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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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과 실행

 

본문: 시편 8:1-9; 요한복음 16:12-15

설교: 홍정호 목사 (2022.6.12. 성령강림 후 제1, 삼위일체주일)

 

[아직도,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 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또 그는 나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그가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다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이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첫 번째 주일이며,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을 고백하는 삼위일체주일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믿음 위에 세워진 종교입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 예수님이시고, 성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 승천하시어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이 세 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한 분이시면서 동시에 세 분이시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삼위일체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성자 예수님께서 하셨고, 성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이제 성령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어떻게 한 분 하나님이신지에 대한 교리적 해설은 신학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지금까지도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다양하고도 새로운 해석들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삼위일체 교리를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당신에 대해 궁금한 걸 물어보시기 위해 천국에 오기를 기다리셨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박식했던 교회 박사 토마스 아퀴나스 조차도 삼위일체론에 대한 완벽한 해설에는 실패했다고 합니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담고 있는 동시에, 인간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에 관한 최대치를 담고 있는 신학 교리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은,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실체로서 서로 구분되시지만, 태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함께 하시는 한 분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오래된 신학 언어입니다.

 

2.

 

과거에는 세상에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습니다. 교회와 신학이 신비라는 말 속으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을 성급히 우겨넣어 버린다는 생각에, 그런 낱말들의 사용을 일부러 기피한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태도는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소중한 교회의 전통 언어들이 빛바랜 관용어로 전락해 버린 시대에, 잃어버린 말들에 생명력을 더하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또한 올바른 믿음을 위해서는 올바른 질문이 선행되어야 함도 마땅한 일입니다. 질문에 대해 답이 되지 않는 말을 억지로 믿을 수는 없고, 그럴 필요는 더더욱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을 긍정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언젠가부터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때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반대로 생각합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저를 모든 일에 정답을 지닌 사람이 아닌 질문하는 사람의 자리에 계속 서 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나중에서야, 레비나스라는 프랑스의 유대인 철학자의 사상을 조금 접하고 나서야, 저는 이런 태도를 일컬어, ‘타자의 부름 앞에 선다라고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돌아보면, 신학교에 가겠다고 마음먹었던 시절이 제가 하나님에 대해 가장 많은 것들을 알고있던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꽤 확신에 찼던 시절이었습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하면서 찬송을 부를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런 시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만, 지나 온 시간을 돌이켜본다면, 하나님에 대한 앎은 작아지고, 그 자리를 알 수 없는 분에 대한 믿음으로 채워 온 시간이 아니었나, 감히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는데, 바로 말씀을 경청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사실, 말씀을 듣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내가 잘 안다는 생각입니다. 그거 예전에 들어서 다 안다, 옛날에 이미 다 했다, 하는 생각입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경험과 연륜이 어느 정도 쌓이면, 누구나 이런 유혹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그런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인간관계에서는 물론 배움을 통한 성장에 있어서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과거에 발목이 붙잡힌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교만이 우리의 눈과 귀를 어둡게 만드는 것입니다. 새로운 길이 눈앞에 있지만, 다가오는 은총의 새날을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의 말에도 눈과 귀를 막음으로써 그들의 애정 어린 조언조차도 도전과 장애물로 여기게 만드는 어리석음을 스스로 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최근 오경 성경공부를 준비하면서 글로 자주 만나는 분이 있습니다. 조나단 섹스Jonathan Sacks라는 유대인 랍비입니다. 그분이 말씀하길, 과거와 함께 살아가는 것(living with the past)과 과거 안에 사는 것(living in the past)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계절에 따라 일년 내내 오경의 말씀을 읽습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데 있어 유대인들만큼 철저한 사람들이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랍비 조나단 섹스는 말하길, 유대인들이 일년 내내 오경을 읽으며 과거를 그토록 철저히 기억하는 것은, 다가오는 앞날을 위해서지 지나간 과거를 위해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컨대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과거에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으니 이집트 사람들이 한 일을 잊지 말고 언젠가 복수하자고 출애굽기를 읽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시절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저들 이집트 사람들처럼 낯선 이들을 억압하는 사람으로 살지 말자는 교훈을 미래를 후대에 계승하기 위해 지나간 일들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겪었으니, 남에게는 그렇게 하지 말자는 교훈을 되새기기 위해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랍비 조나단 섹스가 말하는 과거 안에살지 않고, ‘과거와 함께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말씀을 경청하고, 경청한 말씀을 바탕으로 더 나은 내일을 향해 실행에 나서는 삶의 방식입니다.

 

3.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이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하시고.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제자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방식에 대해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 주실 것이요,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오늘 주목할 부분은,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일러 주신다하신 말씀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분입니다. 주님은, 성령이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16:1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께 받은 것을 전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그분은, 아버지께 받은 것을 전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다 나의 것이다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당신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와 하나이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또 어떻습니까? 그분은 성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아드님을 통해 당신의 뜻을 세상에 펼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렇듯 구분이 되지만,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고, 한 분이신 하나님의 뜻을 펼쳐 보여주시는 서로 다른 세 위격을 나타냅니다. 성자 예수님과 보혜사 성령님은 모두 아버지의 뜻을 전하시되,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로부터 들으신바 진리의 말씀을 전달해 주시는 분입니다.

 

<국화와 칼>이라는 책을 저술한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라는 인류학자가 있습니다.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2차 세계 대전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던 시기에 일본의 문화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국화와 칼>이라는 책을 통해 서구 세계에 알리면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인물입니다. 루스 베네딕트는, 수치심의 문화와 죄의식의 문화 사이의 차이에 대해 말합니다. 수치심은, 자신이 타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스스로 느끼는 감정인 반면, 죄의식은 자기 양심이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수치심의 문화에서는 (남들에게 인정을 받는) 명예가 최고의 가치인 반면, 죄의식의 문화에서는 (자기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는) 의로움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집니다. 달리 말하면, 수치심은 타인 지향적 감정이고, 죄의식은 자신의 내면성에 따른 감정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의 문화를 내면 깊이 관찰하고자 했습니다.

 

수치심과 죄의식의 문화에는 각각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수치심의 문화에 속한 이들은, 자신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가를 계속해서 의식하면서,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기도 하고, 또 그런 시선을 피해 보이지 않는 곳에 있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한 눈의 문화’(culture of the eye)가 수치심 문화의 특징입니다. 반면 죄의식의 문화는,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기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귀의 문화’(culture of the ear)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남의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상관없이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내면의 기준으로 자리 잡고 스스로의 가치를 판단하도록 만드는 기준이 됩니다.

 

4.

 

구약성경의 가장 유명한 명령은, “이스라엘아 들으라”(Shema Yisrael)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4-5) 하는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랍비 조나단 섹스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모세, 예언자들이 당시의 사람들과 달랐던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들이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들 내면에 들려주시는 음성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그 시대를 거슬러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스라엘 믿음의 선조들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귀 기울여 경청하고, 경청한 말씀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 전체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나아가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구약성서가 전하는 믿음의 조상들이 이야기입니다.

 

오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일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은,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영이 눈에 보이는 분입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고, 들리는 분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시지는 않지만,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자 할 때 그 음성을 들려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해 주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눈은 감을 수 있지만, 귀는 닫을 수 없습니다. 눈을 감아도 귀는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귀가 항상 열려있다고 해도, 말씀은 귀를 기울여 듣지 않으면, 경청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귀를 기울여 듣는 마음의 태도, 즉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경청하고자 하는 사람만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내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시편의 시인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107:9)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5.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령강림 후 첫 번째 주일이자 삼위일체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바라기는 성령강림절기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사모하는 심령을 부어주시고, 말씀을 경청함으로 우리의 삶이 말씀으로 새롭게 되는 은혜를 체험케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생활은 말씀의 경청과 실행의 반복입니다. 듣고 행하고, 듣고 행하는 단순한 반복을 통해 우리 인간됨의 거칠고 모난 부분들이 깎여 나가고, 하나님께서 귀히 사용하실 그릇이 되어가는 긴 여정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던 말들, 세상의 경험과 지혜를 따라 진리인 양 하던 말들을 그치고,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말씀을 실행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덧입게 될 줄 믿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성령과 함께, 성령 안에서 경청과 실행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며, 생명의 말씀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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