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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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은 죄인 집결소와 같아 보입니다. 모든 종류의 죄인들이 여기에 모여 있습니다. 그 반면에 성서에는 의로운 사람, 경건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 거룩한 성자, 용감한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훌륭한 신앙인과 성자를 자신과 비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떤 모교회 목사는 자신의 이름을 조다윗이라고 바꾸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욕심이 자신을 성자와 성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히려 진정한 신앙인은 정말 성경을 잘 읽어 가면서, 성경의 인물 가운데에 가장 악하고, 가장 믿음 없고, 가장 더러운 인간을 자기라고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손길이 없다면 멸망할 수 밖에 없었던 자기를 보며 반성하면서 감사하게 됩니다.
저는 현대인들에게 성서 인물 가운데서 가장 가까운 인물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의심 많았던 회의의 사도 도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현대인의 신앙생활에서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는 우리에게 좋은 벗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고민한 것처럼 고민하게 되며, 의심했던 것처럼 우리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와 함께 신앙적으로 실의에 빠지기도 하고, 그 고민과 신앙의 갈등 속에서 때로는 기쁨을 찾기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 다녔던 교회에서 저는 도마와 같은 인물로 찍혀 있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왜?’라는 질문을 참 많이 하였던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을 하거나, 무엇을 믿을 때에도 ‘왜 그것을 해야만 하는가? 왜 그것을 믿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놓고, 그 해답을 찾지 못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을 하려고 하지 않았고, 믿으려고도 하지 않는 고집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집 때문에 본 교회에서는 늘 의심의 사나이라고, 도마와 같은 인물이라고 낙인이 찍혔던 이단아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라는 말씀에 “왜 아담이 먹은 것인데 먹지도 않은 제가 죄입니까? 라는 질문으로 인해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한테 신앙이 없는 자로서 찍히게 되었고, 성경의 한 사건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왜 다르냐는 질문을 하면 왜 믿음이 없느냐라는 답변만을 얻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질문만 던지면 대답보다는 이단아라는 꼬리표가 저를 늘 붙어다녔습니다. 질문의 대한 대답은 합리적이고, 이해가 되는 대답이 아니라 그 화살은 오히려 믿음이 없는 나, 의심이 많은 나, 도마와 같은 나, 이단아로 낙인 찍힌 것입니다. 그 이후에 신앙과 성경에서의 질문은 교회에서 절대로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 한국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의심과 믿어지는 부분이 있어도 이런 측면에서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을 것이며, 때로는 침묵을 지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한 침묵과 질문을 하지 않을 때, 바로 신앙 좋은 사람으로 불리기 때문일것입니다.
저는 회의의 사도 도마를 읽으면서 믿음이 없는 저와 현대인도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며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회의의 사도 도마가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장면을 우리는 기쁨과 감격을 느끼지 않고서는 읽어 나갈 수 없습니다.
도마는 어린이처럼 단순하게 믿을 수 없도록 되어 있는 회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도마입니다. 우리는 단순하고 소박하였던 갈릴리 어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보다도 오히려 끝까지 믿어지지 않는 것 때문에 회의와 더불어 싸우며 신음하며 신을 찾는 회의의 사도 도마에게서 가까움을 느끼는 시대의 아들과 딸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마는 불신시대, 회의의 시대에 기쁨과 소망을 주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2. 아마 도마는 단순하고 소박했던 유대 사람들에게는 반갑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크게 취급되었으나 공관복음서에 보면 도마는 취급되지도 않고 있습니다. 도마를 크게 취급한 것은 철학의 세례를 받은 헬라 사람들을 상대하여 글을 쓴 요한에 의해서였습니다. 뜨거운 신앙의 정열보다는 차가운 이성을 존중하는 헬라 사람들이 기독교에 접근해 오는데 도마는 좋은 길잡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설교하였던 예수는 바로 이 같은 새로운 사태에 대처하여서 도마를 열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도마를 택한 것은 그가 베드로와 같은 신앙의 사람이 되리라고 보아서 택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바로 베드로처럼 그렇게 단순하게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느끼는 영혼의 고민을 귀하게 보시고 그를 앞날의 또 하나의 시대의 사도로 택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 삼일째 되는 날에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는데, 거기에 도마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기쁨에 넘친 제자들이 도마에게 그일을 말하였으나 그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주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것을 보았는데 만일 친구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라고 도마는 자기의 눈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고 도마는 친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차가운 이성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정에 흐른다든지 소망과 원망을 사실과 바꿔치기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환상을 현실로 착각하지 않겠다는 큰 다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틀림없는 사실이어서 내가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다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 후 팔일 째 되는 주일날 저녁 그분,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분명히 철저하게 회의하는 도마에게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그려진 도마의 모습을 우리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도마는 오늘의 과학적인 실증주의자였던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연과학의 관찰과 실험의 대상이 되는 재료와 같이 지각을 가지고 실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무의미하다, 참이 아니다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같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고 믿겠다고 하는 도마, 실증주의자의 소원을 주님은 들어주셨습니다. 바로 팔일 전 첫 부활절의 새 아침 일찍 무덤에 찾아가 무덤이 빈것을 보고 울고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막달라 마리아야”라고 사랑의 음성으로 부르시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보고 마리아가 나무 기뻐서 달려들려고 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나를 만지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과학적 실증주의자 도마에게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복음이었습니다. 주님은 끝없는 사랑이셨습니다.
누구나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져볼 수 있는 역사적인 실존의 인물로서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자연현상과 똑같은 것이었다면,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볼 수 있고 만져볼 수 있는 역사적 인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안다”는 것이지 믿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마야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 너는 본고로 믿으나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도마는 그 때 손가락과 손을 내밀어 그의 못자국과 옆구리를 만져보고, 믿음 있는 자가 되어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신앙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분,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육의 눈으로 누구나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라, 믿음 있는 자가 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그분과 그렇게 오랫동안 얘기를 하였으나 마음이 뜨거워지기까지 그분이 누구인지를 몰랐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마리아야!”라고 하시며 그녀의 영혼이 눈을 뜨게 하기까지 옆에 서 계신 분이 동산지기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디베랴 가에 제자들 앞에 나타난 그분을 제자들은 떡을 뗄 때가지 오랫동안 몰라봤습니다.
부활의 주를 만나게 하는 것은 뜨거운 신앙입니다. 주께서 예정하신 택한 자에게만 특별히 보여주신 것은 아닙니다. 신음하고 고민하는 상한 영혼을 가지고, 깊은 죄의 못에서 신앙의 결단을 하는 믿음의 사람은 누구나 언제나 볼 수 있습니다. 이계준 목사님의 “새로운 기독교 이해”라는 칼럼에서 “부활하셨습니까”라는 글에 사실(fact)과 진실(true)이라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저는 그 글을 보면서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 정리가 된 듯 합니다. 그 글을 인용하면, 예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그가 십자가에 죽은 비극을 보았다. 이것은 사실(fact)이다. 동시에 그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 예수를 믿었고 그가 자기들과 함께 있었고 그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어서 하느님 나라의 일을 할 수 있게 하였다고 믿었다. 이것은 진실(true)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부활 신앙은 부활의 사실(fact)곧 육체적 부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부활의 진실(true) 곧 부활의 현존과 능력에 근거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이 부활의 그리스도는 역사인식이 아니라 신앙인식에 의해서만 깨달을 수 있고 만나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도마의 모습을 생각하면, 도마는 철저하게 고립주의자, 이기주의자였습니다. 그의 관심은 늘 에고, 자신의 문제에만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다음, 도마는 제자들로부터 떠나서 홀로 있었습니다. 홀로 예수를 추상하고 회상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타자가 없었습니다. 타자와의 교제와 사랑이 없었습니다. 타자에 대한 사랑을 상실하면 자기애, 자기 신화, 그리고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무서운 결과, 자기 붕괴와 자기 몰락에 물들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개인이 다른 사람과 고립되어서 신비적 합일에 이르게 하는 관념적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바로 타자와의 사랑의 교제요 신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신앙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도마에게는 그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앙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도마의 회의와 불신앙의 근본 원인은 그의 사랑 없음, 그의 고립에 있었습니다. 요한 사도의 말대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신을 알수 없습니다”

3. 그러나 도마의 불신앙과 회의가 무너지는 날이 왔습니다. 그는 팔일 이래 계속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의 고립적인 이기주의적 생활을 청산한 것입니다. 드디어 그 팔 일째 되는 저녁 주님이 나타나시어 눈으로 친히 보고 손가락으로 만져보고 믿겠다는 도마를 용서하시고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자가 되라”고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할 수 없고, 회의하는 차가운 도마의 마음속에 참 사랑을 보여주심으로 사랑을 가능케 하시고, 신앙을 가능케 하신 것입니다. 도마는 그 한량없으신 사랑 그대로이신 그 분 앞에 엎드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놀라운 감격적인 장면입니다. 주님은 이기주의자나 고립주의자 앞에는 나타나지 않고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만나고 사랑하려는 이에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형제를 사랑하면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결코 그에게서 멀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의 그리스도는 차가운 지성과 회의가 있는 곳이 아니라 굳은 의지와 뜨거운 사랑이 있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뜨거운 신앙을 가진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실증주의의 정신이 아니라 신앙의 정열을 가진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고립적인 이기주의자가 아니라 뜨거운 사랑을 가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목: 회의의 사도 도마
말씀: 요한 14:1-6, 20:24-29
양성진 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