성들로부터 따로 떼어내 가지고는 바르게 서술할 수가 없다. _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8), 17.

 

누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비유는 사실 화석화되어, 생명력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던지는 “결단의 도전"이자 “초대"였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단단하게 “굳어진” 맏아들에게도 “회개의 결단"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4. 삼 형제 이야기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그의 소설 『탕자, 돌아오다』 에서 새로운 등장인물을 세우며 성서 속 “결단의 질문"을 좀 더 날카롭게 던집니다.
지드는 20세기 프랑스 문단에서 보기 드문 개신교 소설가로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작가였습니다. 그의 저작 중에서 『탕자, 돌아오다』는 아주 짧은 단편입니다만, 어느 작품 못지않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입니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아버지가 아니라, “탕자"입니다. 가족 구성원도 누가가 전하는 이야기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말씀과는 다르게 여기서는 아버지, 어머니, 큰형, 탕자, 그리고 동생이 등장합니다. 성경에서처럼 탕자는 배가 고파서 돌아왔습니다. 밤새 덮치는 한기는 안락한 침대를 떠올리게 했고, 굶주림은 이 집의 풍성한 식탁을 그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왔노라고, 굴복했노라고 처절하게 고백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한 “자기 인식"이 지드의 탕자에게 발견됩니다. 지드가 이 이야기를 탕자의 입장에서 서술했기에 둘째 아들이 왜 집을 나갔으며, 왜 다시 돌아왔는지가 새롭게 보입니다.

아버지가 묻습니다.

 

"얘야, 내 곁을 떠났던 이유가 뭐냐?”

"아버지, 제가 정말로 아버지 곁을 떠난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버지의 존재는 도처에 있지 않습니까? 저는 한 번도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_ 앙드레 지드, 『탕자, 돌아오다』, 배영란 옮김, (서울: 포이에마, 2016), 24.

 

탕자는 아버지에게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첫째 형으로 묘사되는 “집", 형식과 질서에 사로잡힌 채 자신이 “아버지"가 넘어서려는,
심지어 “아버지"를 되고자 하는 그 제도에서부터의 탈출을 결단한 것입니다. 다만 그가 그렸던 “이상"과 마주한 “현실"이 달랐을 뿐입니다.
심지어 전 재산을 탕진하고 광야 한가운데 있을 때만큼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더 강렬하게 느낀 적이 없었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인지 한편으로는 성서 속 둘째 아들의 모습보다 당당해 보이기까지 하는 것일까요. 결국 약해질 대로 약해져 배고픔에 돌아오긴 했지만, 분명 둘째 아들의 인식은 그러했습니다.

돌아온 “집"은 여전히 형의 질서와 법이 어떤 것보다 앞서 있었고, 모든 것이 그에 따라 돌아가는 처지였지만, 탕자는 집을 떠나기 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집"에 머물기로 합니다. 심지어 형에게 “저는 형님 없이도 아버지 하시는 말씀을 잘만 알아들었다."(앙드레 지드, 『탕자, 돌아오다』, 배영란 옮김, (서울: 포이에마, 2016), 33.)고 대들 용기도 생겼습니다.

 

"집"을 떠났던 경험은 그에게 새로운 인생의 맛을 선사합니다. 집을 나가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인생의 달콤씁쓸함을 품고 탕자는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지드는 여기서 이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탕자가 못 이룬 “떠남"을 막냇동생에게 연결시킵니다. 그리고선 탕자에 이어 집을 떠나는 동생에게 “너는 다시 돌아오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것으로 소설을 마칩니다. 동생을 통해 자신의 실패를 조금이나마 만회하려는 당부일까요? 아버지도 이제 형에게 압도되었으니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치라는 경고일까요?

 

탕자는 막냇동생에게 자신이 지독한 “갈증”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났노라고 고백합니다. “집"에서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다거나, 그 “갈증"을 모른 채하고 집에 머물러 있기엔 감당할 수 없던 극심한 “목마름"이 그를 광야로 이끌었습니다.그리고 바로 그 “목마름"이 이끈 광야에서 진정으로 아버지와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견디기 힘들 만큼 신 야생 석류의 맛 속에서도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앞서 아버지에게 고백했듯이 어느 때보다 더 깊고 맑게 아버지와 연결되는 경험도 광야에서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아버지도 그런 탕자에게 “갈증을 풀어주는 사랑"을 가르쳐주려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기에 결과적으로는 이 모든 것이 실패처럼 보이나 지드는 심지어 물려받을 재산도 없는 동생의 “떠남”과 그 모습을 지지하는 탕자의 태도로 하여금 우리가 여전히 광야와 갈증을 마주할 수 있도록 둔 채로 소설을 맺습니다.

 

5. 사순의 용기

 

여러분, 신반포 감리교회 헌장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신반포 감리교회 헌장 1항. 이 교회는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룩하신 구원의 은총에 감격하여 모이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공동체이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신반포교회가 제도와 권위에 사로잡힌 경직된 “집"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서 길을 탐색하는 구도자들, 분명한 목적지로 가닿는 순례자들의 공동체임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구원의 은총은 딱딱하고 건조하게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부인하기 싫어도 그 감격은 지드의 표현대로 “미소 짓는 동시에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무릎을 꿇고” 맛보는 영원한 샘물로 다가오겠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잃어버린 존재들의 비유"와 지드가 전한 “탕자와 그 형제들의 이야기"는 그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샘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 일은 머리로만 할 수도 없고, 손과 발로만으로도 할 수도 없습니다. 온몸으로 그 샘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 마리의 양을 찾는 일도, 한 드라크마를 찾는 일도, 집 나간 아들을 맞이하는 일도 가만히 앉아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울타리 안에 머물러서만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갈증"과 정직하게 마주하는 일도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길들어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떠남", 내가 아닌 모든 것을 벗어던지는 “결단", 무의식적으로 해오던 관성으로부터의“탈출"로부터 그 그리움의 진정한 의미가 발견될 것입니다. 성서 정과에서 사순 4주일 독서는 예로부터 오늘 본문인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로 고정되어 전해진다고 합니다. 사순 시기의 중턱에서 우리가 더 진실하게 마주해야 할 우리의 실존적인 뉘우침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조건 없는 받아들여 주심에 대한 응답이 이 말씀을 통해 전해져서일까요.

 

교우 여러분,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는 숱하게 첫째 형도 만나고, 탕자와 같은 둘째도 만날테지요. 그리고 셋째 같은 이들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지금 여러분은 어떤 형제에게 공감이 되십니까? 삼 형제 모두 우리의 신앙 여정에 의미 있는 군상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한 주 동안 잊지 말 것은 제대로 목말라 본 사람들이라야만 진정으로 뉘우침과 돌아옴을 자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오늘 말씀에서 아들을 따뜻이 맞아 주는 아버지의 비유를 깨닫게 된다는 명징함입니다. 여러분 우리 함께 정직하게 진실하게, 어쩌면 처절하게 그 진정한 “돌이킴"의 여정에 함께 서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한 주도 사순의 깊이를 잘 헤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빌며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우들에게 전한 고백을 한 주 동안의 우리 고백으로 삼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고후 5: 17, 새번역)

 

주님의 평화와 은총을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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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5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2021.11.21.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 왕국주일) 홍목사 2021.11.21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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