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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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네게 하신 일을

 

본문: 이사야 65:1-9; 누가복음 8:26-39

설교: 홍정호 목사 (2022.6.19. 성령강림 후 제2)

 

[그들은 갈릴리 맞은 편에 있는 거라사 지방에 닿았다. 예수께서 뭍에 내리시니, 그 마을 출신으로서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예수를 만났다. 그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은 채, 집에서 살지 않고, 무덤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가 예수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서, 그 앞에 엎드려서, 큰 소리로 말하였다. “더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이미 악한 귀신더러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귀신이 여러 번 그 사람을 붙잡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어서 감시하였으나, 그는 그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서 광야로 뛰쳐나가곤 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대답하였다. “군대입니다.” 많은 귀신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귀신들은 자기들을 지옥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마침 그 곳 산기슭에, 놓아 기르는 큰 돼지 떼가 있었다. 귀신들은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허락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니,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 돼지 떼는 비탈을 내리달아서 호수에 빠져서 죽었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이 일을 보고, 도망가서 읍내와 촌에 알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일어난 그 일을 보러 나왔다. 그들은 예수께로 와서, 귀신들이 나가버린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들어서 예수의 발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들이, 귀신 들렸던 사람이 어떻게 해서 낫게 되었는가를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거라사 주위의 고을 주민들은 모두 예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 되돌아가시는데, 귀신이 나간 그 사람이 예수와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예수께서는 그를 돌려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네게 하신 일을 다 이야기하여라.” 그 사람이 떠나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낱낱이 온 읍내에 알렸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복음 말씀은,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맞은 편으로 건너가는 이유에 대해서는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저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하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예수님 일행은 뜻밖의 풍랑을 만났습니다. 길을 떠나자고 하신 예수님은 태평하게 주무시고 계시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풍랑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하고 꾸짖음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을 겪은 후 도착한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의 무대인 갈릴리 맞은 편에 있는 거라사 지방입니다. 예수님은 이 거라사에 오시려고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장소는 밝혀졌지만, 왜 이곳에 오시려고 했는지, 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절반의 궁금증을 안고 예수님과 동행합니다.

 

2.

 

본문을 보니, 거라사 지방에서 돼지를 키운 모양입니다. 돼지 떼가 비탈을 내리달아서 호수에 빠져 죽는 일이 있었고, 이 일을 본 돼지를 치던 사람들의 반응이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부정한 동물입니다. 키워서도 안 되고, 먹어서는 더더욱 안 되는 동물입니다. 거라사 지방에서 돼지를 키웠다는 것은, 이곳이 유대 땅이 아닌 이방인의 땅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곳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거하는 거룩한 땅이 아니라, 구원의 약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방인들이 살아가는 장소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풍랑을 뚫고,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찾아 온 곳은, 돼지를 키우는 이방인들의 땅,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부정하다 여기는 사람들이 살던 낯선 이방인들의 땅입니다.

 

여기서 잠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 마가, 누가 모두가 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누가는 오늘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갈릴리 맞은 편에 있는 거라사 지방이라고 말하고 있고, 마가 역시 바다 건너편 거라사 사람들의 지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내용을 전하는 마태복음에서는 이곳을 건너편 가다라 사람들의 지역’(8:28)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거라사, 혹은 가다라 지역이 같은 장소를 말하는 것인지, 각기 다른 장소를 지칭하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다만, 성서학자들은 이 지역이 갈릴리 호수로부터 최소 10km 이상 멀리 떨어진 요르단 지역의 10개 도시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큰 돼지 떼를 기르는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는 경제규모를 고려할 때 그렇다는 추측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는 거라사 혹은 가다라 지역은, 돼지 떼가 내리달려서 호수에 빠져 죽는 것이 불가능한 거리에 있는 지역들이라는 말입니다. 돼지가 10km를 내리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부 오리게네스는 이 본문이 일어난 장소를 호수 동쪽 물가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인 겔게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 되면, “거의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5:13)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마가복음의 증언과 배치됩니다. 이천 마리 가까운 돼지 떼를 기를 정도의 인구와 시설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작은 마을 겔게사에서는 이런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거라사가다라, 혹은 겔게사든 어떤 지역이든지 돼지 떼가 내리달려 한꺼번에 빠져 죽었다는 증언은 역사적 사실로서의 신빙성을 의심받습니다. 그런데도 왜 복음서는 모두 이 이야기를 동일하게 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복음서 이야기의 초점은, 정확한 장소를 전하는 지리적 정보 전달에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복음서는 거라사가 어디인지에 대해 관심을 두기 보다는, 거라사가 어떤장소였는지에 대해 말합니다. 거라사는 어떤장소였습니까? 약속의 자녀인 유대인들이 아닌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살아가는 지역이었고, 더욱이 그들의 생계수단은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긴 돼지를 키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을 몸소 찾아가셨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거센 바람과 성난 물결을 뚫고, 죽음의 위기를 건너 이곳 이방인들의 땅을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복음서는, 거라사가 바로 이런 이방인들의 거주지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외된 이들의 땅, 부정하다 여김 받는 이들의 땅을 친히 찾아오셨다는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등장한 무대가 바로 거라사인 것입니다.

 

3.

 

, 이제 장소에 대한 의문은 해결이 됐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지가 부정한 이방인들의 땅 거라사였다는 사실은 밝혀졌습니다. 이제 남은 질문은, 그러면 왜 이곳에 찾아오셨나,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는 오늘의 장면을 전한 이후에 거라사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런 증언도 하지 않은 채 예수님께서 다시 돌아오셨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단 하나의 사건을 위해서 예수님은 풍랑을 뚫고 거라사로 가셨다는 말이 됩니다. 그 단 하나의 사건은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의 핵심인,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일입니다. 주님은, 거라사 지방에 사는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기 위해 그곳에 가셨습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해치고 있는 그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그곳 거라사에 방문하신 것입니다. 누가는 이 장면을 지체 없이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뭍에 내리시니, 그 마을 출신으로서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누가는 그가 그 마을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우선 언급합니다.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귀신이 들려 지금 이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누가는 귀신 들린 상황에 이른 이 사람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전합니다.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은 채 지냈다는 것, 집에서 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무덤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옷은 신체를 주변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대략적으로 드러내 주는 일종의 문화적 기호역할을 해 오고 있습니다. 패션이 거대한 산업이 된 오늘날도 그렇습니다만, 훨씬 이전부터 의복은 그 옷을 입은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을 드러내는 기표signifier로 작용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옷이 없다?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은 채 지냈다? 그것은 옷을 입고 있는 것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해 줍니다. 그가 그 사회에서 어떤 자리/위치도 갖지 못하는 추방된 존재, 이른바 정상적인 사람들의 궤도 바깥을 떠도는 잉여적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줍니다. 어떤 옷이라도 걸치고 있어야 그가 누구인지 가늠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에게는 이런 옷 자체가 아예 없었습니다. 게다가 오랫동안 그러했다는 건, 이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이 이미 고착된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은 채 지냈다는 것은, 그가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자기 스스로도 돌이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내버린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둘째로, 이 사람은 집에 살지 않습니다. 살 수 없었다는 말이 이 사람의 처지를 나타내주는 더 정확한 표현이겠습니다. 왜냐하면 29절에 보니까, “사람들이 그를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어서 감시하였으나, 그는 그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서 광야로 뛰쳐나가곤 하였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마을 출신이지만, 더 이상 이 마을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아갈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 사람은 낯선 곳에서 온 나그네가 아닌 그 마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왜 고향 사람들과 어울려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었던 것일까요? 무엇이 이 사람을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걸까요? 복음서는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추측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 하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30절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름을 묻는다는 건 정체성을 묻는다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군대입니다.” 누가는 많은 귀신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충 설명합니다. 여기서 군대는 헬라어 레기온’(legion)의 번역입니다. ‘레기온은 대략 6,000명 규모의 로마 군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레기온은 나중에 어떤 지방’, ‘지역을 뜻하는 영어 리전’(region)의 어원이 된 낱말이기도 합니다. 6,000 여 명의 거대한 로마 군단을 뜻하는 레기온, 그런 큰 군단이 거하는 장소를 뜻하는 리전이 된 것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신 예수님의 질문에, “레기온입니다.”하고 대답한 이 사람의 말은, 그가 겪고 있는 이 큰 아픔이, 로마 군대의 폭력과 연관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에 의해, 소중한 사람들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는 큰 상실과 아픔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버티고 버티던 마음이 그만 깨지고 만 것이겠죠. 그리고 조각난 마음은, 자기와 타인에게 상처를 내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이 사람을 계속 곁에 두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랬다가는 이 정신 나간 사람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모르니, 이 사람 때문에 로마 군대로부터 화를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겠죠. 어쩌면 이런 연유로, 이 사람은, 마을 공동체로부터 추방되다시피 하여 외딴 곳에서 홀로 지내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셋째로, 이 사람은 무덤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산 사람이지만, 죽은 자들의 장소에 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27절은,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하고 말합니다. 사람(아다마)이란 어떤 존재인가? 땅의 흙(아파르)과 생명의 기운(니쉬마)가 하나가 되어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어넣어주시는 생명의 기운에 의해서 몸과 영이 온전히 하나가 되고, 물질과 정신이 온전한 통합을 이룰 때 땅의 티끌에 불과한 아파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아마다가 됩니다. 이것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주는 창세기 인간론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은 어떻습니까? 산 사람이지만, 죽은 사람들의 장소인 무덤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존재의 삶이 아닙니다. '생명의 기운'이 사라지니, 그는 한낱 '티끌'에 불과한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4.

 

예수님은 바로 이 한 사람,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은 채 살고, 집에서 살지 못하고, 무덤에서 지내고 있는, 말하자면,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이 한 사람을 위해서 갈릴리 호수를 건너 거라사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이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풍랑을 뚫고, 죽음을 건너 여기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사람 안에 들어앉아 있는 귀신들을 내쫓으시고, 그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귀한 한 사람의 생명으로 치유하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회복된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35절입니다.

 

귀신들이 나가버린 그 사람은, 옷을 입었습니다.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았습니다. 이 세 가지는, 앞서 말씀드린 귀신 들린 사람의 세 가지 특징을 온전히 제자리로 돌이킨 결과입니다. 첫째,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은 채 지내던 이가 다시 옷을 입었습니다. 둘째, 정신이 나가 집에서 살 수 없어 추방되었던 이가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죽은 자들의 장소인 무덤에서 지내던 이가, 이제는 생명이신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있습니다.

 

주님은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여기에 오셨습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큰 아픔을 견디다 못해 산산이 부서진 이 한 사람, 무너진 삶으로 인해 자기 고향과 가족들로부터도 외면당한 채 더 이상 집에서 살 수 없었던 이 한 사람, 그래서 살아있지만 죽은 것에 다름없던, 아무도 돌보지 않던 이 한 사람을 위해서 주님은 여기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회복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9절입니다. “네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네게 하신 일을 다 이야기하여라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떠나가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낱낱이 온 읍내에 알렸다고, 누가는 전합니다.

 

5.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가 만난 복음은, 주님이 어떤 분이시고, 주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그가 태어난 자연으로부터의 관계도 깨지고, 이웃과의 관계도 깨지고, 그래서 자기가 누구인지도 잊고 사는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주님을 만난 이들은 깨진 관계의 회복을 경험합니다. 하나님도 없고, 자연도 없고, 이웃도 없고, 자기도 잃어버린 채 살아가던 삶에서 회복되어 온전한 생명으로 거듭나는 역사를 경험합니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해 오셨고, 너희도 이 일을 하라고 우리를 보내십니다. “네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네가 하신 일을 다 이야기하여라하신 주님의 명령은, 오늘 그분을 만나 회복되고, 거듭나는 은혜를 체험한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우리도 주님을 만나 우리를 묶고 있는 사슬로부터 해방되고, 온전한 관계의 회복에 이르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일을 널리 전하는, 복음의 기쁨을 안고 살아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강림절 두 번째 주일에, 주님의 크신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가정에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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