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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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1-7; 누가복음2:41-52
신반포교회, 손원영 목사

1.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맞이하여 여러분의 가정과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몇 달 전 흥미로운 사진 한 장이 모 일간지에 실렸습니다. 그것은 41세의 이군익씨라는 분이 지난 6월 92세 아버지를 손수 만든 ‘지게의자’에 지고 금강산에 오르는 모습이었습니다. 생전에 금강산을 보고 싶다는 아버지를 위해 이씨는 방석을 얹고 안전밸트를 단 알루미늄 지게 의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15kg 지게에 43kg의 아버지를 태워 만물상 턱밑 전망대까지 올랐습니다. 이씨의 윗몸은 온통 피멍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취푸에 사는 교포가 이 기사를 보고 감동을 받아 그들을 중국에 초청하였습니다. 취푸는 공자의 고향이자 공자사상의 성소이기도 합니다. 이씨는 중국에 가서도 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태산에 오르고 공자묘를 찾았습니다. 중국의 치푸일보에서는 “한국 효자, 취푸에 오다”라는 기사를 시작으로 방송사에서도 앞 다퉈 그들을 보도했습니다.
그 결과, 이씨 사진을 벽에 걸어두고 마음을 닦겠다는 사람들도 생기고, 또 ‘공자’를 가르치는 공학관 교장까지 이씨를 만나러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있고난 후, 어떤 교사는 “중국도 감탄한 지게 효자, 교과서에 실어 본받게 하자”라는 제목의 편지를 모 신문의 독자기고란에 투고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보면서, 참으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부모 없는 사람이 없건만, 저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이 오신 성탄절을 맞이하여, 효도에 대해 함께 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2.
사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래, 기독교와 이웃종교 사이에는 끝없는 긴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와 유교 사이의 긴장관계는 우리가 시급해 해결해야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가톨릭 선교사들에 의해 처음으로 조선에 소개된 기독교는 유교와 엄청난 갈등을 겪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독교가 우상숭배라는 명목으로 부모의 제사를 거부하자, 당시 조선정부와 유림들은 기독교를 일컬어 부모도 모르는 패륜아집단으로 지목한 뒤 기독교신자를 탄압하면서 수 천 명의 기독교신자들을 새남터에서 혹은 절두산에서 처형했던 것입니다. 물론 가톨릭교회가 20세기 중반에 와서 제사 문제를 전향적으로 바꿔 지금은 오히려 허용하고 있지만, 개신교는 여전히 그 문제와 관련하여 유교와 강력한 대립 각을 세우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유교적 전통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독교를 일컬어 부모도 모르는 사람들, 효도도 할줄 모르는 불효자들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됩니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 개신교에서도 이 문제를 가톨릭교회처럼 슬기롭게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달리말해 그 해결의 길은 바로 기독교와 유교와의 대화를 통해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감리교회의 <교리와 장정>에 타종교와의 대화를 명시하고 있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교회가 이런 종교 간의 대화에 앞장서고 있다는 점은 큰 자부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런 노력을 더욱 경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종교 간의 대화를 모색하는 학자들은 유교이든 불교이든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대화할 때, 주로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형태가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첫 번째 종교 간의 대화의 형태는 교리적으로 대화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감리교회는 교리와 장정에 25가지 종교강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속에 구원이니 천국이니 하는 신학적인 교리들이 있습니다. 그 교리들을 다른 종교의 교리들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기독교의 구원은 불교의 열반과 어떤 점에서 유사하고 어떤 점에서 다른 지를 고찰하면서 기독교의 구원의 의미를 풍성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리적인 측면에서의 대화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대화의 방법은 각 종교의 ‘가르침’을 가지고 대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설명한 교리적으로 대화하는 것보다는 쉬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 종교는 서로 간에 “교리”는 서로 다르겠지만, 교훈적인 가르침은 상당부분 비슷한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 6:31)와 같은 황금률을 들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가르침은 예수님만의 가르침이 아니라, 힌두교에도 있고, 불교에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가르침을 서로 나누다 보면, 각각의 종교는 서로를 배울 수 있게 되고, 각 종교는 더욱 성숙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대화의 방법은 각 종교의 “교리”나 “가르침”이 아닌, 동시대에 속한 각 종교인들이 동시대의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공통적인 관심을 갖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활동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통의 활동이야말로 종교 간의 대화라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올 초 새만금 간척사업과 관련하여 원불교와 가톨릭, 그리고 개신교가 함께 소위 “삼보일배” 행진을 통해 환경운동을 한 바 있는데, 이것은 가장 전형적인 사회적 활동을 통한 종교 간의 대화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세가지 대화의 방법이 모두 필요하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교리를 가지고 대화하거나 혹은 가르침을 갖고 대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또 많은 오해를 살 수 있는 부분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수준에서는 현재 세 번째의 방법을 갖고 대화하는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감리교회에서도 사회신경을 통해 종교간의 대화의 방법으로 세 번째 방법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오늘의 현실 속에서 정의로운 사회건설을 위해서는 타종교와 공동 노력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종교 간의 대화의 방법이 교리적으로 대화하는 것, 종교간의 가르침을 공유하는 것, 그리고 사회적 이슈를 공유하는 것으로 나눌 때, 우리는 이 세가지를 함께 고려하는 맥락에서 다른 종교인을 만나고 또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따라서 오늘 저는 성탄절을 맞이해서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한 첫 번째 방법과 두 번째 방법의 차원에서, 기독교와 유교와의 대화를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 신학에서는 예수를 일컬어,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인간”으로 설명합니다만, 유교적 측면에서 볼 때, 예수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성탄절을 맞이해서, 우리 동양인에게, 아니 우리 한국인에게 있어 예수는 어떤 존재로 이해될 수 있는지 유교적 관점에서 좀 이해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예수는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참 효자”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탄절은 어떤 날입니까? 이 날은 바로 효자가 태어난 날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을 효자탄생일로 달리 부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이미 오래전에 고인이 되신 감리교신학자 윤성범 박사에 의해 ‘성(誠)의 신학’으로 혹은 ‘효자 기독론’으로 제시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성탄절을 맞이하여 왜 우리는 예수를 일컬어 효자라고 말할 수 있는지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3.
효경(孝經)에 보면, 효의 원칙을 잘 제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효도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모두 4단계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단계는 우리로 하여금 효자 예수를 이해하는데 매우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습니다. 먼저 제1단계는 무엇입니까? 효경에 보면,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손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損 孝之始也)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1단계의 효도의 길입니다.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자고로 효도의 시작은 우리의 몸이 부모로부터 왔음을 알고 그것을 잘 보존하여 훼손하지 않는 것입니다. 좀더 쉬운 말로 하면, 나의 몸을 잘 간수하는 것이요, 우리가 건강하게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효도의 시작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를 봅시다. 예수는 태어날 때부터 건강하게 태어났고, 또 몸도 튼튼하게 잘 자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2) 지혜가 자라고 키가 자라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예수가 건강했다는 말씀입니다. 후에 그가 십자가를 당당히 질만큼 건강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어릴적부터 효도의 1단계를 훌륭히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효경에 따르면, 효도의 제2단계는 입신(立身)입니다. 여기서 입신이란 칸트의 용어로 설명하면 자기동일성을 갖는 것입니다. 외부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나 나를 자리매김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동일성입니다. 심리학자인 에릭슨의 용어로 한다면, 입신이란 자아정체감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효도의 제2단계입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이 누군지 비로소 깨닫게 될 때, 그것은 바로 부모에게 큰 기쁨이요, 효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진정한 효자가 되려고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나는 누구인가?”라고 항상 질문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하여 외부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흔들림이 없는 대답을 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분명히 큰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입신인 것입니다.
올해 제가 들은 설교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설교를 한편 고른다면, 저는 이계준목사님의 “기다리는 어머니”라는 설교를 들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탕자의 귀환이 아니라, 성숙해진 아들이 돌아온 이야기로 해석한 내용입니다. 성숙해진 딸 사모님을 바라보면서, 임종을 맞이한 사모님의 어머니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효도인 것입니다. 입신이지요. 단지 우리의 몸이 건강한 상태를 넘어서 인격적으로 성숙한 존재가 되는 것, 바로 그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효도의 제2단계요, 입신의 단계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제2단계의 효도를 훌륭히 완성했습니다. 12살에 말입니다. 그는 바로 12세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대견스럽고 뿌듯하였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보면, 예수는 예배당에서 랍비들과 대화하며 토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부모가 예수를 찾았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왜 저를 찾았습니까? 제가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닙니까?” 여기서 예수가 한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당을 일컬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한 점입니다. 즉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부르고,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로 비로소 생각한 것입니다. 12살에 말이죠. 이것이 진정한 효도입니다. 나이가 12살이 되어도, 아니 자아정체감을 형성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그것을 형성하지 못하면, 그것은 불효입니다. 지금 우리사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나이가 12살이 아니라 20살, 아니 결혼을 하고 성인이 되었는데도 자아정체감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보십시오. 그가 유대의 지도자들에게 체포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데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신성모독죄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주변사람들에게 ‘신성모독죄’라는 오해를 받을지언정 진정으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예수는 바로 자기가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자신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이죠.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린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효자가 되려고 한다면, 우리는 신체발부 수지부모의 차원을 넘어서 입신의 단계로 발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몸을 갖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효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그래서 훌륭한 인격을 가진 존재가 될 때, 부모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효도의 제2단계입니다.
그렇다면 효도의 제3단계는 무엇입니까? 효경에 따르면, 행도(行道)의 단계입니다. 도를 행하는 단계입니다. 이것이 효도의 3단계입니다. 여기서 도란 부모의 뜻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행도란 보모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요, 부모의 뜻을 묵묵히 실천하는 단계입니다. 이것이 제3단계의 효도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부모의 뜻은 구체적으로 직업을 통해 성취됩니다. 그래서 직업이 중요합니다. 독일어로 직업을 Berufung이라고 말하는데, 그 말은 Beruf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즉 소명이라는 말에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말이 직업이라는 말로 발전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슨 직업으로 일을 하든 그것은 곧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이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소명과 직업이 소중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달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명과 직업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방편입니다. 제가 목사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교수라면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효도의 제3단계란 바로 부모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행도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즈음 부모들은 속으로 맘고생이 참 많습니다. 왜냐하면 엄청난 돈을 들여서 자녀를 교육시켜도 자녀들이 변변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백수로 노는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비극입니다. 대학이 4년제가 아니랍니다. 통계에 보니까 서울대학교의 학생들이 평균 대학을 6년다닌 답니다. 4년만에 졸업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취직하기가 힘드니까, 취직을 위해서 어학연수도 다녀와야 하고, 또 학비마련을 위해 돈도 벌기 위해 휴학도 하고, 하다보니 6년이 걸린다는 것이죠. 그렇게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이 안 됩니다. 보통 대학들의 순수취업율이 40%를 밑돕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행도를 해야 하는데, 부모의 뜻, 아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려야 하는데, 그것을 이룰 기회가 없으니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르겠습니다. 효도를 해야 하는데, 효도할 기회가 없으니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아무튼 예수는 효자로서 바로 행도의 모범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기가 막히게 잘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한 메시야/그리스도로서의 직업에 철저히 순종하고 실천했던 것입니다. 즉 효자이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100%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십자가를 기꺼이 졌던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런 일입니까? 그런데 예수는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합니다. “아버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위대한 기도를 하십니다. 바로 행도의 결단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십자가를 졌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한 것입니다. 이것이 효도의 제3단계입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하늘 아버지의 뜻을 100% 받들어 순종하고 그 뜻을 다 이루었다는 선언입니다.
끝으로 효도의 마지막 단계는 무엇입니까? 효경에 따르면, 그것은 “양명어후세 이현부모 효지종야”(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孝經 제1권)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것입니다. 오명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유명을 남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 아버지의 뜻에 100% 순종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을 훌륭히 했다는 것을 후세에 남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통해, 이현부모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이름을 통해 부모님이 드러나게 될 때, 그것을 일컬어 효의 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멋진 삶을 살아서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를 낳으신 부모의 이름이 드러난다면, 그것이 바로 효의 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비로소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한 자라는 의미의 그리스도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양명어후세, 곧 그의 이름이 유명해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세상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지리적으로 유대사람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아는 것이 아니라, 유럽 사람도 알게 되었고, 미국사람도 알게 되었고, 이제 한국 사람도 알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양명어후세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과거 사람만 아니 것이 아니라 현재 지구촌에 살고 있는 사람도 알게 되었고, 미래에 태어날 모든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것입니다. 양명어후세입니다. 그리고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신의 이름만 양명어후세가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이현부모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통해서 그를 낳으신 그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만의 사건이 아니라 곧 하나님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가 이현부모한 것입니다. 위대한 효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곧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현부모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효도하는 방법은 바로 이 네가지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둘째는 입신의 단계로, 셋째는 행도의 단계로, 그리고 넷째는 양명어후세 이현부모의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예수는 효자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란 의미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효자가 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가 진정한 효자가 될 때, 비로소 참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효경에 빚대어서 우리가 하나님께 효도하는 효도의 4단계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중요한 것 하나를 더 말씀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삼강오륜에서 말하듯이, 진정한 효도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보모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한다라고 할 때, 그것은 자녀가 부모를 일방적으로 공경만 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데, 결코 그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효도는 부자유친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친함이란 어색함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이요, 강요됨이 아니라 자발성이요,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인 소통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부자유친입니다. 이것이 바로 효의 참 정신입니다. 이러한 부자유친의 모습을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두 분 사이의 관계가 어떠했습니까? 그 사이에는 정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친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말씀하고, 또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가까운 사이입니까? 바로 이것이 부자유친의 참 모습입니다.

4.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영원히 인류에게 기억될 위대한 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날입니다. 그런데 본래 생일이란 생일을 맞이한 사람에게 축하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을 이 땅에 태어나도록 도와준 부모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일날은 곧 부모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성탄절은 효자탄생일이자,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효도할 것을 다짐하는 효도일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모쪼록 이 효도날을 맞이하여, 서두에서 말씀드린 ‘지게효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모님께 더욱 효도하시고,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해드리는 즐거운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효도운동을 펴고 있는 가나안농군학교 김평일 장로님의 효도10계명을 소개하면서 오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1. 신앙생활을 하시도록 하자.
2. 대답을 잘하고 말씀을 잘 들어 드리자.
3. 표정을 밝게 하고 웃음을 잃지 말자.
4. 궁금증을 풀어 드리자.
5.자유롭게 쓰실 수 있는 용돈을 정기적으로 드리자.
6. 향토적인 음식을 해 드리자.
7. 외모를 아름답게 꾸며 드리자.
8. 일거리를 찾아드리자.
9. 친구를 자주 만나게 해 드리자.
10. 등을 긁어 드리고, 손, 발톱을 깍아 드리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