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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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한 해를 보내면서 다사다난했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지난 한 해야 말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리고 국제적으로 다사다난했다는 표현이 가장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말만 많고 일할 줄 모르는 정부와 부정부패가 제일 많이 노출된 정치권이 참회하지 않는 모습, 경제적 퇴보로 인한 실직, 가정파탄, 범죄, 자살 등의 급증, 제 갈 길을 잃어버린 공고육과 주택정책 그리고 남북한의 문제, 미국의 이락 전쟁과 파병문제 등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일년 내내 불안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며 지냈으니 다사다난했다는 말 밖에는 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 한해는 지축이 흔들린 것과 같이 우리 자신도 위기 앞에서 중심이 흔들린 생활을 하였다고 말해서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와 같이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정신적 중심이 흔들려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세상이 흔들리는 것은 그것을 안전하게 운전해야 할 지도자들의 책임이라고 하겠지만 우리 자신의 중심이 흔들리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해를 보내면서 과연 흔들리지 않는 생활을 하였는지 반성하고 다사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새 해를 맞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1.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모두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 자신이 한 해에 무엇을 하였는가 생각해 보니 한 일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최소한 우리 교회에서만 설교를 30회, 교회 홈페이지에 강좌 20회, 외부 강연과 원고 20여회, 해외여행 3회, 각종 모임과 학회의 회의 수십 회 등 참으로 바쁘게 지난 한 해이었습니다. 여기에다 개인적으로 만나고 대화하고 상담하고 지도한 것까지 다 합치면 아마도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밤낮 없이 뛰었다고 해서 좋을 듯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은 남습니다. 도대체 이 모든 일들이 무엇을 위한 것 이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나 자신은 열심히 뛰면서 제 흥에 겨워 지냈는지 모르지만 이 모든 일에 대한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어떤 가치가 없다면 별로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노대통령이 임기 1년을 마친 날 일간지들은 그가 지난 1년간 한 일을 평가하였습니다. 그가 한 일들은 모두 평균 이하의 점수를 받았습니다. 본인이야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국민의 눈으로 볼 때 그가 마땅히 했어야 할 일들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당선시킨 정당을 갈라놓고 국민마저 갈라놓는 분열주의자의 낙인까지 찍혔습니다. 대통령 본인의 판단보다는 국민의 평가가 더 정확하고 객관적인데 그것이 냉담하니 대통령은 보람은커녕 불안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금년에는 국내외적으로 불경기 때문에 무역수지가 악화되리라고 예상했는데 GNP가 3% 미만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반도체와 자동차 수출이 살아나서 무역수지를 살려줬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역에서 얻은 이익의 2, 30%는 선진국에 로열티로 지불되고 우리 주식시장의 약 40%가 외국인의 소유라고 하니 이것은 한국기업이 외국인에 의해 좌우되는 날도 멀지 않았다는 경고의 종소리입니다. 우리 기업체들이 열심히 활동을 하고 나라살림의 책임을 지고 있는 듯하지만 나타난 결과는 별로 실속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근본 원인이 국민의 성실성, 국제 경쟁력, 투자 그리고 국가의 정책 등의 빈곤에서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동분서두하며 일한다고 해도 객관적으로 내실이 없는 것은 무용지물인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알게 되면 불안해지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한 해를 마감하면서 내놓을 수 있는 인생의 보고서는 흑자입니까 아니면 적자입니까?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불만이십니까? 즐겁습니까 아니면 불안합니까? 여러분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일들이 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얼마나 창조적이었나 하는 질문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다 하는 일을 나도 하면서 양적으로 좀 더 했다고 자부하면 아마도 큰 보람을 느끼지는 못할 것입니다. DJ처럼 획기적이고 차별화된 일을 하지 않았다면(최근 우리 교회 DJ란 집사는 CM Song 작곡가에서 일약 탈랜트가 되었음)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인정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만하고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7:21-23에 보면 마지막 날 심판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주여, 주여 부르짖으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기적도 행하였다고 주장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만일 그들이 하느님의 뜻대로 하지 않으면 심판할 때 “나는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선언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요소는 우리가 제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주여, 주여 부르짖는다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주님의 평가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핵심적인 요소가 지난 한 해의 생활 속에 없을 때 우리의 삶은 내용 없이 공허해지고 불안해지며 삶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2.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서 주님이 아신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과 그의 뜻을 알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교회생활에 최선을 다 한 것은 물론이고 성경을 날마다 읽기도 하고 암송하기도 하며 옮겨 쓰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어떤 분들은 하느님에 대하여 알려고 책도 읽고 생각도 많이 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하느님이나 그 뜻에 대하여 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평생을 목사란 직업에 종사하는 나 자신도 하느님에 대하여 확실하게 말해 달라는 질문은 받으면 막막해지는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내 대답이 질문하는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나의 제한된 지식과 경험의 탓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이성이나 감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초월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평신도나 교역자들이 하느님에 대하여 다 안다고 자신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나름대로 독특한 하느님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느님에 대하여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하느님에 대하여 다 안다고 하면 그들은 하느님과 같은 존재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인간의 지식이나 감정이란 그릇 속에 담은 것뿐입니다. 그런 하느님은 참 하느님일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을 보면 사람이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고 하느님과 그 민족 사이에서 중개역할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느님을 시내산에서 만날 때 구름이 가려져서 음성만 들었을 뿐 그의 모습은 보지는 못했다고 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났지만 그 빛이 너무 강해서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눈이 상해서 며칠 동안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전 13장에서 ‘지금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거울로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경험하고 아는 것이 극히 부분적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비록 우리가 하느님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분이 우리를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즘 돌아다니는 유머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노파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중에 내내 졸다가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길에서 옆 집 노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디 갔다 오노?” “교회 갔다 온다.” “예수가 와 죽었다 카노?” “발이 못에 찔려 죽었다 카더라” “어찌 그리 잘 아노?” “예수가 우리 사돈아이가“ ”언제 그렇게 됐노?“ ”우리 며눌 아이가 매일 예수님에게 아부지, 아부지, 안카나?“ 이 우수개 소리는 우리가 제아무리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잘 안다고 자처해도 그분을 아는 데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하면 지금까지 안다고 소란 피우던 일이 모두 끝장나는 것입니다.
지식과 경륜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주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감동적인 설교와 경건한 생활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과연 하늘을 감동시키고 사람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 주교가 어느 날 간절히 기도하면서 “주님, 주님”하고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오냐“하는 주님의 대답을 듣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그의 믿음과 음성을 알아보고 응답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주교는 주님께서 오냐 하고 대답하시는 음성을 듣고 깜짝 놀라서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우화이겠지만 지금까지 그 주교는 주님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많이 알고 성직자니까 의무적으로 기도드린다는 것뿐이었지 실상 하느님이 자기를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깜작 놀라 죽은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아는 것 보다 하느님이 우리를 먼저 그리고 더 잘 아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성서적 신앙은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자기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으며 마지막 날에 우리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우리를 친 자식처럼 환하게 알고 계실 터인데 마치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말하니까 무신론자들이 “하느님은 기독교인이 만든 허상이다”고 하는 것입니다.
설사 우리가 지난 1년간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또한 열정적으로 하면서 “주님, 주님”하고 외쳤다고 할지라도 최후의 심판자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날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하느님을 안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이 우리를 아신다는 신앙에서 다시 새 출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가 마지막 날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그를 섬기는 것입니다”(히 12:28)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심판 날에 흔들리는 것들 곧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사람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사람들, 말로만 사랑과 정의를 외치고 돌아서서는 중상과 모략하는 사람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그 대신 흔들리지 않는 것들 곧 진실하고 유익한 사람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사람들을 남겨놓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건하고 두려움으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섬긴다는 말은 어떤 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광신자들처럼 종교 활동을 위해서 시간과 재물과 열정을 모두 바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경건하고 두려워한다는 말을 현대신학에서는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라고 표현합니다. 영성이란 말이 풍기는 인상은 어떤 초월적이고 영적이고 거룩한 성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성이란 것은 그렇게 애매모호한 뜻을 가진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사람의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진실한 말과 올바른 행동이 일치하는 것이 바로 영성이고 그런 사람이 하느님을 섬길 때 그 분에게 기쁨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과 행동을 하나되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느 정도 성실하게 살려는 사람은 그 둘 사이의 괴리를 절감하고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가 좋은 말도 많이 하고 선한 행동도 많이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의 경험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대신 좋은 말은 천천히 하고 선한 일은 빨리할 수 있어도 참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말은 빠르고 행동은 누린 것이 우리의 생리입니다. 그래서 지난 한 해도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말만 무성하고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하는 결과를 낳지나 않았는지 반성하면서 “그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음미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은 혜롯이 지운 것입니다. 그는 그 성전을 솔로몬의 성전보다도 갑절이나 크게 지었습니다. 기원전 20년에 시작해서 기원후 63년에 완공했으니 얼마나 큰 공사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성전을 기초부터 잘못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지운 것이 아니라 정치적 야합의 산물이었습니다. 헤롯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고 성전을 지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제국의 비위를 맞추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고 합니다. 두 배로 크게 지어서 백성들의 눈을 홀리고 헬레니즘의 양식으로 현관에 황금 독수리 상을 걸어서 로마에 아부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그 엄청난 돌의 크기와 화려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야합과 술수로 지어진 성전은 완공된 지 7년 만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난 한 해 동안 예루살렘 성전의 건축과 맞먹는 엄청나고 화려한 일을 많이 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노력과 헌신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람의 눈으로 볼 때도 놀라운 성취와 공적이라고 찬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의 삶이 실로 언행일치라는 경건한 자세를 가지고 하느님의 일에 헌신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쌓아올린 상아탑은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 흔들리게 되고 무너지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A. 디니의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란 시는 우리에게 언행일치의 영성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고, 당신의 말씀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그것을 살아야 하고, 악을 행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선을 행해야 합니다. 창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만 있지 말고, 거리로 달려나가야 하고, 거리에 서 있지만 말고 행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야 하고, 그들 마음속에 들어가서는, 그들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 시가 고백하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성실한 노력과 함께 뼈아픈 고통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그것을 피하려고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피한다면 우리 자신은 영원히 흔들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행일치의 영성을 버린다는 것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우리 생명의 반석과 산성이신 하느님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길을 묵묵히 가야 합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질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를 먼저 아시는 하느님 앞에서 제단을 쌓고 날마다 언행일치의 산 제물을 바치는 신앙인의 생활입니다. 잠언은 “의인의 길은 동틀 때의 햇살 같아서, 대낮이 될 때까지 점점 더 빛난다.”(4:18)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경건한 헌신으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할 때 새 해와 오고 오는 해에 우리의 길은 더욱 빛나고 흔들리지 않는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 2003. 12. 28
잠언 4:10-19, 히브리 12-25-29
이계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