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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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본문: 시편 80:1-7; 누가복음 1:46-55

설교: 홍정호 목사 (2021.12.19. 대림절 제4)

 

[그리하여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대림절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어둠을 밝히시는 주님의 빛이 우리 각 사람과 가정, 그리고 교회 위에 임하시길 기도합니다. 대림절의 전례색은 보라색입니다. 교회력은 사순절과 대림절에 보라색을 사용합니다. 보라색은 참회와 금식을 상징합니다. 사순절에는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대림절에는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결히 가꾸는 시기라는 의미가 보라색 전례력에 담겨 있습니다. 한 해의 끝에 이르러 조급해지고, 아쉽고, 때로는 들뜨기도 하는 마음을 고요히 가라 앉히고, 세상의 파도를 넘어오는 동안 흐트러진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시금 단정히 가꾸어 주님 앞에 서는 이 절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복음서 가운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곳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있어 강조점에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요셉의 의로움임마누엘약속의 성취,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언약의 성취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요셉은, 약혼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고 마리아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려 가만히 파혼하려 했습니다. 그러다 요셉은 꿈에서 주님의 천사가 전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1:20b-21)

 

잠에서 깬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마태는 이런 요셉을 가리켜 의로운 사람’(1:19)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이 의로운 사람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분의 뜻을 믿는 가운데 자신을 내려놓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평범한 가정의 아버지로 살아가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내려놓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뜻으로 삼아 순종했습니다. 그 꿈은 바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을 온 세상에 펼쳐내는 꿈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앞서 외친 꿈입니다.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3:4-5) 되는 꿈입니다. 요셉은 이 뜻을 위해 겸손히 자신을 내려놓았습니다.

 

요셉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의 모범을 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는것만을 하나님의 뜻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셉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하지 않는것 역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는 교훈을 배웁니다. 요셉은 당대의 관습에 따라 파혼을 하려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는, 신뢰가 깨진 약혼자와 파혼을 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으로 보입니다. 이 일을 두고 요셉을 비난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천사의 말씀을 받들어, 그는 마리아를 믿었고,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할 수 있었던 파혼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주님의 뜻을 받들어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복음서는 이런 삶을 의롭다고 칭합니다. 복음의 말씀은, 자기의 의로움을 만천하에 뽐내며 사방팔방으로 자기 의를 드러내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서는 위선자라고 칭하는 반면, 마땅히 내릴 수 있는 결단마저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내려놓고 순종을 택한 요셉을 향해서는 의로운 사람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삶이 진정으로 의로운 삶인지, 새겨볼 일입니다.

 

2.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전하는 또 다른 본문인 오늘 누가복음의 말씀 역시 마리아의 순종을 주제로 합니다. 요셉이 주인공인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복음에서는 마리아가 주인공입니다. 누가가 전하는 복음은, 명망 높은 다윗의 가문에 속한 요셉이라는 남자가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였던 유대 땅의 변두리인 갈릴리, 거기에서도 나사렛이라는 천대받는 동네의 한 여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마태복음의 탄생 이야기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강조하며 요셉의 혈통적 정통성을 드러내려는 시도와 대조적입니다. 누가의 탄생 이야기는 공간적 중심이 아닌 주변을, 남성이 아닌 여성을 이야기의 배경으로 택함으로써 약자들의 친구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를 찾아가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1:28) 인사를 전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를 향해 성령이 임하시어 아들을 잉태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정혼을 앞둔 마리아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학적 해석의 안경을 잠시 벗고, 마리아의 입장에서 인간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 일은 기뻐할 일도, 은혜를 입었다 할 일도 아닙니다. 당대의 율법적 관습에 비추어 보면, 이 소식은 기뻐하고 은혜를 입은 일이 되기는커녕, 죽임을 당할 일입니다. 신명기 율법은 한 남자와 약혼한 처녀를 다른 남자가 성 안에서 만나서 정을 통하였을 경우에, 두 사람을 다 성문 밖으로 끌어다 놓고,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22:23-24)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사 가브리엘이 전한 소식은, 일종의 날벼락 같은 사망 선고에 다름 아닙니다. 한 여인의 존재의 근간을 뒤흔드는 소식입니다. 기뻐할 일도, 은혜를 입었다 할 일도 아닌, 불명예를 안고 억울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릴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마리아의 응답입니다. 마리아가 말합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앞서 요셉도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기를 내려놓는 순종으로 의로운 사람이라 칭함을 받았지만, 마리아 역시 이 놀라운 소식 앞에서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응답하며,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 앞에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매년 만나는 성탄 이야기입니다만, 이 요셉과 마리아의 순종이 얼마나 깊은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붙잡는 사람의 결단이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시대 신앙인들, 특히 저를 포함한 우리 개신교 신자들이 가장 크게 잃어버린 보화가 바로 이 순종하는 믿음이 아닌가, 제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게 됩니다.

 

3.

 

우리 시대는 순종을 억압의 다른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세계 속에서 순순히 복종한다는 순종은 자칫 억압을 정당화하는 권력의 수사처럼 들리곤 합니다. 순종은 실제로 그러한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계몽되지 않은 이의 순종이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맹종(盲從)에 다름 아니며, 이는 신앙의 올바른 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이 있다 하더라도, 순종은, 신앙인의 삶에서 절대로 경시되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신앙 덕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숭고한 삶의 길에 나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순종하는 믿음은 억지로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그분의 뜻에 나를 맞춰 살아야겠다는 마음은 억지로 가질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순종은 하나님 은총에 눈을 뜬 삶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됩니다. 은총에 눈뜬 사람의 주체적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순종은 억압의 다른 이름에 불과합니다. 그럼 우리는 언제,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 수 있고, 그분의 뜻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전통적으로 신학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실 때, 이를 식별하는 세 가지 기준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여러 통로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이전에 없던 마음들, 이를테면, 신자가 되어 일평생 주님을 섬기며 살고픈 마음이 든다거나, 의심의 구름이 걷히고 복음의 말씀이 믿어지는 은혜를 체험하기도 하고, 주님의 일에 동참하고 싶은 열망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부르심은 내면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초대에 의해, 혹은 격려나 독려에 의해 전달되기도 합니다둘째는, 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도 내가 응답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때를 기다리실 뿐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너희는, 가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불러라“(55:6) 외친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나의 결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그분이 귀히 쓰시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마지막은, 교회의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응답해도, 주님의 몸인 교회가 이를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아무리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다고 말하고, 온갖 열심을 앞세워도, 교회의 축적된 전통 속에서 이러한 열심히 올바르게 식별되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 말할 수 없는 자기 열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나의 응답, 그리고 교회의 선택이 하나가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고 확신할 수 있으며, 그분의 뜻에 순종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세 가지 기준이 일치를 이뤄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신자가 된 것은, 내 선택의 결과만도 아니고, 교회의 강요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여러분과 제가 아멘으로 응답하고, 주님의 몸인 교회, 교회인 여러분이 우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4.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마리아는 은총에 눈뜬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존재의 기반을 뒤흔드는 천사의 소식 앞에서도,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합니다노래했습니다. 믿음의 길은, 내 뜻을 펼쳐나가는 삶이 아닙니다. 믿음의 길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겸손히 물으면서, 그분의 뜻에 내 뜻을 조율해 나가는 긴 여정입니다. 구상 시인은, ”은총에 눈을 뜨니라는 제목의 시에서, 하나님의 은총에 눈을 뜨니 모든 것이 새롭고,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노래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미합니다노래한 마리아의 찬미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시인의 노래입니다.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은총에 눈을 뜨니 / 구상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이 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써 감사하노라.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면 해가 서쪽으로 지고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기는

매한가지지만

 

출구가 없던 나의 의식(意識)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

 

대림절 마지막 주일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주님의 놀라운 일의 도구로 쓰임 받은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도 눈을 돌려 일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은총에 눈뜬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출구가 없던 나의 의식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하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던 시인의 노래가 오늘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의 노래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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