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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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터전을 딛고
본문: 고린도전서 1장18-31절
신반포감리교회 홍정호 전도사 

1.

한 주간 안녕하셨습니까. 새해가 되었구나 싶었는데, 벌써 열흘이 지났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시면서 각 가정과 개인마다 여러 계획과 소망들을 갖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지난 주 목사님께서 설교가운데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교회도 올 한 해 선교하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하고자 '소올산업'에 매진했으면 한다는 목사님의 말씀에 공감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 설교말씀의 보론격에 해당되는 말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주보를 보시고 설교 제목에 익숙하신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흔들리는 터전'(The Shaking of the Foundations)은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폴 틸리히의 설교집의 제목입니다. 폴 틸리히가 유니온 신학대학 채플에서 한 설교를 묶어낸 이 책은 위대한 신학자의 사상을 쉬운 설교로 접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아직도 많은 신학생들이 애독하는 책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책 제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흔들리는 터전을 접했을 당시 저의 관심은 소위 '고정관념'을 허무는 데에 있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받아온 기독교적 교육에 의한 고정관념과 사태에 대한 당위적 인식이 너무 강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종의 여과과정을 거치기로 마음을 먹고, 질문을 하는 훈련을 했습니다. 되도록 뒤집어 생각해 보려고 하고, 말과 글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겉으로 드러난 상황 이면의 의도를 살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말하자면, 익숙한 생각의 터전을 흔들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고정관념에 대한 여과 없이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수도 없을뿐더러, 기존의 생각을 보수하기 위해 지식을 도구화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고정관념을 해체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생각을 보다 건강한 토대 위에 새롭게 정립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같은 해체와 재구성의 과정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과정이며, 신앙인으로 사는 동안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하는 과정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말하면, 신앙에 있어서 고정관념을 해체한다는 것은 신앙을 버리고 살아가기 위함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편견과 왜곡된 의식들을 걷어내어 보다 참된 신앙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흔들리는 터전을 딛고 세워지는 과정의 반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2.

우리는 누구나 삶이 좀 더 안정되고 확고한 터전위에 세워지길 기대합니다. 물질과 건강의 축복을 약속하는 번영신학이 한국의 교회성장과 부흥의 원동력이 된 것은 바로 이같은 인간내면의 안정을 향한 근원적 욕망을 잘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을 사는 것, 우리의 삶이 보다 안정되고 튼튼한 토대 위에 뿌리내리고 살기를 바라는 것은 저를 비롯한 모든 인간존재의 근원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우리의 바람과 달리 우리가 딛고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실은 불안과 근심과 염려가 끊이지 않는 흔들리는 터전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삶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제 아무리 근심과 걱정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 한 구석에는 어두운 면을 안고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다른 사람의 더 큰 어려움 앞에서 다만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지 않을 뿐, 사람은 누구나 마음 속 그늘 한 자락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삶은 알 수 없고, 불확실하고, 모호한 일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일을 시작하면서도 일이 잘 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고, 사람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의 바람과 노력과 달리 아픔을 겪게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삶의 매순간 우리의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불확실성과 불안정함의 요소들은 안정을 추구하는 인간 존재의 본성과 갈등을 일으키며 안정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이를 약속하는 권력과 재물과 명예 따위의 가치에 눈을 돌리게 만듭니다. 이러한 세속적 가치들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기도 하지만, 삶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돈을 통해, 권력을 통해,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는 자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보다 안정된 토대위에 세우고 싶은 욕망을 근원적인 차원에서 극복할 수 있는 존재가 하느님 이외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신앙은 우리의 삶이 새로운 토대 위에서 출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존재의 근원적인 흔들림을 경험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크게 두 부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이른바 모태신앙으로서 부모님의 신앙적 유산을 물려받은 경우입니다. 모태신앙의 경우에는 부모님의 신앙이 생활의 바탕을 이루고 있어 삶과 생각에 기독교적인 가치관이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기독교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기독교가 개인과 가족공동체의 삶의 바탕을 이루는 문화가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회심의 체험을 통해 기독교인이 되는 경우입니다. 종교심리학 분야의 고전 가운데 하나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의 '종교체험의 여러 모습들'(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s)이라는 책에서 윌리엄 제임스는 여러 사람들의 자서전, 일기, 서간문 등을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종교적 체험을 한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보다 더 큰 존재'와의 만남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아울러,종교적 체험을 한 이들은 이같은 '더 큰 존재'에 이끌려 사는 삶을 인생의 진정한 목적으로 삼게 되었다는 점 또한 지적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체험 이전에는 자아가 중심이 된 삶을 살았지만, 이후로는 삶의 중심추가 나로부터 하느님으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의 경우 예수를 만나 자신의 익숙한 삶의 배경들을 뒤로하고 새 삶을 살게 되었으며,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 회심을 경험한 이후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존재의 근원적인 흔들림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도, 바울도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받았던 유대교적인 가르침에 익숙했고, 그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야말로 참된 길임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그들의 삶에 영향력을 미치게 된 순간에 이르러, 또한 부활하신 예수를 실존적으로 체험하는 순간에 이르러 이들은 자신의 이전 존재가 뿌리채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이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했던 성전중심의 종교, 제의중심의 종교, 제사장중심의 종교, 로마제국중심의 종교로부터 생활의 터전이 되는 종교, 하느님의 백성이 중심이 되는 종교, 제국의 영광이 아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종교를 향한 새로운 출발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 나름의 이전경험과 지식이 예수를 만나 근본적으로 뒤흔들리는 과정이 없었다면 이들은 거듭남을 경험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이로부터 그들의 삶 속에 임하시는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3.
   
흔들림의 체험이 존재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개인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갈등과 다툼이 없는 완성된 공동체를 꿈꿉니다. 그러나, 신약성서, 특히 바울서신을 보면 교회 내에 끊이지 않았던 갈등을 보게 됩니다. 바울의 역할이란, 이런 교회 내의 갈등을 조율하고, 이로부터 하느님의 뜻이 교회와 성도 가운데 나타나도록 돕는 것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 이보영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가르쳐주신 대로 교회, 즉 엑클레시아의 의미 가운데 '토론(debate)'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회는 갈등이 완전히 해결된 종결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토론을 통해 계속적인 완성을 향해 나아가기를 희망하는 이들의 모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흔들리는 토대를 딛고 함께 대안을 모색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교회됨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저는 지난 주 설교를 통해 '신반포'의 의미를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의 현실에 비추어 끊임없이 새롭게 반포되어야한다는 뜻이 '신반포교회'에 담겨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교회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반포교회는 교회의 본래적인 역할인 토론하는 교회, 하나의 지배적인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를 지배하지 않고 여러 목소리가 대화적으로 공존하는 교회의 모델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공동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러시아의 문학비평가이자 철학자인 미하일 바흐친(Mikhail M. Bakhtin)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분석하면서 '비종결성'이라는 개념을 소개하고 있는데, 말씀에 참고가 될까 해서 소개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는 문학의 여러 장르들 가운데에서도 소설에 많은 관심을 두었는데, 그는 소설을 단성악적 소설과 다성악적 소설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단성악과 다성악이란 바흐친이 음악에서 차용한 용어로서 문학 작품 속에 작가의 목소리가 지배적인 경우에 이를 단성악적 소설로, 작가의 목소리 이외에 여러 등장인물의 목소리가 대화적으로 공존하는 경우에 이를 다성악적 소설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단성악적 소설의 대표적 특징을 지닌 작가로 톨스토이를, 다성악적 소설의 특징을 지닌 작가로는 도스토예프스키를 들고 있는데, 톨스토이가 위대한 설교가로서 작품 속 등장인물을 통해 작가의 단일한 목소리를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했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작가의 지배적 목소리가 아닌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목소리를 통해 각각의 목소리가 조화롭게 공존하도록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처럼 하나의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를 지배하지 않는 구성의 소설을 다성악적 소설이라고 불렀는데, 여기로부터 바흐친의 대표적인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대화주의'의 개념이 나오게 됩니다. 그에 따르면 대화란 한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목소리가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가운데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시되는 것은 목소리들 사이의 대화적 관계성입니다. 이는 사물의 근원적인 속성에 속하는 것으로서 대화적 관계성을 무시하는 독백은 극복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대화에 대한 바흐친의 개념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대화적 관계성은 독백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무질서하고 혼돈스러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흐친은 종교언어를 대표적인 독백의 언어로 보고 있습니다. 중심을 향하는 말, 권위적인 몸짓과 목소리와 표정으로 전달되는 말, 질문의 여지를 두지 않는 종결적이고 선언적인 말이 바로 종교언어의 특징입니다. 여기에는 대화의 여백이 없습니다. 반면, 대화적 관계성이 중시하는 말은 주변을 향한 말, 탈권위적이고 해학적인 말, 종결적인 선언을 거부하는 비종결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가끔씩 홈페이지에 올라온 이계준 목사님의 글을 보면서 대화적 언어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됩니다. 메시지가 정확하게 전달되면서도 권위적이거나 종결적인 어휘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읽는 이들로 하여금 웃음 짓게 만드는 해학적인 표현을 즐겨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권위적인 사람들은 잘 웃지 않습니다. 국회의원들의 얼굴, 선거포스터를 찍을 때 말고는 웃고 있는 얼굴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말의 내용과 상관없이 표정만큼은 누구보다도 진지하지 않습니까?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종결적인 선언들을 끊임없이 내뱉는 이들을 향해 '왜?' 라고 질문하는 것은 도전적이고 때로는 불경스러운 행위로까지 비춰집니다. 독백적 사고에 익숙한 터전을 흔들어 대화적 관계성을 실현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입니다.

교회에서 토론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교회야말로 이같은 대화적 관계성이 실현될 수 있는 이상적인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경험과 사회적 배경이 서로 다른 이들이 신앙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한 공간에 모여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이 목소리들이 어느 한 목소리에 지배되지 않은 채 다성악적인 조화를 이뤄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면 교회는 대화와 토론이 부재한 우리사회에 긍정적인 모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공동체보다도 더욱 활발한 토론의 장이 되어야 할 교회가 대다수의 경우에 있어서 오히려 독선과 아집이 가득한 독백적 사고의 온상이 되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4.
   
흔들리지 않는 삶, 종결적인 선언을 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하느님뿐이겠습니다. 흔들리는 터전은 우리 각자의 삶에 있어서의 불확실성과 모호함을 직면하게 함으로써 하느님을 더욱 의지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뿐만아니라, 공동체에 있어서도 흔들리는 공동체의 터전은 보다 건강한 공동체로 발돋움하기 위한 창조의 공간이 되리라 믿습니다. 때문에 흔들리는 터전은 우리가 서둘러 종결시켜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딛고 서야 할 개인과 공동체의 삶의 자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독선과 자기만족에 가득한 확신을 떠나 대화와 사랑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곳이 내가 되고, 신반포교회가 된다면 더없이 기쁜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