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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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할 때

 

본문: 시편 148:1-14; 요한복음 13:31-35

설교: 홍정호 목사 (2022.5.15. 부활절 제5)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하실 것이다. 어린 자녀들아, 아직 잠시 동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하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나는 너희에게도 말하여 둔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부활절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만나는 복음의 말씀은 요한복음 13장의 새 계명을 주신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때를 아셨다는 증언으로 시작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13:1)

 

한국의 기독교 사상가이자 평화 운동가이셨던 함석헌 선생님은, 마음이 심란해 질 때면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까지의 말씀을 읽곤 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앞에 서서 자기를 되돌아보면, 들떠 있던 마음이 고요해지고, 분노와 절망이 사라지곤 하셨다고 합니다. 함석헌 선생님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우리는 모두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말씀은 라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한계를 넘어 더 크신 분과, 더 높으신 분의 시선과 우리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만나는 사람은, 내가 경험하는 세계,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보는 세상의 한계를 넘어, 저 너머의 초월적 지평과 만나는 신비를 체험합니다.

 

우리 예배 중에 성가대 찬양 시간을 임시로 대체해서 부르고 있는 찬송가가 있죠. 찬송가299하나님 사랑은이라는 찬송입니다. 조금 전에 불렀지만, 다시 한 번 가사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 사랑은 온전한 참사랑/ 내 맘에 부어 주시사 충만케 하소서./ 2. 내 주님 참사랑 햇빛과 같으니/ 그 사랑 내게 비추사 뜨겁게 하소서./ 3. 그 사랑 앞에는 풍파도 그치며/ 어두운 밤도 환하니 그 힘이 크도다./ 4. 하나님 사랑은 온전한 참사랑/ 내 맘과 영에 채우사 새 힘을 주소서. 아멘./

 

여러분 모두 좋아하는 찬송, 여러분의 삶의 고백이 담긴 찬송이 있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찬송을 부를 때 새 힘이 돋는 은혜를 체험하십니까? 저는 이 찬송을 참 좋아합니다. 평소에도 즐겨 부르지만, 가끔 지치고 힘든 일이 있을 때, ‘라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 예수님 닮은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일이 버겁게 느껴질 때, 저는 아주 작정하고 이 찬송을 반복해서 부르곤 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타인을 보는 시선, 사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새 힘이 돋아나는 은혜를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하나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되새기며 말씀 앞에 제 자신을 세우기 때문일 겁니다.

 

온전한 참 사랑이신 그분 사랑의 빛으로 나를 비춰 주시고, 그 사랑으로 내 마음과 영을 가득 채워 주셔서, 차가워진 마음을 다시금 뜨겁게 해 주시고, 거센 풍파를 잠잠케 해 주시고, 그래서 어두운 밤도 환하게 되는 은총을 허락해 주시기를, 이 찬송을 부르는 동안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고 말씀 위에 선 찬송과 기도는, 우리의 심령에 새 힘을 주고, 우리를 회복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송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이 불어넣어주시는 생명의 힘으로 충만케 되는 오늘 부활절 다섯 번째 주일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

 

오늘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들고 계시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면서, 가룟 유다의 회개를 은근히 촉구하셨습니다. 유다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만찬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유다를 향해서 다 알고 있어. 이제라도 그 마음을 돌이키어라.’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신 겁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이 건네주신 빵 조각을 받고 나서는,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끝내 돌이키지 않고 파멸을 향해 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유다가 떠나가자 예수님께서는,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야 할 때가 가까이 왔음을 이렇게 표현하신 겁니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셨다고 과거 시제로 말씀을 하셨다는 점입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하지 않으시고, ‘영광을 받으셨다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일로 전제하시고 말씀하신 겁니다.

 

마가복음 1124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으로 드리는 기초에 대해 가르쳐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11:24) 기도하고 구하는 것이 있다면,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이루어 주실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이루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니시면 말고요,’ 이렇게 기도하지 말고, ‘주님, 이루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응답 주심에 감사합니다. 이미 이루어 주신 줄 믿고 기도드립니다.’ 이렇게 바치는 기도가 믿음의 기도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으로 바치는 기도에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자기 욕망을 따라 구하지 말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빼고 받은 줄로 믿습니다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주무르려는 우상숭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바치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는, 자기 욕망을 거슬러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할 때 이미 이루어진 줄 믿고기도하고, 용기내어 그 일을 실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을 두고 기도할 때, 내 자존심을 거슬러 올바른 일을 따라야 할 때, 내 욕심을 덜어내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자 할 때, 그 때 우리는 이미 받은 줄 믿고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서는, 자기를 거슬러 더 크신 분의 뜻과 하나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는 게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88절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죽음 앞에서도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셨다하고 과거 시제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영광을 받으신 줄 믿고, 믿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모범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하고, 이미 이루어 주신 줄 믿는 믿음으로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3.

 

유다가 떠난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유월절 만찬 자리에 모임 제자들은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뜻밖입니다. 새 계명이란 서로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라는 이 말씀이 왜 새 계명이지? 이웃을 사랑하라는 건 모세의 계명이고,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계명인데, 왜 새 계명이라고 하셨지?’ 이런 궁금증이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레위기 191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19:18) 예수님과 제자들은 모세를 통해 주신 이 가르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몸소 이 가르침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새 계명이라고 하셨을까요?

 

이어서 나오는 말씀에 새 계명에 담긴 의미가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모세의 가르침을 알고 있지만, 그건 이미 말뿐인 가르침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모세의 이웃 사랑의 가르침을 다 알고 있었지만, 다 안다는 그 생각 때문에, 오랫동안 듣고 익숙한 가르침이라는 그 생각 때문에, 오히려 이 가르침 속에 담긴 참뜻을 생각하지 못했고,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굳어져 버린 율법에 생기를 불어넣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본문 33절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어린 자녀들아이렇게 부르셨습니다. 이 낱말은 테크니온’(τεκνίον)이라는 낱말에서 온 테크니아의 번역어인데, 이 낱말은, 스승이 깊이 사랑하는 제자를 다정하게 부르는 애칭입니다. 새번역에서 어린 자녀들아그랬는데, 구어체로 쓰면 얘들아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얘들아다정하게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얘들아, 모세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던 말 기억하지? 그런데, 얘들아, 너희들이 지난 3년간 나랑 다니면서 내가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지 눈으로 보지 않았니? 내가 사람 차별하지 않고, 오히려 약한 사람 편이 되어 주고, 소외된 사람들 먼저 찾아가서 말을 건네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너희들 곁에서 지켜봤지? 그래서 말하는 거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서로 사랑해야 해. 그러면 사람들이 그때 가서 알게 될거야.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될 거야.’

 

서로 사랑하여라하는 말씀이 새 계명인 이유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기준이 이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율법이 아닙니다. 율법이 말하는 사랑의 기준은 이미 제자들의 삶 속에 규범으로 잘 자리 잡고 있습니다. 율법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율법이 무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모세의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한계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이웃을 환대하더라도, 내 이웃과 이웃이 아닌 자를 나누는 경계가 분명한 환대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029절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에게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10:29) 하고 물었습니다. 율법이 적용되어야 할 이웃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나누는 것이 사랑의 전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새 계명은, 이런 율법을 따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경계선을 지우는 사랑입니다. 유대사람과 사마리아사람 사이에 놓인 경계선, 하늘의 사람과 땅의 사람 사이에 놓인 경계선, 나와 너 사이에 그어 놓은 경계선을 지우고, 더 크신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모범을 보여주신 조건 없는 사랑, 차별 없는 사랑, 경계 없는 사랑, 그리고 자기를 먼저 낮추는 섬기는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새 계명에 담긴 의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면, 일방적으로 누구는 사랑을 주고, 누구는 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이다말씀하셨습니다.

 

4.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란 이 새 계명을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는 배움터입니다. 교회 온다고 해서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겠지요. 교회 오래 다녀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 기도와 찬송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배우게 되고, 그 사랑으로 타인을 대하는 법을 점차 배워 나갑니다. 원래의 나 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타인의 처지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고, 원수와 같은 적대적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긍휼한 마음으로 보게 되는 사랑을 점차 배워 나갑니다. 사랑을 배워나가는 과정이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렵게 한 걸음 내딛었는데, 뒤로 몇 걸음 후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오늘 이 예배를 통해 복음의 말씀을 듣고 새기는 것처럼, 말씀이 우리 삶에 스며들면,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세대를 거듭할수록 예수님 닮은 믿음의 사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갈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들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인습에 의한 사랑이 아닙니다. 규정된 틀 안에서만 사랑하라는 가르침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하는 것이 주님 주신 새 계명입니다. 이 말씀 붙잡고, 한 주간도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새 계명을 실천하는 사랑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든 교우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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