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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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16:8-14/ 요한 2:1-12

신반포교회 이계준 목사

 

1.

 지난 5월 21일에서 25일까지 4박 5일 일정으로 중국 장가계를 다녀왔습니다.  이 여행은 저의 신학교 동창들이 졸업 50주년을 맞이하여 홈커밍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우리 동기 동창은 본래 55명이었으나 10여명이 이미 유명을 달리하여 지금 40명 정도 생존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동창생 10명, 부인 8명이 여행에 동참할 예정이었으나 한 부부가 비자 관계로 출국 못하게 되어 16명만이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장가계와 원가계는 실로 그 규모에 있어서나 풍경에 있어서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명승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참으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도보로 등정할 코스도 많았으나 셰계에서 제일 긴 7.2키로의   케이불카와 그리고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절벽에 붙인 엘리베이터로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이에 건강한 사람만이 갈 수 있는 난코스도 많았습니다. 
   우리 일행은 대개 70세에서 85세까지 고령자들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허약한 사람은 약 10년 전에 중풍으로 반신불 수가 된 서 목사란 친구이었습니다.  그는 군목에서 제대하고 약 30년 간 기독교 중고등하교 교장으로 시무하다가 65세에 은퇴하고 일본에 있는 중고등학교에서 성경 교사로 활동하다가 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여행 계획을 할 때 서 목사도 간다는 말을 듣고 매우 걱정했습니다.  그는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우리가 열보 걸을 때 두 보정도 밖에 걷지 못하는데 어떻게 높은 산과 계단을 오르 내릴 수 있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 목사는 우리 여행 코스의 약 80% 이상을 소화해 내는 능력과 용기를 발휘하였습니다.  그는 때로는 휠체어와 가마에 의존하기도 하였으나 도로와 계단을 자력으로 천천히 걸으면서 아무런 불평도 없이 지냈습니다.  우리가 20대 젊은 나이로 만났는데 이제 은퇴하여 그는 휠체어를 타고 나는 그의 휠체어를 밀어줄 때 실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저는 그의 걷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몸도 불편하고 힘들고 짜증이 날 법한데 그는 한 거름 한 거름 천천히 걸었습니다.  마치 그의 모습은 깊은 생각에 잠겨서 순간마다 삶의 의미를 씹는 것 같기도 하고 묵상기도를 드리는 것 같기도 하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피땀을 흘리면서 갈보리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님의 모습같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밤에 호텔에서 친구들이 친교하는 시간에도 빠지지 아니하고 참여하여 새벽 2시, 3시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이 친구를 보면서 학생 때부터 성실하고 매사에 신중했던 그 모습이 평생 그를 지탱했고 지금 노후에 신병으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자기의 삶의 잔을 열심히 그리고 성실함으로 채우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나의 삶을 다시 한 번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빈 잔을 하나 씩 갖고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이란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채우듯이 각기 자기의 삶의 빈잔을 한 평생 채워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지식과 경험과 교훈으로 날마다 그 잔을 채우고 그것이 우리의 살과 뼈가 되어 성장하고 성인이 되어 자기 발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의 잔이란 물질로 공간을 채우는 것과 달라서 어제 채웠다고 오늘은 그만 채워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순간마다 숨쉬고 날마다 음식을 먹고 활동하는 것처럼 그것도 날마다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특징은 날마다 채워도 날마다 비어지기 때문에 한 순간도, 단 하루도 계울리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무의미와 심지어 허무감의 심연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삶의 잔은 무엇으로 채우는 것입니까?  사람의 관심과 형편에 따라 다양한 내용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보편적이고 기초적인 것이 아마도 물질, 지식, 명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 중국 여행에서 원시족이 사는 집단을 구경했는데 그들은 현대문화와 완전히 결별한 상태로 야생적인 생활을 하면서 만족하게 살아가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면에 우리 현대인은 값진 것으로 자기의 잔을 태울 때  삶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한 어떤 사람은 그것으로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문에 세상의 귀한 것들로 삶의 잔을 채우며 남 부럽지 않게 사는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모두가 고민과 공허와 절망을 느끼고 인생을 포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입니다.
   삶의 잔이란 날마다 채워야 하는 것이고 또한 날마다 채워도 넘치기는커녕 항상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삶의 원리를 터득하지 못하고 그 잔을 하루 아침에 채우려고 합니다.  특히 성격이 급한 우리 한국인들이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등생일 것입니다.  빨리 빨리 하는 것은 요즘 가전제품의 변화처럼 기계적이고 생산적인 것일 때는 어느 정도까지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보람있게 하고 영글게 하는 데는 비록 광속을 동원한다고 할지라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빨리 걷고 뛰고 난다고 할지라도 삶의 잔은 업질러 지거나 또는 계속 공허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채우느라고 헛수고를 반복할 따름입니다.  그것은 마치 학문의 ABC도 모르는 학생이 제아무리 고등학문을 배운다고 할지라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급함이 삶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명상하며 순례자의 길을 천천 걷는 사람에 비해 삶의 잔을 더 많이 채운다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잔이란 양적으로가 아니라 질적으로 채우는 것이고 보이는 것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의미와 가치로 채우는 것이고 시간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영원으로 채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양으로 채우는 잔은 금방 넘치는 것 같지만 다음 순간에 다시 공허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쾌락 후에는 반드시 공허감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이와 반면에 질적으로 채우는 잔은 날마다 채워도 넘치지 아니하고 항상 부족한 듯 하지만 채우는 일 자체만으로도 항상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채워지는 내용이 썩어 없어질 것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 곧 사랑과 신뢰, 이해와 관용, 희생과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친구들 사이에 고수톱 치는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놀이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웃으며 즐기면 그 놀이가 친교와 심지어 예배가 되고 기쁨과 감사가 우러나옵니다.  이와 반면에 판돈에 관심이 쏠릴 때 따면 기분이 좋고 뗏기면 불쾌한 결과를 낳게 되고 결국 돈 잃고 기분 잡치고 인격과 친교마저 망가지는 밑지는 장사를 하게 됩니다.  삶이란 우리의 잔을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우리는 속물이 되기도 하고 성자가 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3.

 시편 116:8-14에서 시인은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에 감격하면서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당한 모든 고난을 불만과 불평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그를 창조하시고 삶을 지탱해 주시며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께 의지하여 고난을 극복하므로 구원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시인은 자기의 삶의 잔을 가장 순수하고 선한 것으로 채우려고 노력하였을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신앙과 성실한 생활 그리고 이웃과 사회에 대한 책임 등 성숙한 인간으로써 마땅히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모두  실현하고자 최선을 다 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잔 속에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인 욕망과 갈등, 질병과 고통, 가난과 억압, 전쟁과 죽음 등이 날마다 엄습하는 것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는 바로 이 역경의 삶 한 가운데서 생명의 근원, 사랑의 근원,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삶의 자유와 해방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삶의 잔을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것으로 채우지 아니하고 믿음안에서 순수하고 영원한 것으로 채웠기 때문에 구원의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2:1-12에는 예수의 첫 기적인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대로 일꾼들이 항아리에 물을 채운 다음 떠서 하객들에게 갖다주었더니 그것이 좋은 포도주로 변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은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니라 그 속에 깊은 뜻이 들어 있는 상징적 표현임을 잊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그 뜻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삶의 잔을 순수한 물로 채울 때 주님은 그것을 좋은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성실함을 보시고 우리의 인격과 삶을 새롭게 창조해 주셔서 새로운 안목으로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며 보람찬 인생을 향유하도록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타에게 향기와 맛을 제공하는 귀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반면에 우리가 제아무리 세상적인 것으로 삶의 잔을 채운다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어떤 변화 없이는 개종 이전의 바울처럼 삶의 의미나 보람이나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잔치하듯 흥겹게 살아가면서 시간과 공간을 화려하게 메꾼다고 할지라도 긴 하루의 일정을 끝내고 피곤한 몸으로 잠자리에 누울 때 입에서는 도토리처럼 떨떠름한 쓴맛만 생길 따름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잔에 물이 물대로 남아 있는 한 우리의 모든 수고는 잠언의 말씀처럼 헛되고 헛되다는 말입니다.  물론 어떤 스님의 말처럼 “물은 물이고 산은 산”임에는 틀림 없지만 잔의 물이 그대로 있을 때와 포도주로 변했을 때의 물과 산은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아이와 어른의 차이이고 각성 이전과 각성 이후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속수무책으로 혹은 아무런 책임의식이나 노력 없이 믿음에 의존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스스로 우리에게 주어진 잔을 최선을 다 해 채우기를 고대하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어진 생활 속에서 좋고 아름답고 믿을만 한 것으로 잔을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잔을 채우는 것은 한 순간이나, 몇 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평생을 두고 조금 씩 그러나 끊임 없이 성실하게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허느님은 우리의 마음과 뜻을 보시고 그의 은총으로 잔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시는 것으로 믿습니다.  그 때 우리는 “나의 잔이 넘치옵니다”고 하는 시편의 노래를 직접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19세기 영국의 문호 헨리 데이비드 소로라는 사람은 1854년에 월든(Walden)이란 작품을 펴냈습니다.  그 책은 그가 직접 오두막을 짓고 계절에 따른 호수와 숲의 변화를 관찰하면서 진정 가치 있는 인생과 진리에 관해 사색한 기행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2년 2개월 동안 거기서 가장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면서 자연 속에서 어떻게 우주와 신과의 합일을 이루고 진리를 추구했는지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책 중에는 이런 제목이 있다고 합니다.  “나는 어디에 살고,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저의 경우는 평양, 서울, 미국 그리고 일산에서 살아 왔습니다.   거처에 관한 한 대답은 분명하기 때문에 저나 여러분에게 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질문은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을 멈추게 하고 인스턴트 대답이나 임기응변이 없는 한 즉각적인 대답은 극히 어렵게 만듭니다. 
   그런데 소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주도면밀하게 살고 싶었다.  군더더기를 다 떼어낸 삶의 정수만을 대면하고 삶이 가르쳐 주는 바를 배우고 죽을 때가 되어 내가 진정으로 살았구나, 하는 느낌을 갖고 싶어 나는 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삶의 골수까지 빨아내는” 방법을 터득하고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어진 삶의 잔을 채운다는 것은 어디에 살았고 지금 어디에 사는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았고 또한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이 그냥 숨쉬고 신진대사하는 물리적인 생명유지가 아니라면 참다운 목적의식을 가지고 가치 있는 것으로 삶의 잔을 채워 간다는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삶의 순간 순간을 정화된 의식을 가지고 내 존재와 행동의 의미를 물으면서 살아가는 자각적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소로처럼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소로가 아니기 때문에 꼭 같은 대답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각기 자신의 대답만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공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옛날 바다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후(魯侯)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구소의 음악을 연주해 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 하고 슬퍼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모든 동물들이 제각기 천부의 본성이 있는데 새를 사람으로 취급하거나 더욱이 극빈으로 대접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뜻입니다.  곤란할 정도가 아니라 새를 죽여 버리는 결과를 낳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살아갈 때 남처럼 살려고 모방하거나 또는 비본질적인 인간성을 따라서는 인간다운 삶의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하느님이 주신 성품과 능력을 찾고 개발해서 자기의 삶의 잔을 채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으로 잔을 채우고 있습니까?  날마다 생각하고 기도하며 순례하는 마음으로 잔을 채우고 있습니까?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순수한 물로 우리의 찬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느 순간에, 아니 날마다 하느님의 은혜로 삶의 잔이 차고 넘치는 영원한 기쁨과 삶의 맛을 향유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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