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나라가 임하시오며

 

본문: 이사야 50:4-11; 누가복음 19:28-40

설교: 홍정호 목사 (2022.4.10. 사순절 제6, 종려주일·고난주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앞장서서 걸으시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다. 예수께서 올리브 산이라 불리는 산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오셨을 때에, 제자 두 사람을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맞은쪽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서 보면, 아직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혹시 누가 너희에게 왜 푸느냐고 묻거든,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십니다하고 말하여라.”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가서 보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그들이 새끼 나귀를 푸는데, 그 주인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 새끼 나귀를 왜 푸는 거요?”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새끼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옷을 나귀 등에 걸쳐 얹고서, 예수를 올라타시게 하였다. 예수께서 나아가시는데, 제자들이 자기들의 옷을 길에 깔았다. 예수께서 어느덧 올리브 산의 내리막 길에 이르셨을 때에,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하며,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을 두고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하였다.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 그런데 무리 가운데 섞여 있는 바리새파 사람 몇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종려주일 아침 교우 여러분과 가정에 함께 하시길 빕니다. 유월절 순례길에 나서신 주님 일행은 마침내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도착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행렬과 이를 환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날을 시작으로 전 세계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한 해 중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는, 어쩌면 복음서의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성주간,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고난주간은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일주일 여정을 따라가면서, 그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사건인지, 과연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말과 고백 속에 담긴 참된 의미는 무엇인지, 복음 말씀에 비추어 스스로에게 되묻고, 경건한 마음으로 삶을 조율하는 시간입니다.

 

2.

 

고난주간의 시작인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도 부르는 까닭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그분을 맞으러 나온 이들의 손에 종려나무 가지가 들려있었다는 요한복음 전승에 따른 것입니다. 곧게 뻗은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와 영광을 상징합니다. 당대 사람들은 국가적인 큰 승리와 성공을 거둔 왕이나 장군의 개선 행렬을 환영하며 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풍속에 미루어 본다면, 주님께서 오시는 길에 자신들의 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던 사람들의 마음 속 기대감을 엿볼 수 있겠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 기적을 일으키시고 지혜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일깨우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식은 유월절 순례를 위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더욱이 때는 유대 민족의 해방을 기념하는 유월절 축제일입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순례객들은, 먼 옛날 야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집트의 노예생활로부터 우리 선조들을 구원해 주셨던 것처럼, 바로 저분 예수님을 통해 오늘 로마의 압제 아래 신음하는 우리 민족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품고 그분을 맞으러 나왔습니다.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 누가, 로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저들의 기대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저들의 바람을 두고 무지한 이들의 한낱 꿈에 불과한 외침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의 기대를 아시는 주님은, 환호하는 무리를 꾸짖으시라는 바리새인들의 말에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 순례객들은. 이스라엘이 이방신을 섬기는 로마제국과 그 하수인들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닌, 다윗의 영광이 드러나는 나라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예루살렘은 그 꿈의 중심에 자리 잡은 도시였습니다. 예루살렘은 기원전 천 년경 다윗 왕 시대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기원전 900년 경에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이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 사회의 종교 역사 문화 정치 전반에 걸친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세상과 하나님을 연결시켜주는 세상의 중심이기도 했습니다. 이 성전은 신앙의 중심지, 세상의 중심, 나아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이 땅의 유일한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이때부터 이른바 성전중심체제라는 것이 형성되면서, 성전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한 유대의 사회 문화 체제가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3.

 

이스라엘은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이 통치하던 때 역사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이때는 한 왕이 나라의 열두 지파를 모두 다스리는 이스라엘의 통일왕국 시대였고,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국력이 강해 이웃 나라의 침략으로부터도 안전한 시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때는 이스라엘의 사법적인 공의와 도덕적인 의가 확립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억 속 다윗은, 공평하고 의로운 왕, 이상적인 목자 같은 왕이었으며, 하나님의 눈동자,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했습니다.(크로산, 마지막 일주일, 23-24)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 왕이 통치하던 번영의 시대를 그리워했습니다. 그래서 미래의 희망인 구원자, 메시아가 오신다면 그분은 분명 다윗의 아들이 틀림없을 것이다, 다윗보다 더 뛰어난 위대한 왕이 오실 것이라고 믿어왔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의 오랜 꿈의 공간이자,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희망의 장소였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민족적 희망이 응집된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사람들의 환호와 기대 속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말씀입니다만, 주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와 기대 속에서 승리한 왕과 같은 환영을 받으시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데, 그분은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을 두고,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까닭이 AD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의 함락과 성전의 파괴를 예견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에 대항하여 세 번에 걸친 중요한 항쟁을 벌였습니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성전의 파괴라는 처참한 결과를 불러온 AD66년에서 73년에 일어난 제1차 유대-로마전쟁, 그리고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 의한 항전인 키토스 전쟁(115-117), 바르 코크바 전쟁(132-135)입니다. 예루살렘을 멸망으로 이끈 이런 일련의 전쟁들에 대한 암시가 복음서에 나와 있다는 이유에서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일어날 역사적 비극을 미리 예견하시고 눈물을 흘리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이유에서, 이러한 구체적인 암시들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누가복음은 성전이 파괴된 AD70년 이후에 기록된 문헌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환호와 기대 속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다가오시며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미리 예견하신 때문이 아니라, 다른 데 그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그 까닭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율법을 주신 분의 본뜻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오늘에 대한 주님의 탄식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렇게 기도하라고 친히 가르쳐주셨던 주님께서는, 그 아버지의 뜻과 동떨어진 오늘 예루살렘의 현실 앞에서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신 것이 아닐까요? 이런 현실 속에서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은 주님께 기대를 거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겁니다.

 

앞서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꿈의 장소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크로산이라는 성서학자는 예루살렘이라는 장소가 지닌 이면에도 주목합니다. 그에 따르면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미래의 희망이 담긴 장소인 동시에 권위적인 지배체제의 중심지라는 이중성을 지닌 곳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은, 로마와 결탁한 소수의 귀족 엘리트 그룹에 의한 지배되는 정치적 억압의 장소이기도 했고, 수확한 농산물의 절반 내지는 3분의 2를 거둬가는 과도한 세금으로 결국 빚을 만들어내는 경제적 착취의 장소이기도 했으며, 이러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억압을 부자와 권력자들의 편에서 종교적인 언어로 정당화하는 종교적 정당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고, 그는 지적입니다.(크로산, 앞의 책, 27)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희망이 담긴 예루살렘은, 당대 이스라엘 사람의 희망이기는커녕 사람들을 절망으로 내모는 어둠의 근원지이기도 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는 이들의 바람 속에는 이러한 질서 너머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4.

 

기독교 전통은, 하루아침에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돌변한 군중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입성을 환영한 이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뜨거운 해방의 갈망마저 거짓된 것이었다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주기도문을 통해 가르쳐 주시고 몸소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 “나라가 임하시오며하고 기도하라 말씀하셨을 때의 그 나라는, 이 세상의 권세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래서 로마에 대항하는 무력이나 그 어떤 사회제도나 체제의 수립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님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는, 율법을 주신 분의 참뜻이 올바르게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율법을 주신 분의 참뜻이 올바르게 세워지는 나라라는 말은, 현실의 특정한 정치경제체제나 제도의 수립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서의 매우 중요한 관점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어떤 특정한 장소나 체제를 뜻하는 말이 아니고, 새로운 질서를 뜻하는 말입니다. 약자들이 소외당하고, 가난한 자들이 멸시당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 그런 세상에 대한 갈망이 담긴 기도가 바로 나라가 임하시오며하는 주기도문 속에 담긴 새로운 질서, 하나님 나라 열망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비유 속에는 이러한 새로운 질서에 대한 전망이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담겨 있습니다.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가장 작은 것이 크게 되는나라입니다. 유대인들이 불결하다고 여겨 온 사마리아 사람들에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과 레위인에서는 볼 수 없는 크나큰 자비와 긍휼을 보게 되는, 그런 나라입니다. 성실히 목자 곁을 지키던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남겨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광야로 나서는 목자의 나라입니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이 아니라 죄인 한 사람의 회개가 더 큰 기쁨이 되는 나라입니다. 묵묵히 아버지 곁을 지키며 살아온 선량하고 순종적인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방탕한 아들이 돌아왔을 때 축하의 잔치를 벌이시는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죄 많은 세리가 의로운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그런 나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하나님 나라를 여러분은 감당할 수 있을까요? 이 주일에, 지루할 수도 있는 설교를 경청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고자 애쓰는 여러분들, 여러 유혹에도 불구하고 주일을 성수하고자 지금 함께하고 있는 귀한 여러분들보다 교회 바깥에 있는 저 한 사람을 찾아 주님이 떠나신다고 한다면, 당장에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요? 그러나 복음서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가장 작은 것이 크게 되는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와 그 전망으로 충만합니다. 그 나라는,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던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하는 나라, 사람들이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워 세워놓은 장벽들이 무너지고 장벽 너머에 있던 이들이 두 손을 맞잡는 나라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선포되고, 갇힌 사람이 풀려나고, 눈먼 사람이 다시 보게 되는 나라, 그 나라가 주님의 나라, 우리가 매 주일 기도하는 주기도문에 담긴 나라가 임하시오며간구할 때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후스토 곤잘레스라는 잘 알려진 미국의 역사신학자는, “나라가 임하시오며하고 기도하는 이들이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장벽을 허물고, 원수를 용서하며, 가난한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압제받는 사람을 해방시킬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며, 그뿐만 아니라 그 나라에 사는 연습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곤잘레스, 초기 교회에서 배우는 주기도문, 2022, 121)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이 한 마음을 얻기 위한 공부와 수련의 과정이기도 하겠습니다.

 

5.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17:20)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말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체제나 제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오늘날에도 많은 신자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그 나라에 대한 복음서의 비전은 세상의 체제나 제도의 수립에 그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비전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한없는 긍휼로 우리를 돌보시는 사랑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율법을 완성하신 한 분이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비전이 바로 나라가 임하시오며하는 기도 속에 담긴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주님은 이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 하셨습니다.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첫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님의 꿈이 오늘 우리의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작고 연약해 보이는 것 속에 감춰진 놀라운 하나님의 뜻, 신앙의 신비가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한 주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한 주간 주님의 은총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09 나아만과 게하시 (2022.7.3. 성령강림 후 제4주) 홍목사 2022.07.03 8
1008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 (2022.6.26. 성령강림 후 제3주) 홍목사 2022.06.26 38
1007 하나님께서 네게 하신 일을 (2022.6.19. 성령강림 후 제2주) 홍목사 2022.06.19 37
1006 경청과 실행 (2022.6.12. 성령강림 후 제1주, 삼위일체주일) 홍목사 2022.06.12 39
1005 너희와 함께 또 너희 안에 (2022.6.5. 성령강림절) 홍목사 2022.06.05 45
1004 주님이 바치신 기도 (2022.5.29. 부활절 제7주, 승천주일) 홍목사 2022.05.29 30
1003 그 사람은 걸어갔다 (2022.5.22. 부활절 제6주, 웨슬리회심기념주일) 김준영 2022.05.22 41
1002 서로 사랑할 때 (2022.5.15. 부활절 제5주) 홍목사 2022.05.16 43
1001 내 양들은 나를 따른다 (2022.5.8. 부활절 제4주, 어버이주일) 홍목사 2022.05.08 34
1000 회심과 성화 (2022.5.1. 부활절 제3주) 홍목사 2022.05.01 34
999 주님이 보내실 때에는 (2022.4.24. 부활절 제2주, 교회창립 기념주일) 홍목사 2022.04.25 59
998 부활의 아침 (2022.4.17. 부활절, 부활주일) 홍목사 2022.04.17 43
997 다 이루었다 (2022.4.15. 성금요일) 홍목사 2022.04.16 22
» 나라가 임하시오며 (2022.4.10. 사순절 제6주, 종려주일/고난주일) 홍목사 2022.04.10 39
995 주님을 위한 잔치 (2022.4.3. 사순절 제5주) 홍목사 2022.04.03 26
994 삼 형제 (2022.3.27. 사순절 제4주) 김준영 2022.03.27 60
993 뉘우쳐 고치는 용기 (2022.3.20. 사순절 제3주) 홍목사 2022.03.20 61
992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2022.3.13. 사순절 제2주) 홍목사 2022.03.13 62
991 삶이라는 광야에서 (2022.3.6. 사순절 제1주) 홍목사 2022.03.06 60
990 깨어나 영광을 보다 (2022.2.27. 주현 후 마지막 주, 변화주일, 삼일절기념주일) 홍목사 2022.02.27 38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51 Next
/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