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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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사는 길`

이 원 규 목사(감신대 교수)

(본문)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 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요 12: 24-25).


우리는 모두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힘들게, 때로는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행복한 삶을, 때로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이 때로는 어렵게, 때로는 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미있게 살 때는 “인생은 즐거워” 하고 말하지만, 삶이 힘들 때는 “산다는 것이 뭔지,” “죽지 못해 살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지” 하고 말합니다. 한편 도인이나 철학자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평생 고뇌합니다.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삶을 즐기며 살아 있다는 것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거꾸로 매달아도 사는 세상이 낫다.” “산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두 아무리 고생스럽고 천하게 살아도 죽는 것보다는 살아 있는 것이 훨씬 낫다는 말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낙심하지 말고 열심히 사는 것을 한국인은 미덕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래서 ‘절처봉생’이란 말이 있습니다. 궁박한 끝에는 반드시 살 길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람직하지 못한 삶을 사는 경우 ‘취생몽사’라고 표현합니다. 아무 뜻과 이룬 일도 없이 한 평생을 흐리멍덩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입니다. “산 사람은 아무 때나 만난다.” 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어느 때 어디선가 만나게 되니, 다시 안 볼 것처럼 야박하게 굴지 말라는 뜻입니다. 한편 논어에는 ‘조문석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침에 도를 들어 깨달았으면 그날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말인데, 이것은 도사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에게나 해당될 법한 이야기입니다.
산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는 것,’ 삶에 대하여는 많은 위인들, 문인들이 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사는 것에 대하여 비관적으로, 혹은 자조적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콜리지는 “만나서 알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모든 것이 인간의 슬픈 이야기이다”라고 했습니다. 조지훈은 「삼도주」(三道酒)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어떤 이 있어 나에게 묻되, ‘그대는 무엇 때문에 사느뇨?’ 하면 나는 진실로 대답할 말이 없다. 곰곰이 생각하니 살기 위해서 산다는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산다는 그것 밖에 또 다른 삶의 목적을 찾으면 그것은 사는 목적이 아니고 도리어 사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삶에서 부질없이 허다한 목적을 찾아낸들 무슨 신통이 있겠는가. 도시, 산다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사는 판이니 어째 살고 왜 사는 것을 모르고 산들 무슨 죄가 되겠는가.”
삶은 살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시인 롱펠로는 「삶의 찬가」에서 “내게 말하지 말아다오. 슬픈 가락의 노래로, 삶은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라고 읊고 있습니다. 김상용은 「남으로 창을 내겠소」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라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 건 웃지요.” 푸시킨은 이렇게 말합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멀지 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이 순간에 지나가 버리고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이 되리니.”
“살다”라는 말이 대백과사전에는 여덟 가지 의미로 나와 있습니다. 첫째, “목숨을 이어 나가다”라는 뜻이 있는데, “살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해라”와 같은 용법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둘째, “어느 곳에 거주하거나 거처하다”의 의미로, “시골에서 살다”라는 말이 그 예가 될 것입니다. 셋째, “생활을 영위하다”라는 뜻으로, “검소하게 살다”라는 말이 그 예가 될 것입니다. 넷째, “글이나 그림이 생생한 효과를 내다”라는 뜻으로, “이 한 구절 때문에 이 시는 살았다”와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다섯째, “바둑, 장기에서 돌, 말이 죽음을 면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섯째, “소용, 효용, 쓸모가 있다”는 뜻으로, “이번 실패는 산 교훈을 주었다”와 같은 경우에 쓰이는 말입니다. 일곱째, “일정한 자리에서 근무하거나 일정한 직책, 신분으로 지내다”라는 의미로, “벼슬을 살다”와 같은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여덟째, “(징역 따위를) 치르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산다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생계나 거주, 목숨부지 등의 의미가 아니라 삶을 영위하고 의미와 보람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살아감’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생존 자체가 너무 힘든 사람들에게는 삶의 의미라는 것 자체가 사치스러운 생각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행복한 자에게는 너무나 짧고, 불행한 자에게는 너무나 길다”라는 말이 있고, “죽으려고 하기보다는 살려고 하는 편이 대개는 훨씬 용기를 필요로 하는 시험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삶은 모든 인간에게 단 한 번 주어지는 기회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이란 그저 주어진 것, 우연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원해서 세상에 나온 것도 아니고, 내가 태어난 것이 나의 결단과 의지로 된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운명을 탓하기도 하고 한스럽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우리를 세상에 내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분명히 뜻이 있으셔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고 살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언젠가는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겠지만,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기대하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철학자 베이컨은 사람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 바 있습니다. 하나는 거미와 같은 인생입니다. 거미줄을 쳐 놓고 기다리다가 벌레가 걸리면 가서 진을 빨아먹는 것이 거미입니다. 때로는 무위도식하고 때로는 남을 이용하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여기 속합니다. 둘째는 개미와 같은 인생입니다. 개미는 열심히 일합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수고하고 노력하는 것은 모두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베풀 줄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 이런 유형입니다. 셋째는 벌과 같은 인생입니다. 벌은 부지런히 일하지만 꿀을 사람들에게 제공합니다.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하면서 남을 돕고 베풀어주는 유형의 사람이 이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세 유형의 사람들이 모두 수고하는 삶을 살지만, 거미 같은 인생은 그 수고가 자신을 위해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으로 나타나고, 개미 같은 인생은 자신만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있으며, 벌과 같은 인생은 남을 위해, 모두를 위해 애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체 삶에 있어 거미 같은 인생은 없어야 할 사람, 개미 같은 인생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사람, 벌과 같은 인생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참으로 사는 것은 벌과 같은 인생을 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참으로 사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참으로 사는 길은 첫째로, 욕심을 버리고 만족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욕심을 가지게 되면 결코 만족하는 삶을 살지 못하며, 따라서 자신을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앤소니 드 멜로의 책 『종교박람회』에 「만족한 어부」라는 글이 나옵니다.

북방에서 온 부자 사업가는 남방의 어부가 자기 배 곁에 드러누워 빈둥빈둥 담뱃대나 빨고 있음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고기잡일 안 가시오?”
“오늘 몫은 넉넉히 잡아 놨습죠.”
“필요한 것보다도 더 많이 잡으면 되잖소?”
“그래서 뭘 하게요?”
“그래서 돈을 더 벌 수 있지요. 그 돈으로 당신 배에 알 맞는 발동기를 살 수 있고, 그러면 더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더 많이 잡을 수 있고, 그러면 또 돈을 더 장만하여 나일론 그물을 갖출 수 있고, 그러면 또 더욱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고, 그만큼 돈을 많이 벌면 얼마 안 가서 어선 두 척을 살수도 있겠고.... 그러다 보면 거대한 어로 함대까지 거느리게 될 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되면 당신도 나처럼 큰 부자가 되는 거요.”
“그러고는 또 뭘 하죠?”
“그러고는 편안히 앉아 쉬면서 삶을 즐길 수가 있지요.”
“당신은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지금의 나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삶이 즐거울 수 없습니다. 지금의 삶을 즐길 수 있기 바랍니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즐기겠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돈이 있어도 즐길 수 있는 정력이 없어서 즐기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일 안하고 놀라는 뜻은 아닙니다. 노력하는 가운데 현재의 삶에서 의미를 찾고, 지금의 삶에서 행복을 만들라는 말입니다.
마음을 한번 비워 보시기 바랍니다. 욕심을 버려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있는 것으로,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편해질 것입니다. 사는 것이 짜증나고 무의미하지 않을 것입니다. 돈, 자리, 이름에 지나친 욕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평생 그것을 추구하다가 좋은 세월 다 보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집착하면서 혼자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힘들어 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남들에게 민폐 끼치고, 다른 사람들까지 힘들게 만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일은 걱정 말라고.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고(마 6: 34). 욕심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지금의 삶도 살만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는 순간 우리는 남부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열이 생겨도 만족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 열을 만드는 동안 그의 삶에는 낙이 없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은 열을 만들면서 완전히 소진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사는 가장 기본적인 길은 자신의 삶에 만족하면서 오늘을 즐기는 일입니다.
참으로 사는 길은 둘째로,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족하며 사는 것보다 한 단계 위의 삶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잘 산다는 것은 대개 경제적인 풍요를 의미합니다. 좋은 집에, 좋은 차에, 좋은 가구에, 좋은 가전제품에, 좋은 옷에, 모든 좋은 것을 소유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사회적으로도 부유한 사람은 존경은 아니라 하더라도 선망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주변의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배가 아프기도 하고 샘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능력, 실력도 있어야 하고, 노력도 엄청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운도 따라야 하고, 수고한 만큼의 보상이 정당하게 이루어지는 정의로운 사회 풍토가 조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편법과 불법으로 돈을 벌어 잘 살고 있습니다. 남을 속이고 빼앗고 훔치고 하는 식으로 축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 사는 것과 바르게 사는 것은 다릅니다. 물론 바르게 살면서도 잘 사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자체가 모순 덩어리이고 부조리가 너무 만연하여 착하고 양심적인 사람이 잘 살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잘 사는 사람들 가운데는 상당수가 정당하지 못하게 잘 살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잘 사는 사람보다는 바르게 사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말도 그렇습니다. 말 잘 하는 사람은 수다쟁이라는 소릴 듣기 쉽지만 바른 말 하는 사람은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옳지 않게 잘 사는 것은 참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한 젊은 어부가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그만 배가 뒤집혀 물에 빠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때 상어가 달려들어 그를 물었습니다. 다른 어부들에 의해 겨우 구조되어 병원으로 옮겨져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그의 아내는 놀랐지만 생명은 건졌다는 말에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사가 그녀에게 충격적인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남편이 목숨을 건지기는 했으나 상어가 남자의 그 부분을 물어뜯어 앞으로는 남자 구실을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그 젊은 부인이 지른 외마디 소리, “살아도 못살아!”
사실 우리 주변에는 살아도 못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께서도 가르치셨습니다.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 가고. 모든 것을 소유해도 가장 중요한 것을 잃는다면 그것이 사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른 마음이요 의로운 행위입니다. 바르게 사는 사람은 없어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니 바르게 살 수만 있다면 가장 많은 것을, 가장 큰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옳은 일을 하고, 바른 말을 하며 의롭게 사는 것, 이것이 참으로 사는 길입니다.
희랍시대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콩꼬투리를 저녁밥 삼아 먹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다른 철학자 아리스토포스가 보았는데, 그는 왕에게 아첨하며 안락하게 사는 터였습니다. 아리스토포스가 말하기를, “왕에게 고분고분할 줄 알면, 그 따위 형편없는 콩꼬투리나 먹고살지 않아도 되련만.” 그러자 디오게네스가 대답하기를, “콩꼬투리를 먹고 살 줄 알면 왕에게 아첨하지 않아도 되련만.”
과연 누구의 삶이 참으로 사는 길입니까? 옳지 않게 잘 사는 것은 “살아도 못사는” 삶입니다.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살고, 옳은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삶, 옳은 일에는 목숨 걸고 그것을 지키려는 삶,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사는 길입니다. 바르게 살다 보면 핍박을 받는 수도 있고, 가난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만족할 것이고,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하는 나라가 그들의 것”(마 5: 6, 10)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르게 사는 사람은 영적인 삶으로 풍족할 것이고, 하나님의 큰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잘 살기보다는 바르게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바르게 살다 보면 잘 사는 길이 열릴 수도 있습니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해도 우리는 바르게 살면서 참으로 사는 길을 가야할 것입니다.
참으로 사는 길의 세 번째 방식은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르게 사는 것보다도 한 차원 더 높은 삶입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사는 길이 이것입니다. 여기에는 나보다 너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사랑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더불어 사는 삶은 나누어주는 삶이요 베푸는 삶입니다. 이것은 가장 고상하고 숭고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디킨슨의 「만일 내가 한 마음의 상처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이라는 글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만일 한 마음의 상처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일 한 생명의 고통을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내가 한 사람의 고뇌를 식힐 수 있다면, 또는 내가 숨져 가는 한 마리 물새를 그 보금자리에 다시 살게 한다면, 나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가장 보람된 삶, 가치 있는 삶은 나의 것을 내놓아 다른 사람도 함께 살 수 있게 하는 일입니다. 나누어주는 삶은 대신에 나에게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가난한 사람을 돌봐주고 약한 사람을 보살펴 주었을 때 우리는 어떤 느낌을 갖게 됩니까? 큰 기쁨과 보람을 느끼지 않습니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행 20: 35)는 사도 바울의 말은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도를 깨친 수도자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저는 풍족한데도 비참하네요. 왜 그럴까요?”
“돈벌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사랑하기에는 너무 적은 시간을 쓰기 때문이지요.”
사랑을 베푸는 일, 그것은 너도 살리고 나도 참으로 사는 길입니다.
그러나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때로 자기 헌신과 희생이 요구될 수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경우 남을 살리려다 자신의 목숨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난 해 일본에서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감동을 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잘 아는 대로 고려대를 휴학하고 일본 유학을 떠났던 아름다운 청년 이수현씨 이야기입니다. 그는 술 취해 지하철 플랫폼에서 통로로 떨어진 어떤 사람을 구하려고 뛰어 들었다가 열차에 치어 죽었습니다. 전혀 관계없는 사람인데,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인데 오직 한 마음, 그를 구해야겠다고 뛰어든 그 청년, 이런 일을 우리는 살신성인이라고 부릅니다. 남을 이용해서라도 돈벌고 출세하겠다고들 하는 세상,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 되고 안전하면 된다고들 하는 세상에서 이 청년의 자기희생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전, 현직 총리까지 조문하고, 모든 매스컴이 대서특필할 정도로 그의 희생정신을 기린 바 있으나 어쨌든 이것은 너무나 감동적인 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숭고한 정신은 나밖에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잠자는 영혼을 깨웠던 것입니다. 그의 27년의 짧은 생은 수 백 년의 생보다 값진 것이었고, 그 한 사람의 삶은 수 백 명의 삶보다 귀한 일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 13).
때로는 우리가 남에게 좋은 일을 베풀면 그 결과가 내게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가이드포스트(Guidepost)에 실렸던 실화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해안, 폭풍우가 세차게 몰아치는 어느 날 밤에 배 한 척이 조난을 당했습니다. 마을의 어부들은 난파선의 승무원들을 구조하기 위해 어선을 동원해서 밤새 바다 위를 헤맸습니다. 그들은 기진맥진했으나, 수많은 생존자들을 배에 가득 실었습니다. 더 이상 사람을 태울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들은 난파선의 한쪽 구석에 한 사람의 승무원이 쓰러져 살려 달라고 외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배에 더 태울 수는 없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그냥 해안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해안에 도착하자 모두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그 배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의 생존자를 살리기 위해 다시 그 난파선까지 다녀올 새로운 지원자를 찾았습니다. 폭풍은 계속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한 사람의 승무원을 위해 바다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젊은 청년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말리며 뒤로 물러서라고 그에게 간청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이미 바다에서 죽은 바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아들에게, 그의 형도 지난 해 고기잡이하러 원양어선에 올랐다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 사실을 상기시켰으며, 만약 너마저 바다에 나가 죽고 만다면 난 혼자 남게 된다고 애원하며 육지에 남아 있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젊은 청년은 마지막 한 사람의 생존자를 살리기 위한 구조작업에 나설 것을 고집했고, 결국은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바다를 향해 나갔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바닷가에 선 채로 여러 시간 애타게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구조선이 마지막 생존자를 태우고 돌아왔습니다. 그 생존자는 그 젊은 청년의 발밑에 거의 실신한 채 누워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그 아들이 돌아온 것을 보고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리고 그의 발아래 누워있는 생존자를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죽어 버린 것으로만 믿었던 그녀의 큰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젊은 청년은 알지 못하는 생존자를 구하러 나섰다가 결국 자기 형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남을 살리는 일은 나를 살리는 길이기도 합니다. 남을 돕는 일은 나를 돕는 길이기도 합니다. 비록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기는 하지만, 나의 것을 나누어주고, 남을 먼저 생각하며 그를 살리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는 길, 가장 값지고 귀하게 사는 길, 그것은 자기희생을 통해서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밀 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했습니다. 남이 아니라 내가 희생되어야 일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죽고, 내가 양보하고, 내가 내어놓고, 내가 희생할 때 모두가 살 수 있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 일은 한 번 해 볼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고. 내가 살아서도 살고 죽어서도 살 수 있는 길, 나로 인해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길,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사는 길의 극치요 절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얼마나 사는가 하는 것보다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얼마나 잘 사는가 하는 것보다 얼마나 값지고 귀하게 사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사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만족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잘 살기보다는 옳고 바르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나보다는 너를 먼저 생각하며 더불어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 모두 남은 인생, 참으로 사는 길을 갈 수 있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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