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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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없이 살아갈 희망”


본문: 전도서 9장 11-12절, 로마서 5장 1-8절.
신반포감리교회 홍정호 전도사
(2011.7.10. 성령강림절 후 제 4주일)




1.

     여러분, 한 주간 안녕하셨습니까? 연일 계속되는 장마로 마음까지 눅눅해 지기 쉬운 때입니다. 이번 주 희망에 관한 말씀을 준비하면서 세 가지 사건(사람)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것은 ‘평창 동계올림픽’과 ‘85호 크레인 위의 김진숙씨’, 그리고 ‘가수 임재범’입니다. 지난 주 안타까운 소식도 많이 있었지만, 오랜만에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을 안겨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확정 소식에 여러분 모두 반가우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두 번의 실패를 통해 어렵게 성취한 결과인 만큼 동계올림픽에 대한 평창 주민들과 국민들의 기대와 기쁨이 큰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실패의 경험을 통해 도전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이로써 더욱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의 발판을 마련한 한 사례로 평창이 기억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론이 주목한 평창올림픽 소식과는 달리, 대량해고 사태에 저항하며 외로운 싸움을 지속하고 있는 한 사람의 소식도 제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와 관련하여 크레인에 올라가 오늘로 186일째 농성을 진행하고 있는 김진숙씨와 또 그를 지지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의 소식입니다. 김진숙씨는 지난 2003년 129일간의 크레인 농성 끝에 결국 그곳에서 목을 매 세상을 떠난 故 김주익 씨가 있던 바로 자리, 85호 크레인 위에서 새로운 다짐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와 관련한 갈등의 내용을 상세히 알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 노동자의 절망과 죽음의 장소로만 기억되는 그곳을 새 희망의 자리로 바꾸겠다는 그녀의 다짐은 저에게 이 시대 가장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또 하나, 희망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안겨 준 가수 임재범씨가 떠오릅니다. 사람들은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그의 외로움과 팍팍한 삶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함께 울었습니다. 그의 노래가 유독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은 그가 고난으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노래에 담아 부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듣기에 좋고 보기에도 좋은 그들이 우리에게 모두 감동을 주는 경우는 드뭅니다. 특히 대형기획사의 치밀한 기획과 장기간의 훈련을 통해 우리 앞에 등장하는 아이돌 가수들은 화려한 외모와 기교를 뽐내며 아시아를 넘어 유럽의 젊은이들까지 열광시키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깊은 곳을 울리는 감동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그 중 하나는 아마도 그들이 자신의 삶을 노래로 승화시킬 고난의 경험과 인고의 시간이 생략된 채 시장의 요구에 맞춰 (혹은 시장을 형성하며) 나오는 상품으로 포장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친 음색의 임재범의 노래는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처럼 곱고 예쁘지는 않지만, 거친 비바람을 이겨내고 싹을 틔워 끝내 피고야 마는 아름다운 꽃과 같았습니다. 가수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며 생계유지를 위한 방송출현을 기피해 온 것은 ‘예술가’가 아닌 ‘상품’을 요구하는 시장에 맞서 그가 스스로를 ‘예술가’로 자리매김 해 온 까닭이었지만, 암으로 고통받는 아내와 가난한 아빠의 딸로 자라는 아이 앞에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자존심만을 고수할 수 없었고, 이것이 그를 다시금 대중 앞으로 불러왔습니다. 그에게 가족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임과 동시에 그 사랑 때문에 가장 큰 희생의 값을 요구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들으며, 그의 고단했을 삶을 생각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준 그의 가족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꿈과 이상을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그에게서 오늘날 외로운 자기의 모습을 발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저는 자존감(심)이 강하고 성격이 곧은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에게는 늘 가혹하고 타인을 향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운 사람이라는 데 있습니다. 자존심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세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자기와의 관계에서 온다는 것을 이들은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이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내면의 가치를 향해 이와 같은 충실함을 지닌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의 존엄성을 잃지 않으면서,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한편, 세상이 원하는 대로만 살지는 않겠다는 당당함과 넉넉한 내면의 힘을 지닌 사람은 그렇기에 항상 저의 동경의 대상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삶에서 적지 않은 고난을 겪었고, 그들이 비싼 값을 치루고 산 고난의 경험을 허비하지 않았으며, 그 값진 고난의 경험을 통해 삶을 더욱 아름답게 가꾼 이들이라는 데 있습니다. 경복궁을 복원한 도편수 신응수 선생은 “소나무 중에서 제일은 적송(赤松)이다”고 말합니다. 적송은 나이테가 좁으며 붉은데, 나이테가 넓으면 쉽게 자란 나무여서 곧 속이 무르고 쉽게 터진다는 것입니다. 험한 환경에서 자라야 적송처럼 나이테가 좁고 강도가 단단하고, 사람 또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정호승, 2006: 47, 재인용) 고통 없이 자라는 나무는 속이 무르고 쉽게 터지는 나무밖에는 될 수 없기 때문에 천 년을 가는 건축물의 목재는 될 수 없습니다. 적송을 만든 것은 모든 것이 갖춰진 온실이 아니라 모진 비와 바람과 강렬한 햇빛이었습니다.




3.


      우리는 누구나 고통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사업이 잘 되기를 바라고, 공부를 하는 사람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어합니다. 또 연애를 하는 사람은 결혼하기를 바라고, 결혼을 한 사람은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하고 싶어 합니다. 이 모든 기대에서 어긋났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전도서의 본문은 말씀하기를,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고, 배웠다고 해서 늘 잘되는 것도 아니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당연히 인과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두 조건들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행과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칩니다. 이것이 전도자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 앞에서는 ‘살다보니 나에게도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하면서 기뻐합니다. 복권에 당첨되거나, 주식이 오르거나, 시험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당할 때는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생각하며 고통스러운 일상을 보냅니다. 그러나 좋은 일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를 찾아오듯, 고통스러운 일도 그렇게 우리를 찾아옵니다. 전도자가 전하는 것은 어쩌면 삶의 진리일지 모릅니다. 인간이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삶의 진실 말입니다. 많은 종교가 피할 수 있다고 약속하지만, 한 번도 피해 보지 못한,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삶의 조건 말입니다. 전도자는 이러한 고통이라는 삶의 현실 앞에서 거짓된 약속을 하기보다는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고통을 포함한 우리의 삶 전체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선물임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4.


      우리는 직선적인 삶을 추구합니다. 효율적이고 빠른 길이 있다면, 항상 그 길로 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굽이쳐 흐르는 강의 물길을 직선으로 바꾸고, 산등성이를 돌아가는 굽은 산길을 뚫어 고속도로 냅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속도와 효율만큼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는 가치는 없는 듯 보입니다. 직선은 이러한 우리시대의 가치의 상징입니다. 누구도 이 상징의 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단기간에 무엇을 해내야 한다는 시간적인 부담감에 저와 여러분 모두는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삶의 스타일도 직선적인 삶을 추구합니다. 분명하고, 명료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개할 수 칼 같은 명철함을 지닌 직선적인 사람이 조직에서 더 능력을 인정받는 반면, 두루뭉술한 사람, 모난 데가 없어 날카롭지 않은 서글서글한 사람은 조직에서 능력을 인정받기에 힘든 시대적 조건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조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연을 보면 직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것들은 대부분 직선이지만, 산이나, 나무나, 꽃잎이나, 구름이나 모든 것이 직선이 아닙니다.



      강화도 전등사를 방문했을 때 산등성이와 조화를 이룬 전등사 지붕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던 적이 있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본떠 그 곡선을 건축에 살린 것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전등사만이 아니라, 제가 가본 한국의 고찰 대부분이 그런 것 같습니다. 다만 요사이 절들은 도시의 대형교회와 마찬가지로 주차시설과 템플스테이용 숙박시설을 갖추느라 곡선의 미학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지만, 전통적인 사찰의 아름다움은 곡선의 아름다움에서 온다는 것을 여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곡선이 아름다운 것은 자연이 곡선으로 이루어졌고, 우리의 삶도 곡선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직선적인 삶을 추구하지만, 늘 곡선입니다. 지나 온 세월을 돌아보면 우리가 바라는 것만 이룬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지 않았던 삶의 조건들이 오늘 우리를 이 자리까지 이끌어 온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삶에 늘 햇빛이 들기를 기도했지만, 삶은 햇빛만이 가득하지 않았습니다. 원치 않는 먹구름이 낄 때도 있었고, 장대비가 내려 그동안 가꿔온 마음의 텃밭을 순식간에 망쳐버린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불평하고, 누군가를 원망했지만,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삶에 햇빛만이 아닌 구름과 비가 있었기 때문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5.

      햇빛이 계속되면 그 땅은 결국 황무지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바람대로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고, 직선적인 삶으로 우리의 삶이 바뀐다면, 우리의 삶은 사막과도 같은 황량함과 공허감에 시달릴지 모릅니다. 햇빛만이 가득한 곳에서는 풀 한 포기의 생명도 자라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움트는 땅은 역설적이게도 먹구름이 햇빛을 가리는 곳, 그리고 때로 언제 태양이 있었냐는 듯 짙은 비구름이 몰려와 우리를 절망의 심연으로 이끌어 내리는 곳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태양이 사라지는 경험이 없이는, 직선적인 삶의 추구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뼈저린 깨달음 없이는, 새로운 희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러한 환난을 기꺼이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희망은 이전에 우리가 바라던 희망이 아닌 새로운 소망입니다. 예전에 우리가 바라던 희망이 사라진 자리에서, 태양이 사라지고 먹구름이 드리운 자리에서 언젠가 다시 떠오를 태양을 바라보며 갖는 희망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희망 없는 희망’입니다. 희망이 없는 자리에서 믿음의 눈으로만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이며, 환난과 인내와 연단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나타나는 참 희망의 길입니다. 비록 내가 바라는 길이 내 눈 앞에 막혀 있지만, 그것 너머에 더 크신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만 선취되는 희망입니다.



      앞서 읽은 전도자 고백은 그러므로 허무주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인생이란 어차피 인과관계가 없는 것이니 성공적인 삶을 위한 노력을 포기하라는 뜻도 아니고, 인생을 달관한 듯 초월적 자세로 살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고통을 하느님의 사랑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햇빛만을 주시는 분이 아니며, 때로는 우리가 원치 않는 고통을 통해 우리를 단련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야말로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니 고통의 삶 전체를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자가 깨달은 삶의 진리이며, 바울이 환난을 자랑하는 이유입니다.


6.

      삶의 고난을 아름다운 노래로 바꾸는 것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에는 용기와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피할 수 없는 고난을 겪지만 이를 통해 우리의 신앙과 삶이 보다 성숙해 지기를 바라는 믿음의 결단 말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의 삶을 통해 체득하고 계신 내용의 확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날마다 이런 도전과 씨름하며 살아갑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삶의 조건 앞에서 불평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것 마저도 감사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될 것인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희망 없이 살아갈 희망’을 지닌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감사 뿐입니다. 감사와 또 감사뿐입니다. 이것을 놓칠 때 우리의 삶은 메마르며, 누군가를 향한 불평과 원망으로 병들어 갑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허락하심으로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가길 원하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절망 중 위로와 감사로 한 주를 살아가는 저와 신반포교회 교우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