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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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밖에는, 나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본문: 시편 71:1-6; 누가복음 4:21-30

설교: 홍정호 목사 (2022.1.30. 주현 후 제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하는 속담을 내게다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하고 말하려고 한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 많은 과부 가운데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고침을 받았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1.

 

주현절 네 번째 주일에 빛 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에서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는데, 마침 우리도 설 연휴 기간에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부모님과 고향집을 떠나 인생 순례에 나선 이들이 부모님께로, 고향으로 돌아가 우리 존재의 근원을 살피며, 감사한 마음으로 서로를 격려하는 때입니다. 그런데 이런 명절의 의미가 언젠가부터 퇴색되고 있다는 것을 모두 느낍니다. 가족 간 사랑과 격려의 시간이 되어야 할 명절이 오히려 큰 스트레스 요인이 되어, 명절을 지나면 가족 불화와 갈등이 늘어난다는 기사도 종종 접하게 됩니다.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알고 사랑하는 관계인만큼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들 간 기대수준이 타인과의 관계에 비해 높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자기 자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모가 어찌 자기가 낳은 자식을 자기 자녀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그들은, 자녀를 하나님께서 잠시 맡기신 사람들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인이 될 때까지 정성껏 돌보고, 잘 먹이고, 좋은 교육시켜서 그들을 세상에 보내신 제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돕는 일을, 하나님께서 부모 된 이들에게 맡기신 책무로 여긴답니다. 그들이 자녀를 이런 마음가짐으로 대할 수 있는 이유는, 율법을 통한 뿌리 깊은 하나님 신앙 때문이겠습니다. 창조된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지만, 그 가운데 부모에게 잠시 맡기신 자녀는 더욱 특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맡겨주신 아이들을 성장하는 동안 잘 돌보다, 이제 성인이 되면 각자의 삶을 잘 살아가도록 삶의 바탕이 되어주는 것을 그들은 부모의 역할로 여깁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난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 역시 부모님을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특별한 인연으로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그분들에게 자기 인생을 전적으로 기대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성인이 된 자녀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이시지 부모님이 아니기 때문이겠습니다. 유대 신앙의 지평에서 볼 때에는 부모님도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이 필요한 유약한 한 인간이기에, 자녀들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데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가질 뿐입니다. 이런 유대인의 가족 문화는, 유교 문화에 뿌리내린 우리의 오랜 가족 질서가 해체되다시피 한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 신앙은 흩어진 가족을 하나로 묶는 단단한 끈입니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가족들이 함께 딛고 설 수 있는 든든한 토대입니다. 그런 가족이 바로 믿음 안에 하나 된 가족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 신앙 안에서 일치와 연합을 이룬 확장된 가족, 주님의 몸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번 명절에는, 하나님 안에 하나가 되어 서로를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며 더욱 사랑하고 감사하는 믿음의 가정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2.

 

오늘의 말씀은, 누가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나사렛 사람들의 첫 반응은,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한 나사렛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서 하나님보다 먼저 요셉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하고 주님께 무례한 요구를 했습니다. 그분의 능력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또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로서 유명세를 얻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향 나사렛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도, 그분만이 희망이시라는 기대도 없었습니다. 단지 믿음을 확인시켜 달라는 요구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 이들의 마음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말씀하시면서, 그들이 알고 있는 두 사람을 상기시키셨습니다. 바로 예언자 엘리야 시대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와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입니다.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혹시 눈치 채신 분이 계신가요?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주님 밖에는, 나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하는 간절한 소망과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입니다. 소망과 순종,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에게는 이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앞서 읽은 시인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 밖에는, 나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에게는 소망과 순종, 이 두 가지가 모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 밖에는, 나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하는 간절한 소망도 없었고, 그분 말씀에 순종할 마음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거기에서 아무 일도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자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주고, “진주를 돼지 앞에던지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7:6). 주님을 시험해 보겠다는 마음, 내가 욕망하는 바를 이루어주시면 그때 가서야 믿겠다는, 아니 믿을까 말까 생각해 보겠다는 마음가짐으로는 평생 주변을 겉돌 뿐입니다. “주님 밖에는, 나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하는 간절한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하나님께 매달리고, 그분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누구라 하더라도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기쁨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3.

 

나아만은 시리아의 장군이었습니다. 시리아의 장군이라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적국인 이방신을 섬기는 나라의 장수였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럼에도 열왕기하에서는 주님께서 그를 시켜 시리아에 구원을 베풀어 주신 일이 있었다”(왕하 5:1) 하고 전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적국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두고서, 열왕기하의 기록자는, 우리가 이겼다, 졌다, 그렇게 기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 세력과 비록 적대하지만, 그들을 적대자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에 속한 동일한 창조된 피조물로 보는 큰 역사적 안목을 지녔다는 사실에 탄복하는 대목입니다. 아무튼 나아만은 적국 시리아의 훌륭한 장수였습니다.

 

그런 나아만이 몹쓸 나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 온 한 소녀가 사마리아에 있는 예언자를 만나 볼 것을 권합니다. 평소 같았으면 포로 여자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겠지만, 나아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언자를 만나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무수한 전투를 치르며 마음이 굳어진 그였지만,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그는, 자신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을 떠나 어린 소녀의 말을 따라 예언자 엘리사의 집 문 앞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느 때처럼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왕하 5:9) 여전히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라는 사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먼 길을 온 장군에게 예를 갖춰 환대하기는커녕 나오지도 않고 사환을 시켜서”(10)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열왕기하 기록자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집 앞에 온 나아만과 그를 만나주지도 않고 사환을 시켜서메시지를 전달하는 엘리사의 모습이 여기에서 극적인 대비를 이룹니다. 사환을 시켜 전한 엘리사의 메시지란 것도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요단 강으로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10)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여러분이 나아만이라면, 이 모욕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장에 칼을 뽑아 진멸해 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나아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심히 불쾌했지만 그는 소란 없이 발길을 돌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아만은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어도,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정중히 나를 맞이하고,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하여, 나병을 고쳐 주어야 도리가 아닌가?”(11) 맞습니다. 그렇게 해야 도리입니다.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여기 있는 강물보다 좋지 않단 말인가? 강에서 씻으려면, 거기에서 씻으면 되지 굳이 여기에서 씻어야 하는가?”(12) 그 말도 맞습니다. 씻어야 병이 낫는다면 여기 더러운 요단강물보다는 깨끗한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의 물이 더 낫습니다. 나아만의 생각은 하나부터 열까지 지극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입니다. 틀린 말이 없습니다. 그렇게 돌아간다 한들 나아만을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엘리사의 무례함을 비난하고, 복수를 요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돌아가는 중에 나아만은 부하들의 만류를 듣고 다시 한 번 발길을 돌렸습니다. 한낱 포로 소녀의 제안을 듣고 먼 길을 떠나온 마당에 부하들의 제안이라고 무시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엘리사의 요구를 실행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찾아온 장수가, 그것도 엘리사를 만나지도 못하고 발길을 되돌리는 모욕을 당한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순종하기로 한 것입니다. “주님 밖에는, 나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하는 소망과 순종, 예수님은 사렙다 과부와 함께 나아만을 이 소망과 순종의 본보기로 나사렛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열왕기하는 “(나아만이) 하나님의 사람이 시킨 대로, 요단 강으로 가서 일곱 번 몸을 씼었다.”고 말한 후 곧바로 그러자 그의 살결이 어린 아이의 살결처럼 새 살로 돌아와, 깨끗하게 나았다.” 나아만의 행동과 결과 사이에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이 행동과 결과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나아만이 씻어낸 것은 단지 그의 병든 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지금까지 그를 있게 해 주고 지켜준 것들, ‘위대한 시리아의 장수 나아만이라는 이름을 벗어버리고 씻어내는 과정이었습니다.

 

자기를 감싸던 갑옷을 벗고, 나병으로 문드러진 알몸을 대할 때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몹쓸 병으로 건강을 잃은 나아만에게는 돈도 권력도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대한 장수 나아만이라는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마지막 허명(虛名)을 벗어버렸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예언자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바로 그 허명, ‘위대한 장수 나아만이라는 자기의 허명을 내려놓고, 야훼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라 요청한 것입니다. 더러운 요단강물에, 그것도 사람들이 다 알도록 일곱 번씩이나 씻으라는 무례한 요청은 바로 그 허명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순종했고, 예수님은 오늘 그의 소망과 순종을 들어 나사렛 사람들의 오만을 꾸짖고 계십니다.

 

4.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의 소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반드시 지켜내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있다면, 여러분에게 그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나사렛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꾸짖음이 우리를 향한 말씀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 밖에는, 나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고백했던 시인의 고백처럼,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의 순종처럼, 우리는 주님께 우리 인생의 소망을 두고 살고 있는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복음의 말씀을 거울삼아 흐트러진 우리의 옷매무새를 다듬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한 주간도 주님께만 소망을 두고, 복음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께서 약속하신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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