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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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1-10          

신반포교회 이계준 목사

 

1.

  소설가 정미경 씨의 단편 중에 “내 아들의 연인”이라 글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소설은 한국사회의 상류층 부자도 하류층의 빈자도 모두 무언가 어떤 결함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중년 여성입니다.  그녀는 ‘돈을 크리넥스 뽑아서 코 풀 듯 쓰는’ 최고급 아파트에 살면서, ‘돈 버는 일 외에는 상상력이 황폐한’ 사업가 남편과 ‘날마다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다리가 부었다고 스파 들르고 집안일은 죄다 남한테 맡겨 놓는’ 시집간 딸 그리고 명문대학에 다니는 아들을 두고 있습니다.  그녀는 봉사료가 붇는 고급 자장면을 먹고 고급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면서 하루를 보냅니다.  물질적으로는 전혀 부족이 없는 그녀지만 그녀는 이런 생활에 대해 무미건조함을 느끼면서 뭔가가 결핍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그 결핍의 정체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아들의 연인과의 만남입니다.
   명문대학에 다니는 아들은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긴 해도 두루마리 화장지가 식탁에 올라 있으면 비위가 확 상하는, 뼛속 깊은 부르주아 청년’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도 많고 남에 대한 배려도 할 줄 알고 괜찮은 아들입니다.  그런 아들이 같은 대학에 다니면서 무허가 컨테이너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도란‘이라는 여성을 좋아합니다.  아들은 도란을 처음에는 미친 듯 좋아하지만 점차 ’극복할 수 없는 계층 문제‘와 뼛속 깊은데서 나오는 차이로 인해 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면서 헤어집니다.
   여주인공은 아들의 연인을 만납니다.  지성적이고 냉철한 도란은 가난하지만 그것에 절망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힘들다는 내색도 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면서 꿋꿋이 살아갑니다.  봉사료가 붙은 자장면을 먹는 것을 불편해하고 애인의 어머니가 백화점에서 비싼 옷 사주는 것을 입지 않으면서 부잣집 아들을 만나거나 시어머니가 될 수 있는 귀부인을 만나거나 너덜거리는 청바지를 입고 나타나는 스스로 보살필 줄 모르는, 예의나 교양이 부족한 인물입니다.  
    이 소설이 말하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삶의 다양성과 함께 그 다양한 삶 속에 숨어있는 결핍증과 관련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간은 어떤 계층이나 환경에 관계없이 그 내면에 부족한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현대인은 어느 편이던 간에 이 결핍증의 노예로 시달리면서 만족과 감사를 모르고 사는데 그 근본 원인은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인간 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창세기의 인간 창조신화를 다시 보면 인간의 근본 문제를 밝히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흙으로 빚은 다음 그 코에 바람을 불어 넣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하느님의 생명을 받았으므로 영원한 성분을 지니고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역시 흙이란 물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완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 유대인들이 창조주 하느님의 완전성과 피조물인 인간의 불완전성을 말하려는 인간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아담과 해와가 하느님이 유독 먹지 말라고 한 열배를 따 먹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먹으면 하느님처럼 완전한 존재가 된다는 유혹 때문입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부족한 것이 없는 전적으로 만족한 상태를 말합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바람직하고 신나는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이번에는 그들 자신들이 벌거벗은 사실 곧 또 하나의 결핍증과 불완전한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하나가 해결되었다 싶으면  또 다시 새로운 것에 부딪치는 것이 그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스스로 벌거벗은 것을 발견한 그들은 그대로 놔두지 않고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려고 다시 나뭇잎을 엮어서 몸을 가렸습니다.  인간의 지능은 하느님이 영안의 소유자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들의 몸을 가렸다고 상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기만과 자기위선을 낳을 뿐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창세기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첫째로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 과욕을 부린다는 것, 둘째는 그 과욕의 결과 부족감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의 부끄러운 모습만 나타낸다는 것, 셋째로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지만 자기기만과 자기위선일 뿐 완전한 존재는 되지 못한 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인간창조 신화를 전통적인 원죄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 결핍증이란 시각에서 이해하고 해석해 본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흙으로 빚어진 불완전하고 채워지지 않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본래 불완전하고 부족한 자기 자신을 그대로 받아드리고 뿐만 아니라 “나는 이것이 전부요”하고 밖으로 노출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운명인 영원한 부족을 유한한 것으로 채우려는 욕망과 또한 부족한 것을 완전하게 보이려는 위선으로 인해서 우리 인간은 영원히 불완전하고 결핍증에 걸린 존재를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현대인은 원하는 것을 다 소유하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이 감사한 생활을 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3.

  오늘의 본문인 누가복음 19:1-10의 말씀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결핍증에 걸린 현대인들에게 큰 교훈을 된다고 생각하여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는 세관장이고 당대의 부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그를 보려고 길거리로 나아갔으나 사람들은 많고 키는 난장이라 그를 보려고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사회인사이고 부자인 그가 체면불구하고 나무 위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 당시 철저한 전통사회에서 그런 행동을 했으니 천치바보가 아니면 용감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가 나무 위로 올라간 행동은 자기의 키가 짧다는 것과 함께 자기 마음의 결핍증을 인정한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볼 때 그는 체면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자기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그런 우발적 행동을 취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삭개오는 겉보기에는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극심한 결핍증과 부족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뽕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초라하고 가엾은 난장이 그러나 진정하고 솔직한 삭개오를 보시고 나무에서 내려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 은 삭개오가 자기의 체면을 개의치 않고 육신적, 정신적 결핍증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것을 보시고 그의 현실을 인정하고 용납하는 동시에 관심과 사랑의 일체감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정과 관심은 삭개오의 빈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가득 차게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사랑의 근원, 생명의 근원,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세상의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던 내적인 결핍증을 완전히 해소하였습니다.  
   이 결과는 삭개오를 참회와 감사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이제 세리장이고 부자인 삭개오는 예수님의 인정과 용납으로 삶의 만족을 찾게 되고 감사한 마음에 가득 차서 자기가 생명처럼 아끼던 물질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혹시 빼앗은 돈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주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물이 잔에 가득 찰 때 넘치는 것과 같이 삭개오의 부족감과 결핍증이 영원한 사랑과 생명으로 차고 넘칠 때 감사의 마음과 행동이 그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세리장이고 부자이지만 유대인의 질시와 원한의 대상인 사회적 난장이었고 또한 정신적으로 결핍증에 시달리는 불완전한 인간이었으나 적나라한 자기 노출과 하느님의 은총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또한 자기 동족에게 존경받는 거인이 되었습니다. 
   삭개오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셨습니다.  감사의 열매는 구원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구원과 감사는 일란성 쌍둥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같은 실체입니다.  구원에서 오는 감사, 인간의 실존적 결핍증이 영원한 사랑으로 채워질 때 오는 감사는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4.

  난쟁이 삭개오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우리는 거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르긴 하지만 삭개오의 키는 1m40내외이었을 것이고 당시에 GNP 개념은 없었지만 $100이하이었을 것이고 세리장이라고 해야 오늘의 평범한 세무서 직원 정도이었을 것이고 교육이라야 초등교육 정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대부분 키가 1m60이상이고 우리의 GNP는 2만불이고 우리는 대부분 전문직 내지는 전문성을 지니고 있고 우리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물론 삭개오와 우리 사이에 2000년이란 시차가 있긴 하지만 오늘날 동남아나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에 삭개오 시대의 생활여건에 속한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감안할 때 삭개오와 우리의 차이는 난쟁이와 거인의 차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문제는 소설 “내 아들의 연인”에서처럼 우리 현대인은 거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만나기 전의 삭개오처럼 결핍증에 시달리고 휘청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물질이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실존적인 상태 곧 본래적 부족감에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이것을 가시적인 것, 붙잡을 수 있는 것으로 채우려고 하고 없는 것을 있는 척, 모르는 것을 아는 척, 속이고 위장하고 변명하려는 데 스트레스를 받고 불신의 대상이 되고 스스로 허위의식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는 한 여기에는 전 인격적으로 만족한 상태 곧 구원은 기대할 수 없고 전 인격적으로 만족한 삶 곧 감사의 생활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러 길가로 나갔지만 우리는 주님을 만나러 교회로 찾아옵니다.  하느님은 교회 안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지만 인간은 개체인 동시에 사회적 동물이라 영적 결핍증에 걸린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인간적으로, 영적으로 부족감을 채우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적으로 결핍증에 걸린 사람들, 영적으로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이는, 그런 의미에서 거룩한 공동체가 아니라 죄인들의 소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고 그의 사랑은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완전한 인간들이니 만큼 교회에 오지도 않고 올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란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부족감을 그대로 인정하고 하느님과 믿음의 식구들 앞에 그대로 노출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노출이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노출하는 용기는 곧 신앙의 용기이고 이것을 위해 인격적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용기와 결단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은총의 그릇이고 믿음의 식구 상호간의 인격적 만남과 이해와 용납의 계기가 됩니다. 
   우리의 이러한 자기 노출에서 비롯되는 구원의 은총이 자신의 생명과 삶을 가득 채울 때 우리의 삶의 잔이 넘쳐흐르게 되고 그 넘침이 기쁨과 감사의 생활이란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현대인은 give and take의 명수들입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사회생활을 하는 것은 좋은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감사의 생활은 give and take가 아니라 take 없는 give의 연속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넘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의 생활은 주고 아쉬워하고 손해 보았다고 불평하는 그런 타산적인 것이 아니라 주고도 기쁘고 주고도 감사한 이타적이고 무조건이며 자기희생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삭개오가 고백한 감사의 열매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난쟁이 삭개오가 드디어 감사의 거인이 된 것과 같이 거인인 우리 교우 모두가 감사의 거인이 되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난쟁이 삭개오의 모범을 따라 거인 삭개오로 변신하자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감사의 생활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흠뻑 젖은 농도 짙은 감사의 생활로 한 차원 업그레이드하자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이 공동체 생활의 근거가  되어서 서로 간의 이해와 관심이 심화되고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목적을  위해 필요한 감사의 헌신이 기도와 봉사와 헌금으로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표현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넘치는 교회, 성도의 교제가 흔흔한 교회, 선교의 열정이 불타는 교회 그리고 하느님과 이웃과 믿음의 식구들에게 감사하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결핍증에 걸린 거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역사상 어느 시대의 사람들보다도 지적으로 물질적으로 거인이면서 거인답지 못하고 항상 결핍증에 시달리고 부족을 채우려고 동분서주하는 가련한 난쟁이가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일지 모릅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 거인을 거인답게 만드는 길을 난쟁이 삭개오를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해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을 주님과 사람들 앞에 그대로 드러내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빈 마음을 채움으로써 기쁘고 감사하는 사람으로 변하여 본래적 인간답게 풍요한 삶을 누리게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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