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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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입은 치유자`

심광섭 (감신대)교수

성경말씀: 예레미야 8장 18-22, 갈 6:17


바울은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 고백했습니다. 바울의 몸과 마음, 삶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은 박해로 생긴 상처가 깊게 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몸 전체로 예수를 따르고 증언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마치 문신이 몸에 새겨지는 것처럼, 그 받은 고난이 몸에 흔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흔적은 Stigma인데 사실 낙인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과거에 낙인이 찍히면 낙인찍은 사람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의 낙인을 가졌노라” 말할 때, 이 말은 결국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롬1:1)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다가 받은 어떤 상처, 상흔이 나 있습니까? 우리 보통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심지어 교회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상처를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지난 4월 토요일 가정학습의 날 독립문 공원, 독립 기념관을 방문했다. 초등학교 아들의 숙제를 도와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침 독립문 앞에서 민족민주열사 범국민 추모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모인 유가족들은 한결같이 깊은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식이나 형제가 죽은 원인을 아직도 밝히지 못한 채, 심지어 왜곡된 채로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상처가 더욱 크고 매우 깊은 것 입니다.

우리 모두 크든 작든 어떤 상처를 안고 사는 줄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생활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자식 교육, 혹은 사업이나 정신적인 문제로 인생 항해에서 좌초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일 때가 많습니다. 정말 이럴 때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라도 받고 싶고, 계시가 아니라면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어느 교회 교인들의 이야기입니다.
교회 평신도 지도자(장로) 한분이 횡령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진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럴 경우 그 가족은 더 이상 교회에 나오지 않게 되고, 그 교회 교인들도 이러한 사회적 범죄 사건에 대하여 수치감을 느끼거나, 심지어 정죄하기까지 합니다. 인간은 타인을 정죄함으로써 반대급부로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의로운 사람이다 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무의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 교인들은 자기 교회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계획을 잘 짜서 매주 그 사람의 가족을 방문해 이런 저런 형태의 도움을 주었던 것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비난하는 대신, 갇힌 사람과 그의 가족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기 위해 다가가는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그가 출소할 때 교회 임원들 모두가 감옥 문 앞에서 사랑이 담긴 포옹으로 이 출소하는 사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이 행위는 참 아름답습니다. 이 행위에서 우리는 복음이 몸으로 표현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의 말씀이 실현되는 사건인 것입니다(마 9:13).

그러나 실제적으로 교회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혼을 했기 때문에, 심지어 자녀가 일류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창피해서 못나온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혼을 경험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독화살들이 쏟아질 수 있고, 이로 말미암은 상처가 얼마나 더 깊어질 수 있는지를 예감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는 자신의 부상병들에게마저 사격을 가하는 유일한 군대이다” 부상병들, 깊은 상처가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또 한번의 일격을 가해 확인 사살을 한다는 말입니다.

육체의 상처는 흉터가 남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치료하면 건강해져 없어집니다. 그러나 마음과 영혼의 상처는 참으로 오래가는데, 그 상처가 치유되는 길은, 그 상처와 고통을 안고 새로운 비전과 꿈을 향한 개방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때 치유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겪는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다른 어려운 사람과 더욱 잘 공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결혼 혹은 성적인 문제들 때문에 그런 문제로 끙끙 앓는 다른 사람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불구 때문에 더욱 높은 산을 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약점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산산이 부서져 조각 조각난 파편들을 주워 모아 훌륭한 모자이크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분이심을 믿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파편이 된 우리의 삶을 모으시는 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총탄에 맞아 깊은 상처를 입은 우리 인간 죄인들을 한 온전한 인간으로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상처입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치유의 천사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선포되고, 받아들여지고, 실현되는 곳이락 믿는다.

인간은 상처받기 쉬운 존재입니다. 인간은 상처에 민감합니다. 인간은 작은 육체의 상처에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인간은 마음과 영혼의 상처를 받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상처를 받은 인간은 두 가지로 반응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는 안으로 자신을 향해 공격합니다. 그때 인간은 자기를 학대하거나, 깊이 좌절합니다. 다른 한편 밖으로 남을 향해 공격합니다. 그 때 인간은 자기가 받은 상처를 남에게 되갚는 것입니다. 받은 상처로 더 깊은 상처를 만드는 경우를 보복이라고 합니다. 상사에게 받은 억울함을 부하에게 배로 되갚는 식입니다. 우리 민족사에는 보복의 원한이 무섭게 서려있습니다. 멀리는 당쟁과 사화의 역사이고, 육이오 이후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무자비한 살육이 또한 민족적으로 받은 깊은 상처에 대한 보복입니다.

그러나 상처입은 자가 더 큰 상처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상처입은 치유자들이 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자각시키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개인적인 삶의 고통과 상처들을 치유의 영과 자원으로 변형시키는, 상처입은 치유자들인 것입니다.

미국의 감리교 목회학자 도날드 메서 교수가 처음 목회지로 파송받은 곳은 미국의 남부 다코다의 메마른 시골 자방의 작은 교회였습니다. 부임했을 때 교인들은 처녀 탄생의 신학적 의미를 놓고 논쟁을 벌리다 둘로 쪼개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웃끼리 갈라지고, 가족끼리도 서로를 멀리하는, 즉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메서 목사가 이 농가 저 농가 성도들을 방문하면서 경험한 것은 위기에 처한 신앙 때문에 느끼는 고뇌만이 아니었습니다. 부부간의 갈등, 정신적인 우울증, 그리고 비극적인 죽음의 경험 때문에 풀리지 않는 슬픔과 한으로 개인적인 고뇌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새벽 세시까지 잠을 이루고 있지 못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메서 교수는 그때 교인들과 목회했던 경험을 상기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 기독교인들이 보다 자비로운 사람들이 되는 것은 그들이 보다 윤리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와는 정 반대로 기독교인들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오는 자비의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 예언자 중에서 우리는 예레미야를 눈물의 예언자, 곧 자비의 예언자라고 칭합니다:
“나의 기쁨이 사라졌다. 나의 슬픔은 나을 길이 없고, 이 가슴은 멍들었다”(렘8:18).
예레미야는 나을 길이 안 보이는 슬픔, 멍든 가슴을 하느님께 호소합니다. 예레미야는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고 그는 왜 상처를 입었는가?

19 저 소리, 가련한 나의 백성, 나의 딸이 울부짖는 저 소리가, 먼 이국 땅에서 들려 온다.

(백성이 울부짖는다.) "이제 주께서는 시온을 떠나셨단 말인가? 시온에는 왕도 없단 말인가?"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신다.) "어쩌자고 조각한 신상과 헛된 우상을 남의 나라에서 들여다가, 나를 노하게 하였느냐?"

20 (백성이 또 울부짖는다.) "여름철이 다 지났는데도, 곡식을 거둘 때가 지났는데도, 우리는 아직 구출되지 못하였습니다."

21 나의 백성, 나의 딸이, 채찍을 맞아 상하였기 때문에, 내 마음도 상처를 입는구나. 슬픔과 공포가 나를 사로잡는구나.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하느님 앞에서 죽을 죄를 지어 벌을 받는 것이지만, 그러나 예레미야는 나의 백성, 나의 딸이, 하느님의 채찍을 맞아 상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마음도 상처를 입는 사람이었습니다.

22 "길르앗에는 유향이 떨어졌느냐? 그 곳에는 의사가 하나도 없느냐?" 어찌하여 나의 백성, 나의 딸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일까?

9:1 - “살해된 나의 백성, 나의 딸을 생각하면서, 내가 낮이나 밤이나 울 수 있도록, 누가 나의 머리를 물로 채워 주고, 나의 두 눈을 눈물 샘이 되게 하여 주면 좋으련만!” 예레미야는 백성이 당하는 고통과 상처를 낳게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을 한탄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습니다. 이 눈물이 하느님께 상달되지 않겠어요? 예레미야는 상처입은 치유자로서 고통의 흔적을 안고 있는 백성들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당신은 당신이 변화시키고자 하는 그 사람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 사람들을 부랑자처럼 취급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사랑도 치유도 제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직업에서도 상처입은 치유자의 치유적이고 구속적인 성격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미국의 한 법률학교의 좌우명은 “법률가는 치유자가 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법률가가 심판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치유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대법원장을 지냈던 워렌 버거는 미국 변호사 협회에서 연설을 하면서 법률가들이 소송을 능사로 여기기보다는 중재와 협상, 그리고 조정에 더욱 관심을 기울릴 것을 촉구했습니다.

또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상처입은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1) 장사를 하다보면 늘 접하게 되는, 물건을 슬쩍 훔쳐가는 사람들을 무조건 뻔뻔스런 범인으로 보지 않는 상인들,
2) 낯선 병원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고 슬퍼하는 가족에게 진심어린 위로의 말을 건네며 차타는 곳까지 그들과 걸어가는 간호사들,
3) 부정을 저지른 파트너에게 다시금 기회를 주는 배우자들은 상처입은 치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받은 상처를 보복의 에너지로 사용하지 않고 치유의 에너지로 창조하신 분은 종교적 성현들 가운데서도 볼 수 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받은 티벳의 고통을 대승적 사랑으로 실현하는 달라이 라마와
바로 예수님입니다.
- 예수의 산상수훈에 나타난 6개의 대립명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41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42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원수를 사랑하여라(눅 6:27-28; 32-36)
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상처입은 치유자가 될 것이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떨어졌는지 몰라도,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상처를 치유하고 상처입은 자들을 온전케 할 유향이 가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유향이 있네! 죄로 병든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유향이 있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입은 상처를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리고 그 상처를 더 깊은 상처를 내기 위해 되 메기지 맙시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조차 상처를 갖고 계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도 옆구리에 찔린 창의 흉터를 갖고 계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상처를 의심 많은 도마에게 보여주시고,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네가 못 믿겠으면 와서 만져봐라 그러셨습니다. 우리의 상처가 남을 구원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하다 입은 박해와 상처를, 상처 주는 것으로 되갚지 않고 상처입은 치유자가 됨으로써,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과 낙인이 찍혀있음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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