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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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과 성화

 

본문: 시편 30:1-12; 사도행전 9:1-20

설교: 홍정호 목사 (2022.5.1. 부활절 제3, 어린이주일)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하였다. 그는 그 를 믿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래서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으나, 아무도 보이지는 않으므로, 말을 못하고 멍하게 서 있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서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갔다.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런데 다마스쿠스에는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서 아나니아야!” 하고 부르시니, 아나니아가 주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곧은 길이라 부르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는 다소 사람을 찾아라. 그는 지금 기도하고 있다. 그는 환상 속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손을 얹어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보았다.” 아나니아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해를 끼쳤는지를, 나는 많은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잡아 갈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하고 말하였다.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갚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냈다. 그런 다음에 그는 곧 여러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였다.]

 

1.

 

부활절 세 번째 주일 아침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가정에 함께 하시길 빕니다. 부활의 첫 날 저녁에, 주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제자라는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외면하고 떠났지만, 주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이들을 찾아오시어 평화를 빌어주시고,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셨으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말씀하시며 보냄 받을 자격 없는 이들을 보내시며, 당신의 일꾼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부활절은, 바로 이 주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20:28)으로 만나는 영광과 기쁨의 절기입니다.

 

인생에서 이런 분이 내 곁에 계시는 것만큼 든든한 버팀목이 또 있을까요? 면목 없어 위축된 나에게 찾아오셔서 먼저 평화의 인사를 건네주시는 분,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네 마음 내가 다 안다고, 그러니 이제 다시 일어나 힘을 내라고, 손잡아 일으켜주시고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시는 그 한 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삶의 풍파 가운데에서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당신을 외면하고 떠난 제자들을 친히 찾아가신 부활하신 주님에 관한 말씀을 묵상하다 문득 한국의 기독교 사상가이자 민권운동가인 함석헌 선생님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1947년에 쓰신 이 시의 전문을 낭독해 보겠습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함석헌 선생님 시의 이 그 사람과 같은 분이 아니었을까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시인이 물었을 때 그들이라면 , 그런 분이 계십니다.” 하고 대답하지 않았을까요? “그분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자신에게는 시인이 말한 그 한 분이 계신다고, 말했을 겁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온 세상 다 나를 버려도 나를 믿는 한 사람, 모두가 할 때 가만히 아니오하는 그 한 얼굴 생각에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 그 사람을 여러분은 가지셨습니까?

 

신앙생활은 그 한 얼굴이 되시는 주님을 모시며 사는 삶이요, 우리도 다른 이에게 주님 닮은 그 한 얼굴이 되기를 바라며 사는 삶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빛을 잃은 까닭은, 그 한 얼굴을 우리 교회와 신자들 가운데서 찾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겸손하신 주님을 닮아 죄인의 친구가 되기보다는, 세상이 의롭다 여기는 사람들, 어디에서도 환영받을 이들만 환대하는 교회가 되었기에 오늘의 교회가 빛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어떤 종교학자는, 믿음의 본질은 받아들여짐의 체험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지역 출신인지, 나이는 얼마인지, 학교는 어디를 나왔는지, 직업은 뭔지, 재산은 얼마나 있는지, 정치색은 어떤지 하는 것들이 더 이상 장애물이 되지 않는 관계, 그러한 장소에서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싹틉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체험이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모습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바라기는 이제 40주년을 넘어 은총의 새날을 향해 첫 발을 내딛는 우리 교회 역시 이 받아들여짐의 체험이 넘치는 공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

 

오늘 본문은 사울의 회심을 주제로 하는 말씀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이 본문을 사울과 아나니아의 회심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보려고 합니다. 본문에는 사울 외에 한 사람이 더 등장합니다. 아나니아입니다. 사울과 아나니아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사람입니다.

 

먼저, 사울과 아나니아는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사울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 를 믿는 사람들을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올 목적으로 길을 떠난 사람입니다. 사울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면, 분노에 찬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아시아 남동쪽의 다소(tarsus) 출신인 사울은, 경건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성문화된 율법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전통들을 준수하는 바리새 가문에 속한 사람이었고, 그 자신이 경건한 유대인이었습니다.

 

사울은 당대의 바리새 지도자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한 대표적인 바리새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사울에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유대교의 율법과 가르침을 왜곡하는, 말하자면 이단에 불과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의롭고 경건한 사울에게는,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처형당한 예수라는 사람을 따르는 저들 무리는 관용이 아닌 배척의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율법을 바로 세우고, 전통을 올바르게 계승하기 위해서라면 저들 예수를 믿는 이들을 하루라도 빨리 잡아들여 더 이상 유대교의 전통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사울이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던 이유입니다.

 

반면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나니아는 사울이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려했던 그 를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에게 얼마나 많은 해를 입힌 사람인지를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9:13). 아나니아가 생각하기에 사울은 죄 없으신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대제사장의 무도한 무리에 속한 사람이요, 로마 제국의 그림자 또한 덧입혀져 있는 배척의 대상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사울과 아니니아의 관계는 적대적입니다. 한 사람은 살기를 띤 눈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살피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눈을 피해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의 길을 자기 길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다르고, 적대적인 이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기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사울과 아나니아 모두 자신이 옳다고 믿는 분명한 기준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 기준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자 애썼던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이 두 사람이 다르면서 같은이유입니다. 사울과 아나니아는 모두,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분명한 삶의 방향이 있었고, 그 확고한 기준으로 인해 사울은 분노에 차 있었고, 아나니아는 원망에 차 있었던 것입니다.

 

3.

 

사울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가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환한 빛에 둘러싸여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빛은 어둠을 밝힙니다. 보이지 않는 것도 빛이 있으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빛은 대체로 지혜, 깨달음, 계몽, 계시 등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환한 빛이 사울을 둘러 비추었지만, 오히려 사울은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빛이 눈을 밝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뜬 눈이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밝히 보이던 것들, 경건한 바리새파 전통에 속한 유대인이요,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 누구보다 밝히 진실을 본다고 자부하던 사울의 두 눈이 환한 빛 앞에서 어두워진 것입니다. 사울은 그렇게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되자 그는, 자신이 지금껏 쌓아왔던 모든 경험과 지식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절망을 체험했습니다.

 

삶에서 갑자기 찾아오는 큰 시련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정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납니다. 관념 속의 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으로 그분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젊은 신학생 시절, 저는 삶의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이런 종교적 체험을 약자들의 변명이라고 여기기도 했습니다. 연약한 사람들이나 의지할 대상을 찾아 칭얼대는 것이지, 신앙은 그런 무력감과는 거리가 먼 강한 의지와 행동이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겸손히 내어맡기는 믿음이야말로 자신에게 솔직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할 수 있는 자유만 가진 분입니까, 아니면 하지 않을 자유와 용기까지도 가진 분입니까?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은 시편 131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130:1-2) 누가 다윗을 두고 연약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억하는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그런데 그 다윗이 고백합니다.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외칩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130:3)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 오직 주님만을 내 인생의 길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강한 사람이며, 동시에 겸손한 사람입니다. 사울은 앞을 보지 못하게 되는 인생의 경험 앞에서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되었고, 방향을 돌이켜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삶을 향한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4.

 

아나니아에게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역시 사울만큼이나 올곧은 사람이었습니다. 박해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신자들을 핍박하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나니아는 주님을 길로 삼아 그 도를 따르기에 열심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이었던 만큼 아나니아는 사울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가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입힌 해악에 대해 익히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를 찾아가 그에게 손을 얹어 기도를 하라니, 아나니아는 주님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환상 가운데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지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9:15)

 

아나니아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사울을 만나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익히 들어 알고 있기에 한편으로는 두렵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하고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계획과 기대가 다 있었겠지만, 아나니아는 말씀 앞에서 그런 것들을 뒤로 한 채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이여’” 하고 말하며 기도했습니다. 사울이 원수면 원수지 어떻게 형제가 되겠습니까마는, 아나니아는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하고 말씀하셨기에,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울을 형제 사울이여하고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아나니아의 손길이 닿자 사울은 다시 보게 되었고, 일어나 세례를 받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는 이방인의 사도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의 순종이, 박해자 사울이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 바울로 거듭나는 하나님의 역사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사울과 아나니아는 모두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자신이 살아 온 삶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서 열어가시는 은총의 새날을 향해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그러나, 사울과 아나니아는 회심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이 몸담고 살아온 세계의 문화적 구심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내용이 있습니다. 사울의 회심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울의 회심은,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유대교의 전통 안에서 율법의 참된 의미를 재발견하게 되었다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가 다소 출신이고, 전통적인 바리새 가문에 사람이며,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라는 사실이 이전에는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이유가 되었지만, 회심한 이후에 바울은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참 뜻을 재발견하고, 그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활용하게 되었습니다.

 

손에 쥔 칼을 남을 해하는 데 쓰는 강도가 있는 반면, 사람을 살리는 데 쓰는 의사가 있는 것처럼, 사울은 율법과 바리새의 전통을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을 전하는 일에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회심의 의미입니다. 회심 이후에 갑자기 딴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하던 일, 몸에 벤 실천들을 다른 마음으로 하게 되는 것이 회심입니다. 늘 하던 일을 다른 목적을 가지고 하게 되고, 그 일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하게 되는 것이 회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전환이 계기가 되어, 일생을 주님을 닮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화입니다. 회심은 성화의 출발이고, 성화는 신앙의 완성을 향한 여정입니다. 

 

5.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사울과 아나니아의 회심에 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사울과 아나니아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바를 고수하며 살아온 사람이라는 점에서 같은 길을 걸어온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앞을 보지 못하는 체험을 통해, 아나니아는 순종의 체험을 통해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그 길에서 돌이켜, 주님의 뜻을 향해 돌아섰습니다. 오늘 이 회심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있기를 바랍니다. 신념이 있다는 것, 올곧은 마음으로 한 길을 걷는 삶은 칭찬받을 만한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복음, 그분의 말씀과 행적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삶의 태도보다 앞서는 것이라면, 이는 우리가 넘어야 할 언덕이 될 것입니다. 자기 의로움으로 분노에 찼던 사울이 바울이 된 것처럼, 두려움과 원망에 사로잡혔던 아나니아가 사울을 형제 사울이여하고 부르게 된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더불어 새로운 삶의 길을 만나, 그 길로 나아가는 은총을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부활의 기쁨을 안고 살아가는 부활절 세 번째 주일에, 부활하신 주님의 평강이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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