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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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주인

 

시편 26:1-12; 마가복음 10:13-16

설교: 홍정호 목사 (2021.10.3. 성령강림 후 제19, 세계성찬주일)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열아홉 번째 주일이며, 흩어진 세계교회가 주님의 한 몸된 교회임을 고백하며 한마음으로 성찬을 나누는 세계성찬주일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벌써 두 번째로 성찬식 없는 세계성찬주일을 맞이합니다. 세례와 성찬은 종교개혁 이후에도 개신교에 남은 두 개의 성사(聖事)입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나누던 담을 허물고, 성례와 일상의 경계를 통합해버린 우리 개신교 안에도 세례와 성찬만큼은 그 의미를 간직한 성례로서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2.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 앞으로 목회를 하게 되면 예배에 있어 설교와 성찬의 조화에 힘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너무 긴 설교는 핵심만 담은 복음 강해로 축소하고, 성찬은 온 교우와 더불어 매 주일 행하면서, 말씀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생각으로뿐만 아니라,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는, 말하자면 오감을 활용해 경험할 필요가 있다, 생각해 왔습니다. 웨슬리가 성찬을 강조한 이유, 감리교회가 종교개혁의 유산을 계승하는 다른 개신교 분파들에 비해 말씀과 성찬의 균형을 강조하는 이유 역시 말씀의 전인적 수용에 있습니다. 이렇듯 중요한 성찬이 코로나로 인해 중단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여건이 개선되면, 새로운 환경에서 성찬식을 행할 수 있도록, 방법을 모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세계성찬주일을 맞아 오늘은 성찬에 담긴 사상사적 의미를 간략히 말씀드려고 합니다. 신학적 의미는 설교와 속회 성경공부 등을 통해 여러 번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오늘은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왜 성찬이 우리 시대에 더욱 중요한 신앙 의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잠시 말씀을 나누고, 본문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성찬에는 예수님 십자가 사랑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내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우리에게 개인의 양심의 자유라는 근대적 주체성의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 집단이 아닌 개인’, 전통문화와 도덕에 대한 맹종을 거부하는 양심’, 그리고 이렇듯 개인의 양심에 따른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즉 개인의 양심의 자유에 관한 근대 자유주의 정신의 형성과 전파는 개신교의 확산과 맞물려 이루어진 역사의 발전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이런 자유주의 정신만으로는 인류가 처한 공동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느끼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지구 환경의 문제, 훼손된 공정과 정의의 문제, 경제적 양극화에 따른 불평등 해소의 문제 등 개인의 양심의 자유라는 자유주의적 주체의 이상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새로운 도전들에 직면해서 자유주의 이후를 모색해야 한다는 사상가들이 출현하기 시작한 지 벌써 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사상가들은, 주체성보다 타자성의 길을 모색해 왔습니다. 근대 자유주의적 발전 과정에서 강조된 주체성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공동체, 의식, 그리고 평등에 초점을 맞춰 타자의 목소리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그 중요성을 재발견하게 된 교회의 의례가 바로 성찬식입니다. 교권을 타파하고, 개별적 주체의 양심의 자유를 힘주어 강조해 온 우리 개신교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수동성에 주목하고, 그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면서 일치와 화합을 이루는 공동체성을 재발견하고, 그리고 무분별한 개인의 자유보다는 개인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 중요성을 재발견하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성찬의 의미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찬식에는 이렇듯 양심자유라는 근대성의 이상과 대칭되는 공동체믿음책임이라는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저의 해석입니다만, 저는 이런 균형과 조화, 주체성과 타자성의 조화, 자유와 책임의 조화,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야말로 우리 시대 개신교에 꼭 필요한 실천 덕목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이 중요한 만큼 공동체도 소중합니다. 나의 양심이 중요한 만큼 한마음이 되는 믿음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유가 소중한 만큼 책임도 중요합니다. 재독 철학자인 한병철 선생은, 우리 시대의 문제를 자유의 과잉, 혹은 자유의 소외로 진단합니다. 자유가 없어서 문제인 시대가 아니라, 무분별한 자유의 과잉, 그리고 가짜 자유가 판을 치는 자유의 소외가 진짜 문제라는 지적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성찬에 담긴 이러한 수동성,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내 안에 모심으로써 그분의 살과 피와 한 몸 되기를 바라는 성찬의 수동성과 타자성에 담긴 의미를 재발견하고, 공동체의 믿음과 책임의 가치를 우리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유산으로 계승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성찬에 참여할 수 없는 세계성찬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만, 성찬이 갖는 중요성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감사와 기대로 맞이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3.

 

오늘 본문은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짧지만, 이 본문은 마가복음의 전체적인 서사 구조 속에서 이해할 때 전달하고자 메시지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다음 주일에 설교하게 될 본문, 부자 젊은이의 이야기와 대칭을 이룹니다. 또한 본문에 앞선 대화들의 맥락에서 어린아이를 축복하시는 예수님의 오늘 이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런 사람들을 꾸짖었고,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보시고 화를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노하셨다는 표현은 마가복음에 딱 두 번 등장합니다. 하나는, 마가복음 3장에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손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는 것을 지켜보다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서 화를 내셨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3:5)하셨다고 전합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 본문입니다. 어린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막는 제자들을 향해 노하셨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노하신 이 두 개의 본문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회의 약자들, 비존재로 취급당하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는 행위에 대해 화를 내셨다는 점입니다.

 

어린이를 축복해 달라고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게 무슨 잘못이라고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랐을까, 오늘의 시각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시 어린이들은 있지만 없는 존재’, ‘없이 여겨지는존재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정한 존재까지는 아니었지만, 어린이들은 그 사회의 보이지 않는 존재, 목소리가 없는 존재, 있지만 없는 것 취급을 당하는 비존재의 대명사였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남자와 여자를 동등한 존재로 여기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를 두고 모세의 율법을 들먹이며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심각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 어린이를, 지금 모세의 율법의 타당성을 논하는 엄중한 자리에 뜬금없이 애들을 데리고 와서 판을 깨고 있으니,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요즘도 카페에 노키즈존이라고 해서, 애들이 시끄럽게 뛰어다니지 못하도록 아예 출입구에 써 붙여 둔 카페들도 있는데, 당시의 관점으로는 이런 엄숙한 자리에 애들을 데려오는 걸 막은 제자들이 오히려 칭찬받을 일을 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칭찬은커녕 화를 내셨습니다. 저런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많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셨는데도, 제자들은 몸에 익은 문화적 관습으로 인해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오늘 본문에 앞서 마가복음에 어린이가 등장하는 본문이 있습니다. 933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누가 크냐를 두고 다투는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그는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9:35) 그러신 후에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본보기 삼아 제자들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 다음 그 어린이를 꼭 껴안아 주시고, 제자들에게 보란 듯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9:37)

 

여기에서 어린이는 누구입니까? 꼴찌의 대명사입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제자들은 지금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존재, 있으나 없이 여겨지는 존재가 바로 어린이입니다. 예수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말씀하시고서는, 어린이 하나를 세우셨습니다. 어린이는 누가 보아도 그 사회에 속한 꼴찌 중에 꼴찌, 약자 가운데 약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 말씀은 완전히 잊고 어린이들을 데려오는 이들을 꾸짖는 제자들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화를 내셨습니다.

 

예수님이 노하신 이유는, 이 어린이들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못하느냐 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회에 꼴찌들을 어떻게 대하느냐, 불편하고 대면하기 힘든 그들을 없는 존재로 여기느냐, 아니면 예수님을 대하듯이 대하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을 결정짓는 매우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노하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적으로 구성되기 이전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마가복음은, 여러분들이 아시듯이, 복음서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이고, 마태와 누가가 마가에 기록된 말씀을 참고했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님의 목소리가 가장 선명히 드러나는 복음서입니다. 그렇기에 마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신학적으로 더욱 무거운 의미를 갖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어린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꼴찌들입니다. 없는 사람 취급당하는 비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시종일관 이런 약자들에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성경을 무슨 계급적 시각으로 해석하려고 해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복음서를 읽다 보면 저도 어떤 부분은, 받아들이기 껄끄럽고 불편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달리 해석할 다른 길이 없습니다. 약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우선적 관심이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우선적 관심은, 가진 자들, 높은 사람들에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 꼴찌로 여겨지는 이들, 몸도 가난하고 마음도 가난한 이들, 이름 없는 무리들(오클로스), 그들에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영접하는 것이야말로 당신을 영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영접이라는 낱말은, 헬라어로 덱세타이δέξηται라는 낱말인데, 그 뜻은 그냥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인다, 환영한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한다,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사람을 공동체가 품어 안아 마치 자식을 기르듯이 그를 양육하고, 그를 하나님 나라의 길로 인도하도록 최선을 다할 때 그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5.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은, 때로 너무 쉽고 명료해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곤 합니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우선적 관심, 그 사회의 꼴찌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명료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에서도 더욱 선명히 그 목소리를 읽어낼 수 있는 말씀입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입니까? 제자들처럼 누가 더 크냐를 두고 다투는 사람이 아닙니다. 앞으로 어느 자리를 차지할까, 서열을 어떻게 정할까,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권력을 어떻게 나눠 먹을까, 제자들의 머릿속을 온통 채운 이런 생각들 앞에서 예수님은 화를 내셨습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을 눈앞에 두고서도 딴 생각만 하는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외로우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정말로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바로 이런 꼴찌들이요, 그런 어린이와 같은 이들을 주님 모시는 영접하는 이들이라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아멘으로 화답하며 이를 실행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이런 마음으로 당신을 따르는 이들 곁에 흡족한 마음으로 함께 계십니다.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하신 예수님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될 때 우리는 예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복음의 말씀 가운데 한 주간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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