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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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연습

요한복음 3: 16; 빌립보서 4: 4-9
2005. 1. 2. 신반포교회, 손원영 목사
1.
새해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가정에 항상 함께 하시길 빕니다. 교수신문은 2001년부터 매년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첫해에는 ‘오리무중’(五里霧中), 2002년엔 ‘이합집산’(離合集散), 2003년엔 ‘우왕좌왕’(右往左往)을 선정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2004년 작년에는 ‘당동벌이’(黨同伐異)를 선정했습니다. 이 말은 중국 역사책인 후한서(後漢書)에 나오는 말로, “같은 파끼리는 당을 만들고, 다른 파는 공격한다”는 뜻입니다. 대통령 탄핵과 수도이전, 국가보안법과 같은 4대 법안을 둘러싸고 1년 내내 당파적 대립이 계속되었던 한국사회의 2004년을 아주 적절히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지난 2004년을 표현한 더 적절한 한자는 재앙 ‘재’(災)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가 선정한 한자가 아니라, 일본 한자능력검정협회가 1995년도부터 매년 ‘올해의 한자’를 선정해 발표한 것입니다.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던 1995년의 한자는 ‘진’(震: 벼락 진)자였고, O-157 식중독 사건으로 나라가 떠들썩했던 1996년은 ‘식’(食: 밥 식)자였고, 기업과 은행의 도산이 이어졌던 1997년엔 ‘도’(倒: 넘어질 도)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협회는 작년 한해를 표현할 한자로서, ‘재’(災: 재앙 재)자를 선정했습니다. 그 한자를 선정한 이유로는 일본기상관측 사상 최다의 태풍이 일본을 강타했고, 니카다 지진, 기록적인 폭염 등 자연재해에 이어, 유아학대와 어린이 살인사건 등 각종 인재가 꼬리를 문 한해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재’(災)자가 올해의 한자로 선정되자마자,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인도네시아 근방에서 엄청난 지진과 해일이 발생하여 수만명의 목숨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재앙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쯔나미(Tsunami)라고 일컬어지는 해일은 인도네시아 뿐만 아니라 지진이 발행한 지역으로부터 거의 6000Km 떨어진 아프리카의 소말리아까지 발생하여 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것입니다. 정말로 나비효과라는 물리학 이론이 쯔나미로 증명되는 모습을 우리는 슬픔어린 표정으로 지켜보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2003년 영국의 왕립협회는 “테러리즘보다 더 인류에게 위협적인 것은 지진이나 홍수, 그리고 해일 등과 같은 자연재해이다”라고 경고한 바 있는데, 정말 우리가 마음 속 깊이 명심해야할 말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무튼 ‘재앙’의 해, 2004년은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재앙’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해를 맞았습니다. 동해에 떠오르는 붉은 해를 바라보며 우리 각자는 무엇인가 우리의 소원을 간절한 마음으로 빌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올해 어떤 해가 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습니까? 조선일보의 김태익 논설위원은 작년 ‘당동벌이’의 사자성어가 새해에는 ‘당화친이’로 변화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새 해에는 “동(同)보다는 화(和)를 추구하고,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마음으로 통할 수 있는 ‘당화친이’(黨和親異)의 한해가 되기를 바란 바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터넷 불로그를 통해 새해의 사자성어로 이런 희망을 표현해 주었습니다. “기쁨만땅, 행복충만, 전원취업, 구인허덕, 백수전멸, 태평성대, 평화통일” 등등.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자성어로 올해를 표현하고 싶습니까? 저는 설교제목에도 나와있듯이, 희망연습으로 올해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2.
정호승 씨의 시 중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희망은 아름답다

창은 별이 빛날 때만 창이다
희망은 희망을 가질 때만 희망이다
창은 길이 보이고 바람이 불 때만 아름답다
희망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을 때만 아름답다(후략)

그렀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은 아름답습니다. 창문을 통해 길이 보이고 창문을 통해 별이 보일 때 창문이 아름답듯이, 희망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을 때만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온갖 재앙으로 가득찬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질 때 세상은 아름답고 온갖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는 거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40대 중반의 한 만학도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온갖 고난을 겪은 학생입니다. 경제적인 고난 뿐만 아니라 심한 정신적 어려움도 겪은 학생이었습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꿈만 꾸면 천길 낭 떨어지로 떨어지는 꿈을 자주 꾸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절망하고 있던 어느 날, 혼자 기도하는 중에 이상한 환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칠흑같이 ‘캄캄한’ 굴속에 갇혀있던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어둠뿐인 곳에 그렇게 혼자인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홀연히 바늘만큼의 아주 세밀한 빛 한줄기가 비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햇빛 찬란한 모습이 아니라, 아주 가느다란 바늘이 겨우 들어갈 만큼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구멍으로 한줄기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꿈에서 깨어났다고 합니다. 그런 후 그는 그것을 희망으로 하여 기운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완전한 모습으로 돌아오는데는 거의 2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겨우 바늘같은 한줄기 희망으로 시작하여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데 2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은 좀 걸리지만, 희망은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는 작년 10월 한국어로 번역된 ‘희망의 원리’라는 대작을 쓴 사람입니다. 그의 결론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희망의 원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희망을 배우는 일이다.”라는 것입니다. 희망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희망 갖는 법을 배웠느냐 못 배웠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정치 지도자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재벌 그룹 총수인 이건희씨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본사람들이 열광하는 욘사마나 제가 좋아하는 god같은 대중스타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심지어 훌륭한 종교 지도자가 어느 날 뚝딱 감 떨어지듯 우리 입에 희망을 떨궈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희망하는 법을 배웠느냐, 우리의 희망은 우리가 얼마나 희망하는 연습을 하였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희망하는 법을 배웠습니까? 낙심중에 있을 때, 그 수렁으로부터 스스로를 일으킬 수 있는 희망의 법을 배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국 속담에 ‘희망에 사는 자는 음악이 없어도 춤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러시아 속담에는 ‘희망의 왕국에는 겨울이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프리카 동부 빅토리아호 고산 지대에 산다는 반투족(族)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희망은 이 세상의 닻이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희망하는 법을 배웠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올해, 어떤 해가 될 것 같습니까? 작년은 ‘재’의 한해요, ‘당동벌이’의 한해 였다면, 올해는 어떤 해가 될 것 같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올해도 여전히 정치권은 싸움질을 계속할 것이고, 그래서 여전히 당동벌이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올해 역시 자연재해와 인간들의 탐욕에 의한 각종 테러는 우리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할 선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분명합니다. 온갖 재난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는 힘, 온갖 테러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지키려는 힘, 온갖 불행에도 불구하고 일어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한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온갖 재난과 테러에도 불구하고, 일어설 수 있는 힘, 곧 희망연습의 해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한해의 숙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희망을 연습하겠습니까? 희망을 배우겠습니까? 오는 저는 여러분에게 그것을 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3.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에 근거하여 희망의 원리로써 세가지를 연습할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빌립보서 4장 4절에 나와있듯이, 기쁨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쁨은 웃음입니다. 웃음은 기쁨입니다. 그래서 희망을 연습하는 것, 그것은 곧 웃음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재난 속에서 어떻게 웃음을 웃을 수 있겠습니까?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넘어가는 상황에서 어떻게 웃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때가 가장 희망을 연습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그 때 웃음을 연습하시길 바랍니다.
언젠가 제가 한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빅터 프랭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유대인 정신과 의사로서 프로이트 심리학의 대가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치에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형무소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오랫동안 연구했던 모든 연구물이 압수되고 남루한 죄수복만이 그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그에게 희망이라곤 이제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를 기다리는 것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 그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날 홀연히 중요한 것을 하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거의 매일같이 배고픔과 질병으로 형무소에서 죽어갔던 사람들이 갑자기 성탄절이 다가오자 사망자 수가 격감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성탄절에 임박해서는 거의 사망자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성탄절이 끝나고 그 다음날부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배고픔과 질병으로 다시 죽어 넘어가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두고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성탄절 날에는 온가족이 성탄절 츄리 옆 식탁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촛불을 가운데로 하여 모이게 될 꿈을 꿉니다. 그리고 그들은 온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지나온 이야기를 나누고, 또 함께 노래를 부르는 꿈을 꿉니다. 그런 꿈과 희망이 그들로 하여금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프랭클은 프로이트의 성심리학을 버리고 새로운 이론, 곧 의미가 사람을 치유하고 살린다는 새로운 심리학이론인 로고데러피(logo-therapy)를 창안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우슈비츠형무소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죄수들에게 의미를 주는 일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매일 어떻게 하면 사람을 웃길 수 있을까를 고심했고, 사람들의 입가에 웃음을 선물하는 보람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내었던 것입니다.
웃음을 연습한다는 것은 고난가운데에서도 가능성을 보는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옛말처럼, 궁극적인 하나님의 승리를 미리 앞당겨 사는 것입니다. 일종의 낙천적인 삶의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연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지금 로마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은 자신이 제2차 전도여행중 개척하여 목회하던 빌립보교회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주요내용은 자신을 위해 헌금을 보내준 빌립보교회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자신이 다시는 감옥에서 나와 교회로 못돌아 간다는 회의주의적 시각을 없애기 위해 편지를 쓴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감옥이라는 아주 비참한 현실 속에서 바울은 지금 희망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좌절하지 말고, 대신 기뻐하라고 거듭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을유년 새해, 재앙의 두려움 때문에 벅찬 가슴보다는 불안으로 시작한 한 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안에서 기뻐하십시다.” 웃음을 연습하면서, 기쁨을 연습하면서, 새해를 감사함으로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새해에 우리가 연습해야 할 것은 믿음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희망의 연습은 곧 믿음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연습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믿음은 끝없는 회의와 회의, 고민과 고민, 그리고 끊없는 쓰러짐 속에서 하나의 빛처럼 생성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믿음은 결코 내가 얻겠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믿음의 주체가 분명 나인 것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믿음보다 회의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없이 의심하고 방황하고 그로인해 방황합니다. 그러다가 홀연히 어떤 빛에 의해 봄빛에 눈 녹듯이 홀연히 의심이 사라지고 믿음의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믿음은 결코 내가 아니라 하늘의 은총이 아닌가 싶습니다. 단지 우리는 끊임없이 믿음을 얻기 위해, 하늘의 은총을 바라면서 믿음을 연습할 뿐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가운데서 어떻게 주저앉지 않고 꿋꿋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한번의 지진으로 수만명이 한꺼번에 죽어가는 현장을 목도하면서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착하고 착한 친구가 나이 40에 죽어가고, 정말 죽었으면 바라는 테러리스트들은 아직도 떵떵거리고 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는 믿음을 갖고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회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사랑이 많으신가? 그분을 내 생명을 다해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욥이 절규했던 것처럼, 그렇게 부르짓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결코 우리의 회의와 의심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은 회의를 넘어 미래를 보게 만든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재난의 당사자라면, 고난의 당사자라면, 회의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의와 의심은 어쩌면 고난의 당사자의 몫이 아니라, 고난과 관계가 없는 제3자의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재난의 당사자라면, 고난을 목도하면서, 하늘을 원망하고 하늘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한탄하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하늘을 쳐다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의지할 것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재난을 맞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늘을 향해 잠시 원망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시 하늘을 향해 우리를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부르짖으면서 믿음을 연습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믿음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다만 믿음을 연습할 뿐입니다.
오늘 읽은 빌립보서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지금 좋은 일을 하다가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불합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억울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그것이 세상입니다. 바로 그것이 세상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도 하늘을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감옥에서 기뻐하였고, 믿음을 연습하였던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큰 계획이 진행되고 있음을 감사하면서, 오히려 믿음이 진보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사랑하는 여러분, 테러의 공포 속에서 보낸 지난 1년, 이제 쯔나미라는 엄청난 재해 앞에서 우리는 하늘을 향해 원망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믿음을 연습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기도하고 간구하는 계기로 삼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참사에 생명을 잃은 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해일 피해를 입은 자들을 위해 우리의 무릎을 꿇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진보를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새해에 우리가 연습해야할 희망연습은 사랑입니다 새해는 사랑을 연습하자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9) 재난이 변하여 희망이 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배우고 듣고 본 바를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에서 배우고 본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아닙니까?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 아닙니까?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 아닙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교회에 다니면서 배운 것,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사랑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입니다. 재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야할 것은 바로 이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희망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재난을 변화시켜 희망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십시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국민들의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친 가족이기주의라고 합니다. 내 어머니, 내 아들이 위험에 처하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만큼 ‘뜨거운’ 사람들이지만, 남의 집, 남의 자녀라면 남의 얘기가 되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왜곡된 가족주의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하나님이 나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두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입니다.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9·11 테러 때, 저를 비롯한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911테러를 ‘미국과 중동 간의 문제’로만 치부했습니다. 나의 불행과 남의 불행을 칼같이 구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인도네시아의 지진해일로 수 많은 나라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재해구호금으로 홍콩에서 리카싱(李嘉誠·창장 그룹 회장) 한 사람이 310만달러를 내놓다고 합니다. 우리같은 가족이기주의를 벗어난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어떻습니까? 우리나라 정부는 애초 60만달러를 책정했다가 언론의 비판을 받고서야 재해금을 수정하는 코메디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재난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좁은 가족개념을 넘어서 세계 각지로 우리가 보고 배운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한 이 세상, 이제 우리가 사랑해야할 이 세상입니다. 이제 이 세상에 사랑을 실천하십시다. 그것이 바로 재난을 변화시켜 희망을 만드는 길이 됩니다.

4.
이제 새해가 밝았습니다. 그러나 올해도 어김없이 테러와 재난이 우리를 찾아올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난을 넘어 희망을 꿈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희망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연습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 희망을 연습하십시다. 고난가운데에서 웃음을 연습하고, 기도와 간구로 믿음을 연습하고, 또 사랑의 실천으로 희망을 연습하십시다. 우리의 희망 연습으로 재난이 변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을유년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새해를 맞이하여 희망연습을 결심하는 우리에게 좋은 시가 있어 하나 소개하고 오늘 설교를 마칠까 합니다. 이해인 수녀가 쓴 “다시 시작하는 기쁨으로”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기쁨으로 (이해인)

첫눈, 첫사랑, 첫걸음
첫약속, 첫여행, 첫부대
처음의 것은
늘 신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순결한 설레임의 기쁨이
숨어 있습니다/
게으름과 타성의 늪에 빠질 때마다
한없이 뜨겁고 순수했던
우리의 첫열정을 새롭히며
다시 시작하는 기쁨으로
다시 살게 하십시오/
새해 첫날
첫기도가 아름답듯이
우리의 모든 아침은
초인종을 누르며
새로이 찾아오는 고운 첫손님/
길 위의 푸른 신호등처럼
희망이 우리를 손짓하고
성당의 종소리처럼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는 새해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