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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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과 선택하심 `

이계준 목사

말씀:시편 116:8-14, 벧후 1:3-11

이제 대통령 선거도 불과 40여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5-6명의 출마자들이 등장하여 국민의 부름에 응하기 위하여 선택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국민의 부름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거나 착각이지만 그들을 대통령으로 선택하는 것은 국민의 자유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대통령을 부르는 것과 선택하는 모든 권한은 국민의 것입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이 가지고 행사하는 신성한 권리와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가 부르고 선택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부모를 매체로 해서 세상에 태어나고 사회란 삶의 터전에서 자라나고 활동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의 존재를 근원적으로 이 세상에 부르고 선택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선택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할 뿐만 아니가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부르시고 특별한 사명을 주시기 위해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부르시고 선택하여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을 삼으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룩하신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늘의 본문에서 하느님께서 자기가 부르시고 택하신 자들에게 어떤 일을 하시며 관계를 맺으시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 된 우리들이 받는 놀라운 은혜를 확인하고 감사하는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1. 사도 베드로는 1:3a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자라나면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과 우리 마음속에 양심과 하느님이 섭리하시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존재와 능력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가 여기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자연과 양심과 역사적 사건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가 직접 만나고 자기를 부르시고 고기 낚는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 곧 사도로 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보여주시고 계시하신 바로 그 하느님을 안다는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고기 잡아 의식주를 해결하는 인간중심적 삶에서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고 그의 역사에 동참하는 영적 삶에로 올라가게 되었고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함에 가까이 가게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수제자로, 또한 그리스도의 산 증인으로 자기가 보고 경험하고 믿는 바를 후세에 전달하는 막중한 책임을 절감하면서 여기서 자기의 신앙을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인간들은 베드로처럼 삶의 수단으로 어떤 직업을 선택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자기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제자로 택해주신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기 잡는 초보적 삶의 단계에서 사람을 낚는 높은 삶의 단계로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직업을 포기하고 성직자나 선교사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역시 하나의 직업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우리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았다는 의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의식전환을 통해 삶의 새로운 차원 곧 임마누엘,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다시 확인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거룩한 모습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생명이란 우리의 목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숨은 생물학적인 것이라고 하면 생명은 영적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이 목숨이 붙어있으면 의식주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자기의 존재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동물적인 생활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생명이 있어야만 인생의 목적과 가치를 찾을 수가 있고 사람 구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이 있어야 하느님을 갈망하게 되고 그와 영적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리스도와 같이 경건한 인격으로 성숙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입김이고 거룩하게 되는 것은 그 입김으로 살아가는 삶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느님 안에서 쉬기까지 쉬지 못하고 날마다 거룩한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순계자의 길인 것입니다.
숯과 다이아몬드는 그 원소가 똑같은 탄소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 똑같은 원소에서 하나는 아름다움의 최고 상징인 다이아몬드가 되고 하나는 보잘것없는 검은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든 인간에게,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과 경건의 원소를 주셨는데 그것을 숯으로 만드느냐 또는 다이아몬드로 만드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2. 사도 베드로는 1:3b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해 주신 분입니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3제자인 베드로, 요한, 야곱을 다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거기서 제자들은 예수의 모습이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너무나 황홀하여 말하기를 주님이 원하시면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다고 하였습니다(마태 17:1-4). 베드로는 예수님의 변모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그 영광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순수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1:14에는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번광처럼 한 순간 수치고 지나가는 현상이 아니라 영원한 은혜와 진리가 가득 찬 실체인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은 영광과 함께 덕을 누리게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덕이란 하느님의 에너지를 가리킵니다. 이 에너지를 받은 예수는 위대한 힘의 소유자이었습니다. 자기를 이기는 힘, 이웃을 돌보는 힘, 기적과 이사를 행할 수 있는 힘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비인간화된 인간과 소외된 인간들을 인간으로 회복하는 힘의 소유자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하여 우리에게 태양과 같은 영광의 빛과 막강한 에너지를 공급해 주고 계십니다. 태양이 자연과 인간의 삶을 가능케 하듯이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 계속적으로 구원의 사랑과 은총을 더하여 주셔서 죄악의 어둠 속에서 살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내려주십니다. 덕(德)이란 그리스어는 수월성(excellence) 또는 부패의 반대를 뜻하는 말로써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믿음에서 나오는 도덕적 에너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德 보다는 利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숨길 수 없는 현실입니다. 물론 덕스런 모습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덕스러움도 우리의 체면이라는 이기주의의 표현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덕망 보다는 체면유지의 수단으로 껍데기만의 덕을 내세우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신앙 안에 있을 때 하느님의 성실하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동시에 우리의 생각과 생활이 더욱 맑아지고 넓어지는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두 개의 덕목을 낳는 모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신앙은 하느님의 음성인 양심을 근거로 하는 도덕과 하느님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는 지성이라는 두 개의 덕목을 낳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덕과 지성이란 두 가지 힘을 발휘하여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신 거룩한 목적에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어느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돈과 권력이 있는 장로님이 그 교회를 개척하고 크게 발전시키는데 공헌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이 정치자금 문제에 연관되어 옥고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집회 때마다 그 장로님의 석방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근자에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 정치자금 문제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시시비비를 가리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는 양면성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모르게 또는 불가피하게 불의와 연계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던지 간에 신앙인이 불의에 저촉되었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나 사회에 덕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기 보다는 곤혹스럽게 만들지 않을까 심히 염려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정의와 선의 힘이 솟아나는 한에서 값어치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하느님은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 문장에는 기독교 진리의 3가지 본질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약속과 부패에서의 해방과 참여입니다. 먼저 위대한 약속이란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구속의 약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믿음 안에서 흘러나오는 도덕적 힘으로 우리에게 밀려오는 욕망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거룩한 성품 곧 神性에 합류한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유행하던 스토익 철학파는 모든 인간이 자동적으로 신성에 들어간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당시 많은 신비주의 종교 집단들도 入神을 강조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철학과 이교 사상을 염두에 두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해 그의 영광을 체험하고 도덕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한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성에 참여한다는 말은 곧 고후 13:13의 “성령의 사귐” 또는 빌립보서 2:1의 “성령의 교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과 사귀는 일에는 어려운 전제가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4:14에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할 때 그의 부활과 합께 우리에게 보내주신 위로자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사귀는 기쁨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성장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게 됩니다. 지식을 통해 선각자들이 발견한 지혜의 보물을 접하게 되고 사회생활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도 터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지식과 경험이란 것이 우리에게 자동적으로, 아무런 수고 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주변에서 도와주는 부모와 스승과 이웃들의 수고와 함께 우리 자신의 뼈아픈 고통을 동반한 훈련 없이는 인간 성장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손자 준호는 지금 초등하교 1학년인데 셈을 잘 못합니다. 저를 닮았나 봅니다. 그래서 엄마와 할머니와 함께 싸우며 배워서 이제는 제 궤도에 오른 것 같습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신앙세계에도 꼭 같이 적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하느님의 구원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지려면,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의 성령에 참여하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하는 고통의 다리를 건너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십자가의 아픔 없이 영광의 부활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김용옥 박사가 인도에 가서 세계적인 불교 지도자 달라이라마를 만나 대화한 것이 책으로 나왔습니다. 김 박사가 달라이라마에게 묻기는 깨달음(覺)을 얻었냐고 하였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면서 깨닫게 되니 좁았던 세상이 넒은 세상으로 바뀌었다고 하였습니다. 즉 깨달음은 인간 자기중심의 좁은 세계를 떠나 무한한 우주의 세계로 안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조국 티베트를 침공하고 수많은 백성을 살해하고 추방한 중국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중국이 티베트에 가한 전쟁의 고난을 통해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최고 목표는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신 자신을 버리는 고난의 길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쿠오바 데스”란 영화에 나오는 대목처럼 베드로는 로마시가 화마에 휩싸인 가운데 피신하는 길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하고 물으니 주께서 대답하시기를 “나는 다시 십자가에 죽으려고 로마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감히 주님과 같은 모양으로 죽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드디어 이 고난의 문을 통과하여 하느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베드로의 신앙과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선택하셔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시고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하시며 그의 위대한 약속인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신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도의 신앙적 유산을 잘 배우고 간직하며 실현하는 새 시대를 위한 주님의 충성스러운 사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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