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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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걸어갔다

 

본문: 시편 67:1-7; 요한복음 5:1-9

설교: 김준영 전도사 (2022.5.22. 부활절 제6주, 웨슬리회심기념주일)

 

1. 평화의 인사

 

주님의 평화와 은총이 신반포 교우 모두와 함께하시길 빕니다. 어제는 여름 기운이 든다는 소만이었습니다. 교회 곳곳에도 여름 맞이가 한창입니다. 에어컨을 손보고, 방마다 선풍기를 둡니다. 친교실 나무들도 더 푸르게 자라면 좋겠습니다. 다가올 여름에 우리가 마주할 순간들을 기대해봅니다. 창세기부터 차근히 성경 공부도 시작하고, 익숙하지만 잘 모르는 신앙 공부들도 이어질 것입니다. 아이들과의 여름성경학교도 기대되고요. 어떤 일들이 우리 사이에 다가오고, 벌어질지 다는 모르지만 이번 여름에 한 가지씩 결단할 마음가짐이 있으면 어떨까요?

 

오랫동안 곁에 두고 읽는 시집을 간만에 꺼내 읽다가 “관찰하는 사람이 되자"는 마음가짐을 이번 여름의 지향을 삼아봤습니다. 이런 시입니다.

 

마종하, <딸을 위한 시>

한 시인이 어린 딸에게 말했다.

'착한 사람도, 공부 잘하는 사람도 다 말고

관찰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겨울 창가의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

사람들은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

오늘은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안 싸온 아이가 

누구인지 살펴서함께 나누어 먹기도 하라고.’

 

예측하고, 계획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곧 덮칠 무더위 가운데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은 “관찰하는 마음” 아닌지 질문해봅니다. 교회에 처음 와서 두 달 동안 교회 구석구석을 살펴봤습니다. 친교실에 차곡차곡 정리된 그릇부터 옷 없이 걸려있는 무수한 옷걸이들, 켜켜이 꽂혀진 성가대 파일과 악보집, 창고에 들어찬 옛 흔적들까지, 대부분의 옷장과 서랍을 열어제끼니 어렴풋하게나마 이 교회에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손길의 흔적을 따라 여러분이 이 공간을 어떻게 누리고, 써왔는지를 봐서일까요? 여름엔 여러분을 더 많이, 더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관찰하는 시선"이 필요한 곳이 여기 뿐만은 아닐 겁니다. 누군가 들여다보지 않으면 에어컨은 커녕 선풍기를 꺼낼 수도 없는 사람들, 가뭄과 홍수가 두려운 존재들, 지속되는 전쟁에 미처 바뀐 계절을 대비하지 못한 이들, 기후 위기가 빚은 폭염과 한파에 괴로워할 생태계까지 우리가 살피고, 들여다봐야 할 곳이 참 많습니다. 바라기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올여름을 보내시던지 먼저는 주님께 묻고, 구하며 그분의 마음을 닮아 여름을 잘 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 벳세다 연못

 

히브리 말로 “베드자다", 흔히 “베데스다"로 불리는 연못은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약 100m의 길이와 60m 정도의 넓이의 못입니다. 요한 복음서에 소개된 이 못은 빗물을 모아 저수지 역할을 했던 장소였습니다. 흥미롭게도 그 역할 이외에도 이 못은 당시 고대 예루살렘에서 신통한 장소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베데스다 못 바닥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샘물의 파동 현상을 보면서, 그 물의 움직임에 “치유 효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4절은 그 현상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을 때 직후에 맨 먼저 그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다.”

 

많은 병자들이 베데스다 못 주위에 둘러 앉아 있습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물결의 흔들림 후에 가장 먼저 들어가기 위해 거기 걸터앉아 기다렸던 것이겠죠..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그 움직임을 느낀다고 제대로 그 못에 들어갈 확률은 희박한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손발이 불편해서, 보이지 않아서 누군가를 제치고 못에 들어가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삼십팔 년 동안 병을 앓던 한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팔다리를 못 썼던지 물이 움직여도 못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루 종일 베데스다 연못가에 머물러 있지만, 그 못에 들어가는 건 그림의 떡입니다. 그의 하루는 어떠했을까요? 몸이 성하지 않으니 마냥 누워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한탄과 푸념이 교차한 채로 하루를 마감하지 않았을까요? 매일 그렇게 누워있으니 누군가 넣어주기를 바라면서도 그것이 희박한 기대라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선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에 그 사람이 투덜댑니다.

“주여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를 제치고 못에 들어갈 겁니다.”

그 다음 대목이 흥미롭습니다. “네가 앉아 있는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어떠한 조건도, 이유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네가 앉은 곳에서 일어나 걸어가라!”

 

3. 그는 걸어갔다

그 행간에 어떤 상황이 그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요한은 이 대목을 아주 간결하게 전합니다.

8-9절의 부분입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

예수님은 “걸으라”고 말씀하셨고, 병자는 걸었습니다. 그간 내뱉었던 한탄과 푸념이 무색합니다. “누가 못으로 나를 밀어줄 것이냐?”, “내 인생은 끝났다.”, “하루하루 그저 기적을 바라며 베데스다에 누워 있을 뿐이다.”라고 자신을 뒤덮던 자포자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는 걸어갔습니다. 그동안 자신을 꽉 잡고 있던 중력을 거슬러 일어서니 일어서지고, 발을 떼어 앞으로 내딛으니 다리에 힘이 실립니다.

 

4. 관찰하시는 예수님

앞서 나눈 시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오늘은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안 싸온 아이가 누구인지 살펴서 함께 나누어 먹기도 하라고.” 참 푸근하고 따뜻한 문장입니다. 지금 아이들에게 들려주면 “우린 급식 먹는대요?”, “도시락은 편의점가서 사먹어야죠.”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이 시가 잘 와 닿을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예수님이 병자에게 다가가셨던 그 장면이 시의 대목과 포개어집니다.

 

예수님의 관찰력과 그로부터 시작되는 여러 사건들은 늘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자아냅니다. 때론 그 놀라운 사건이 사람들의 분노와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대관절 예수님은 훌륭한 관찰꾼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병자뿐만 아니라 복음서 곳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시야에 포착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들 아실 겁니다. 사마리아와 수로보니게에서 온 여자, 삭개오, 베드로 등 한번이라도 그분의 관찰 레이더에 포착된 사람들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거나 역전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이제 도망치려고 잰걸음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쫓기듯 떠밀려 질질 끌려가지 않습니다. 향방을 모른 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필요도, 숨어 살 이유도 없습니다. 자신들의 삶을 오롯이 뒤엎으신 예수님을 따라 살겠다고 고백하며 그분을 따라갈 뿐입니다.

 

5. 웨슬리를 통해 드러난 베데스다

 

오늘은 부활절 6주이면서 동시에 웨슬리회심기념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감리교의 초석이자 소중한 자랑인 요한 웨슬리의 회심사건은 오늘날까지 우리가 견실하게 이어받은 신앙 유산입니다. 1738년 5월 24일 영국 런던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열린 집회에서 웨슬리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체험을 합니다.

 

“I felt my heart strangely warmed.”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의 회심, 찰나였지만 그 돌이킴이 촉발시킨 메도디스트 운동은 교회를 넘어서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여러모로 황폐화된 영국의 사회 전역에 영향을 선한 영향을 끼쳤고, 그 파급력은 유럽 전역과 아메리카 대륙, 그리고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웨슬리의 삶도 베데스다에 몰려 있던 무리들의 처지와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웨슬리는 태어나서부터 철저한 경건 훈련과 실천으로 다져왔던 신앙 근육이 있었음에도 그는 자주 그의 사역 현장에서 결핍을 느꼈다고 합니다. 엎친데덮친 격으로 그의 삶은 늘 기대와 계획에서 번번이 빗겨갔습니다. 실패와 거절, 포기가 반복되었고, 그런 삶은 그를 철저히 무너뜨리고 있었습니다. 미국 조지아주 선교의 실패,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더 그를 나락으로 빠뜨렸습니다.

 

베데스다 못 주위의 사람들과 웨슬리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 저변에 깔린 막연함과 두려움, 조급함입니다. 웨슬리의 회심 전 기록에는 종종 그가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미국 선교 실패 후 영국으로 돌아오던 배에서 만난 풍랑 앞에서도 그는 몹시 두려워하고 공포에 압도되는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베데스다 못에 몰려든 사람들도 그 못의 효험 때문에 거기 있지만 큰 기대를 하고 거기에 있진 않습니다. 아무리 가까이에 있어도 내가 못 들어가면 끝입니다.

 

두 번째는 그럼에도 이들은 모두 다 꾸준하고 철저했습니다. 매일 베데스다 못에 나오는 꾸준함, 매일 경건 훈련을 하는 철저함. 그런데 오늘 말씀과 웨슬리의 이야기는 그런 철저함과 간절함을 넘어서는 주님의 인도에 방점을 찍습니다.

 

6. 값없이 주시는 은총

 

꾸준하게 철저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삶의 원칙을 세웠는데 그 통로로 오시지 않는 주님께 항변하고 싶기도 합니다. “허무합니다. 이거면 충분했습니까?”

 

감리교 신학에서 큰 축을 이루는 개념은 “은총"입니다. 웨슬리는 이 “은총"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값없는 행위"라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대가나 행위도 요구하거나 바라지 않으시고, 온전히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질문에 응답"할 가능성을 주시는 힘이 바로 이 “은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은총이란 우리의 행위와 실을 뛰어넘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처럼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약 1:5) 선물, 베드로 사도의 고백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알고 계심을 따라 택하심을 받게"(벧전 1:2)되는 선물로만이 우리는 진정 우리의 신앙과 삶을 깨울 수 있습니다.

 

7. 제자로 살아가기 위한 성장

 

여러분은 만약 주님께서 아무리 생각해도 일어나 걸을 수 없는 상황에서 “걸어가라"하실 때,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말에 순명하실 수 있으실까요? 그 말에 일말의 의심이나 토를 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 교회는 기독교 신앙을 다종교적이고 급변하는 이 땅에 토착화하기 위하여 양적 팽창보다 제자직 수행에 의한 질적 성장에 역점을 둔다. _ 신반포 감리교회 헌장 2항

 

우리 교회 헌장 2항은 우리에게 “제자직 수행에 의한 질적 성장에 역점을 두라"고 선포합니다. 여러 구체적인 실천 요소들이 있겠지만, 제자직 수행의 선행 조건은 분명하게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입니다.

 

만약 우리의 역점이 이 “신뢰와 믿음”에 터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전통을 과감히 깨서라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당신을 내어주셨다”는 고백에 터한 “믿음"의 제자도로의 변혁이 요구됩니다.

 

오늘 본문을 정리하면 단순합니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걸어라!”, “정리하고 걸었다.”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 “그길로 삶의 방향을 바꾸어 걸었다.”

 

어쩌면 이 두 문장 모두 행간에 숨겨진 맥락이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정말 “걸으라”하니, “걸어간 것 뿐"이고, 로마서 서문을 읽다가 이상하게도 뜨거워지는 마음에 이끌려 그동안 자신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진실한 고백을 했던 웨슬리의 경우도 그렇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은 오늘 이렇게 예기치 않은 상황과 순간에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매력적이지만 막연하고, 화려하지만 공허한 일에 우리  삶을 맡기고 있지는 않은가요? 거기에서 한 발자국도 못 떼고 오도가도 못하고 있지는 않나요?

 

주님은 그런 우리를 살펴보시며 우리가 당신의 은총 가운데 삶을 돌이키길 요청하십니다. 더불어 그 경험 위에 다른 이들에게 그 은총의 삶을 증언하는 제자들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압니다. 여전히 제자의 깜냥 보다 날마다 방황하고,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겐 단호하게 그런 삶을 훌훌 털고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말해주시는 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다행입니다.

 

주님께 삶을 드려 신앙을 증언하는 사람들,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주님을 드러내는 사람들, 오늘도 여전히 주님은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가 어디에 있든지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걸어라.”

 

주님께서 우리의 걸음에 힘을 불어넣으실 때 토씨 하나 달지 않고, 깔고 앉은 자리를 걷어가지고 걸어가는 용기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소망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그 힘으로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 땅에서, 이 길에서 씩씩하게, 당당하게, 동시에 겸손하게 뚜벅뚜벅 걷는 주님의 제자로 세워져 갑시다.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믿음으로 일어나 걸어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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