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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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아침

 

본문: 이사야 65:17-25; 요한복음 20:1-18

설교: 홍정호 목사 (2022.4.17. 부활절, 부활주일)

 

[주간의 첫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사람 마리아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이미 옮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무덤으로 갔다. 둘이 함께 뛰었는데,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서, 먼저 무덤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는 몸을 굽혀서 삼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으나,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도 그를 뒤따라 왔다. 그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삼베가 놓여 있었고,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그 삼베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한 곳에 따로 개켜 있었다. 그제서야 먼저 무덤에 다다른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다가 몸을 굽혀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 머리맡에 있었고, 다른 한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여자여,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하였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을 때에, 그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지만, 그가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여보세요,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를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를 모셔 가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가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부니!” 하고 불렀다.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제 내 형제들에게로 가서 이르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하여라.”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

 

1.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부활절 아침 교우 여러분과 가정에 충만하시길 빕니다. 긴 사순절의 순례를 마치고 마침내 부활의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주님께서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기쁨이 충만한 부활주일, 부활절기가 되시기를 빕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죄 없으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모든 인류를, 아니, 이 한 사람을,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 공로 없으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끄럼 없는 삶을 향한 갈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는 죄인이지만, 이제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단번에 모든 죄 값을 치르신, 전능하신 하나님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두 낱말 안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사순절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는 절기였다면, 이제부터는 부활을 기뻐하는 시간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의 영광을 기뻐하며 찬미하는 절기입니다. 오늘 부활의 아침은, 주님께서 무덤에 머물러 계시지 않으시고 살아나신 것같이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 머물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 받게 된 존재가 되었다는 복음이 선포되는 아침입니다.

 

2.

 

우리는 익숙한 것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와 그 소중함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곤 합니다. 사람도 그렇고, 일상의 경험들도 마찬가지이며, 말도 그렇습니다.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교회의 친숙한 낱말들, 이를테면 하나님, 은혜, 십자가, 부활, 구원, 믿음 같은 용어들은 하나하나가 제각기 오랜 역사와 깊은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낱말들이지만, 그 뜻을 다 살피지 못한 채 관용구로 퇴색하여 그 빛을 잃어버린 채 무심코 사용되는 낱말이 되곤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가운데 오랜 신자들에게 익숙한 기도의 관용구가 하나 있습니다. “이 죄인 아무 공로 없사오나, 예수님의 이름 의지하여 기도하옵니다. 아멘.” 여러분, 이렇게 끝맺음을 하는 기도를 들어보셨지요? 이렇게 끝맺음 하는 기도가 익숙한 분들이 계실 겁니다. 교회에 첫 발을 들여 놓은 때부터 신학교에 갈 때까지, 제가 듣고 자란 대부분의 공적 기도는 대체로 이런 고백으로 끝맺음을 하곤 했습니다. 마치 관용구처럼 강단에 올라 기도하는 모든 분들은, “이 죄인 아무 공로 없사오나,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합니다. 아멘.” 하는 말로 기도를 끝마치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기도가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는 겸손한 신앙고백의 자리를,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에 대한 찬미가 대신 채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짧은 기도 속에 십자가와 부활의 본질, 기독교 신앙의 정수가 다 담겨 있다는 사실을, 저는 신학을 공부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방대한 그리스도교 신학과 칭의론의 역사를 단 한 마디의 기도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이 기도가 될 것입니다. “이 죄인 아무 공로 없사오나, 예수님의 이름 의지하여 기도하옵니다. 아멘.”

 

나는 내 의로움으로 구원받을 만한 공로를 쌓은 사람이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 능력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통해 죄인인 나를 의롭다 칭해 주시고, 구원받기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이 짧은 기도에 담긴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 칭의론의 요체이고, 오직 성서, 오직 은총, 오직 믿음을 부르짖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칭의론의 요체일 뿐만 아니라, 성경과 성전을 동일하게 중시하는 가톨릭교회조차 인정하는 의화론의 핵심입니다. “이 죄인 아무 공로 없사오나, 예수님의 이름 의지하여 기도하옵니다. 아멘.”

 

그런데 우리는 왜 이 기도를 잃어버린 걸까요? 그 까닭을 살펴보자면 긴 얘기가 필요하겠습니다만, 한 마디로 요약해 보자면, ‘죄인이라는 자기 정체성 안에 담긴 부정성을 거부하는 시대 문화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가치규범 대신 모든 가치와 규범이 상대화 된 채 절대성을 잃어버린 탈근대 사회의 현실 또한 이 죄인이라는 인간 존재의 실존에 관한 교회와 신학의 선언을 그대로 받들기 어렵게 만드는 한 요소가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문화적 경향성 안에 몸담고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죄로 인해 에덴에서 추방당한 아담의 후손이며,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존재라는 성서의 진실을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의 경향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 내 선함과 의로움을 통해서는 그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에 힙 입어 그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아무 공로 없이도 그분의 사랑하시는 자녀로 인정받고, 이제로부터 영원에 이르는 복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이 모든 일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죄로 인해 끊어진 모든 관계들이 회복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회와 신학은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회복하신 네 개의 관계성에 주목해 왔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무엇보다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다른 모든 관계 회복의 근원이며 시작이 되는 본질적인 관계의 회복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가 회복됨에 따라 그분이 창조하신 자연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또한 이 세계 안에 살아가는 나와 이웃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자기 소외로부터 회복되는 역사도 일어났습니다. 나 스스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내 모습,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 벌어진 간격을 어떻게든 줄여보고자 스스로를 소외시켜 온 삶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온전히 사랑하게 되는, 자기 소외로부터의 관계성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이렇듯 죄로 인해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자기와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시키시는 인류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3.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의 아침 이 놀라운 사건의 첫 번째 증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이른 새벽 주님이 계신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계셔야 할 주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놀란 마리아는 시몬 베드로와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 둘은 무덤을 향해 힘껏 달렸습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가 먼저 무덤에 도착했지만, 그는 몸을 굽혀 삼베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을 뿐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들어가나마나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거둬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도착한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 두 눈으로 직접 그분이 계시던 자리를 살피고, 마리아의 증언이 사실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와 두 제자의 이야기를 전하는 요한복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른 새벽 무덤을 찾은 마리아나, 무덤에 먼저 도착한 사랑하시던 제자나, 그리고 무덤에 들어가 직접 확인한 베드로 모두 주님께서 부활하셨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제자들의 모습을 요한은 이렇게 전합니다. “아직도 그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자기들이 있던 곳이란, 집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이 말 속에는 이전 삶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자기들이 있던 곳이란 이전에 죄에 메여 살던 삶의 자리, 주님을 만나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기 이전의 삶의 자리,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으로 새로운 존재를 향한 모든 꿈이 무너져 내린 절망의 자리로, 그들이 다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간 두 제자와 달리, 마리아만은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던 그 제자와 베드로가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간 그 자리를, 막달라 마리아는 홀로 지키고 서서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차마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는 마리아의 모습에서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그리움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마리아야!” 하고 친히 그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떠난 자리를 홀로 지키던 마리아는 거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본 것과 들은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하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실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마리아였지만, 이제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그대로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다고 생각한 그였지만, 이제 마리야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처음 생각을 버리고, 부활의 아침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신약성서는 이 일이 일어난 이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들의 체험을 계속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고전 15:6)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고전 15:17)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고전 15:20)다고 선포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고전 15:22)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독생 성자 예수님께서는, 이제 영원히 살아계시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 죄로 인해 막힌 담을 허무시는 화해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4.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부활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 부활절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이 기도, “이 죄인 아무 공로 없사오나, 예수님의 이름 의지하여 기도하옵니다. 아멘.” 하는 이 기도를 다시금 하나님께 바치는 은총의 새 아침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의 오늘은 하나님 은총과 자비의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 칭해 주시는 하나님 은총을 의지하여 오늘 부활의 이 아침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올해 부활절은 죄에서 구원받은 기쁨,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구원의 기쁨이 우리 각 사람과 우리의 가정과 교회 가운데 충만한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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