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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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위한 잔치

 

본문: 이사야 43:16-21; 요한복음 12:1-8

설교: 홍정호 목사 (2022.4.3. 사순절 제5)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셨다.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에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곳이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있었고, 나사로는 식탁에서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 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장차 예수를 넘겨줄 가룟 유다가 말하였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을 향한 주님의 여정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베다니가,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장소라는 사실을 상기시킨 후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는 언급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1.

 

주님은 당신께로 오는 모든 이들을 사랑하셨지만,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의 오라버니인 병든 나사로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셨습니다. 마리아 자매의 부탁을 받고 예수님께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한 사람은, “주님, 보십시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앓고 있습니다.”(11:3)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다니로 오셨고, 거기에서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이 일이 있은 후 주님께서 다시 베다니로 오셔서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간단히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던 중에 나사로를 살리셨던 베다니로 오셨고, 거기에서 주님을 위하여 잔치가 열렸습니다. 그 잔치에서 마리아가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는 일이 있었고, 이 일을 본 가룟 유다가 마리아가 낭비를 하고 있다고 지적하였으나,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을 옹호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이 본문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마리아의 행위에 주목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행위 자체에, 그러니까 사건에 주목하여, 이를 주님을 향한 큰 사랑에서 비롯된 거룩한 낭비로 해석하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말씀에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사건에 주목하는 대신 바로 이러한 일이 일어난 장소가 어디였는가, 왜 이런 일이 있어났는가, 하는 데 주목해서 오늘 복음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2.

 

어떤 일이 있어났다고 하면, 때와 장소는, 일어난 사건 그 자체에 비해 덜 주목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언제일어났는지, 그리고 어느 장소에서 일어났는지 하는 것은, 일어난 사건 그 자체에 드러나 있지 않은 중요한 정보들을 함축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이른바 문해력(文解力)’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글자를 읽을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글의 맥락을 파악하고, 글 사이사이의 행간을 읽는 능력까지를 포함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말과 글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고, 행간을 적절히 읽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 해야 반쪽짜리 이해에 머물거나, 지나친 경우에는 오독에 기반 한 편견을 강화하는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때와 장소에 대한 이해는, 일어난 사건 그 자체만큼 중요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건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성경말씀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러한 견해는, 저의 사견이라기보다는 20세기의 언어학과 인류학에서 출현해서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친 구조주의라는 철학적 사유에 근거한 관점입니다. 방대한 구조주의의 사유 체계를 여기에서 다 소개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겠습니다만,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구조주의는, 사실 그 자체에 주목하던 객관적 사유체계로부터, 그 사실이라는 현상의 이면들, 현상을 둘러싼 맥락들에 주목하는 낯선 사유체계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미 출현한 지 백여 년이 지난 관점이니 낯설다고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여전히 드러난 사실 그 자체에 주목하고, 사건 그 자체에 주목하는 일에 익숙한 우리 일상에 있어, 구조주의적 사유는 아직도 낯선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튼 어떤 일이 있어났다고 할 때, 우리는 사건 그 자체보다는, 그 일이 언제 일어난 일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일어난 일인지를 함께 살펴보아야만 그 사건에 대한 보다 풍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마리아가 주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이 거룩한 낭비가 일어난 때와 장소가 어디인지 살펴보는 일이 중요해 집니다. 때는 유월절 엿새 전이었고, 장소는 베다니였습니다. 유월절은 죽음과도 같았던 이집트의 노예생활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신 해방을 기념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축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사건은 이 유월절 기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이 일어난 때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베다니는 어떤 곳입니까?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장소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이 전하는 때가 유월절 엿새 전이었고, 장소가 베다니였다는 데에는 요한이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바로, 주님은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러내시는 분이시다, 사망의 권세가 어찌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 그분 안에 있다, 하는 메시지입니다.

 

3.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을 위해 열린 잔치는, 바로 이러한 생명의 축제가 열리는 장소입니다. 유월절 엿새 전이라는 시간 속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베다니 역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이 일어난 장소입니다. 그리고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고 계시는 예수님은, 바로 이 일의 완성이 되시는 분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시는 분, 그분이 예수님이시고, 생명이신 그분을 위하여 마련된 잔치 자리가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때와 장소인 것입니다.

 

코로나가 오래 지속되어 안타까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교회 활동과 관련하여 우리 모두가 특히 아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함께 음식을 나누며 친교하는 애찬의 시간이 유예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처음 우리교회에 왔을 때 교우 여러분들에게 환대를 받았던 것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기쁘고 감사한 추억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첫 설교를 한 날, 김진일 장로님께서, 그때는 집사님이셨는데, 식사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어색한 첫 만남 자리에서 밥을 먹는지, 뭘 먹는지, 불편한 가운데에서도 환대해 주시는 마음에 감사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몇몇 교우들의 가정으로 초대받아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함께 보낸 추억도 있습니다. 오전으로 예배시간이 변경된 이후로는, 점심 친교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우리 남선교회 테이블에서 어떤 분이 농담을 하셨는데, “다음 주일 설교 제목보다 다음 주 식사 메뉴가 더 궁금합니다,” 하셔서, 함께 웃기도 했습니다. 예배, 선교, 교육, 봉사, 친교, 이 다섯 가지 교회의 역할 중에 그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친교는 이 모든 교회의 역할을 가능하게 만드는 기쁨의 원천이 되곤 합니다.

 

오늘 본문 역시 이러한 사랑의 친교 자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마리아의 거룩한 낭비가 일어난 때와 장소가, 주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축제의 때와 장소였다는 사실,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생명의 축제의 자리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자리가 잔치 자리이고, 왜 사람들이 주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지, 그 이면에 있는 기쁨과 감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한다면,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버린 이 행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신앙의 감격이 없으면, 이런 일은 이해할 수 없는 낭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한 번 여쭤보겠습니다.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낭비하고 있다는 가룟 유다의 말이 틀린 말인가요? 아닙니다. 유다의 지적은 옳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편을 들어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은, 옳은 말을 하는 가룟 유다의 중심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문해력을 동원해 본다면, 주님은 그의 옳은 말 이면에 있는 맥락들을 파악하고 계셨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유다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라기보다는, 그가 잔치에 참여한 이들의 구원의 기쁨과 감격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 돕는다면 누가 더 적극적으로 나설까요? 낭비가 아깝다고 지적한 가룟 유다일까요, 아니면, 거룩한 낭비를 한 마리아와 이 잔치에 기쁨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일까요? 제 짧은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단연 후자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일에 쓰는 돈이 아깝다, 할 때는, 사실 돈이 아까운 게 아니라, 그 돈을 이 일에 쓸 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특히 부자들이 그렇게 말할 때는 더욱 그렇다고 합니다. 제가 부자는 아닙니다만, 부자들의 심리를 다루는 여러 책들에 미루어보자면, 그들은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단돈 백 원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철저한 삶이 방식이 그들을 부자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설명들을 접하면서,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6:21) 하신 예수님의 말씀만큼 우리 욕망의 근원을 꿰뚫어 하신 말씀이 또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가 돈이 아깝다는 식으로 내뱉은 말의 이면에는, ‘이분이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분인가?’ ‘이분이 한 일이 이렇게 값비싼 향유를 쏟아 부을 만큼 그렇게 값진 일인가?’ 하는 의구심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유다의 내심을 알고 계셨기에, 유다의 옳은 말을 거들지 않으시고, “그냥 두어라.” 하시면서 마리아의 편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4.

 

얼마 전 새로 부임하신 전도사님의 시선을 통해 우리 교회의 익숙한 헌장을 낯설게 읽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리교회 헌장의 첫 항을 기억하시지요? “이 교회는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룩하신 구원의 은총에 감격하여 모이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공동체이다.”입니다.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없는 공동체의 신앙고백입니다. 사실, 이후의 이어지는 항들은 이 첫 항을 잘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저절로 따라올 만한 실천 사항들입니다.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께서 주님을 통하여 이루신 구원의 은총에 감격한 이들의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감격하는 이들의 자리는, 자연스레 잔치의 자리가 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거기에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하는 구절이 바로 이러한 구원의 은총에 감격하여 모이는 이들의 반응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사람을 구원하여 주심을 감사, 날마다 새날의 은총을 허락하심에 감사, 사망의 권세에 짓눌려 살지 아니하고, 어떠한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여 담대히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 이러한 구원의 은총에 감격하여 모이는 이들의 공동체가 바로 주님의 교회이며, 우리 신반포감리교회의 처음 시작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지는 축제의 장소입니다. 신앙의 기쁨을 빼놓고는, 신앙생활의 본질을 말할 수 없습니다. 올해 우리가 매주일 예배를 마치며 나누는 파송의 말씀이 있습니다. 기억하시지요? 요한복음 1620절에서 22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근심에 쌓여도,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중략) 지금 너희가 근심에 쌓여 있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볼 때에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며, 그 기쁨을 너희에게서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신앙생활은,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위한 잔치의 장소, “구원의 은총에 감격하여 모이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공동체입니다.

 

5.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의 교회에, 저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이 감격이 있습니까?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우리의 향유를 쏟아 붓는 마리아와 한 마음입니까, 아니면, 세상 가치 없는 일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냉소에 찬 가룟 유다와 한 마음입니까? 구하기는, 저는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교우들 마음에 주님께서 구원의 감격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각 사람을 처음 신자로 불러주셨을 때의 감격, 그리고 이 교회의 일원으로 불러 당신의 일을 함께 하자고 우리를 세워주셨을 때의 그 감격을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감격이 없다면, 신앙생활은 그야말로 무가치한 것이고, 인생 전체를 낭비하는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기쁨을 안다면, 주님을 우리 인생의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삼아 살아가는 이 길이야말로 참 생명의 길이요,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축복된 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 주간도 우리 삶을, 주님을 위한 잔치의 자리로 삼아, 그분을 모신 마음에 기쁨이 충만한 교우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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