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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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원리`

이 계준 목사

성경말씀: 사무엘하 23:13-17,
마태 10:34-39, 야고보 4:1-10

몇 일전에 미국에서 온 친구를 근 40년 만에 만났습니다. 그 친구의 말에 의하면 거의 해 마다 고국을 방문하는데 올 때 마다 발전하는 것이 눈에 뛴다고 하면서 감탄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활기차고 경쟁적이기 때문에 발전의 속도가 빠른 것 같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이 오랜만에 우리를 보는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삶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미국처럼 안정된 사회는 질서정연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삶이 규격화되었기 때문에 활기가 넘친다거나 어떤 신선한 충격 같은 것을 느끼는 경우가 그리 흔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들처럼 이 사회의 울타리 안에 살면서 비판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개인차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낙관적인 평가만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보이는 발전에 비하여 보이지 않는 차원의 발전 즉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의 발전이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누리게 발전한 다기 보다는 오히려 제자리 거름이나 퇴보하는 듯 하여 심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근자에 일어나는 몇 가지 현상만 되새겨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주중 한국 영사관의 영사가 수백 명의 교포와 중국인들에게 뇌물을 받고 비자를 발급한 것이 발각되어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른 나라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도 발견되어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였다는 것입니다. 검찰이 살인혐의가 있는 사람을 영장 없이 체포하여 수사하다가 물고문을 가하여 죽게 하므로 해당 검사와 관계자들이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것은 일제 식민지 통치나 군사독재 시대에 사용하던 악습으로 알고 있었는데 민주정부에서도 계속되고 있으니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군인이 카드 빚을 갑기 위하여 국방을 위해 써야 할 총을 들고 은행 강도 행각을 벌였다가 붙잡혔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가 과외와 숙제에 시달리다 못해 자살하였는데 학부모들과 학교와 사회는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다. 강남의 집값이 하늘로 치솟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주부들이 담합하여 싸게 팔지 못하게 하는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치가 새로워지기 위하여 국민들에게 약속한 국회법, 인사 청문회법, 선거법은 이 번 회기에 처리되지 못하고 넘어 갔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도대체 우리 사회에는 왜 이런 비도덕적이고 비합리적인 사건이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것입니까? 외적인 발전이나 높은 학력이나 GNP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불미스럽고 저질적인 사회 현상이 꼭 같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심리적으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아마도 우리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생존의 원리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즉 가난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도둑, 강도, 사기, 협잡도 주저하지 아니 한다,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축재, 기만, 권모술수를 밥 먹듯 한다,
국가와 사회의 장래 문제는 둘째고 우선 남의 자식 잘되는 것 볼 수 없으니 위화감을 빌미로 삼아 평준화 교육을 사수 한다,
나라와 기업은 망해도 내 봉급과 휴일은 계속 늘어야 하니 무조건 투쟁해야 한다
는 등의 생존투쟁의 원리가 우리 행태의 저변에 깔려있다고 보아 좋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투쟁원리는 의식적이던 또는 무의식적이던 간에 내가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것, 도덕이나 법을 무시하고라도 우리끼리만 잘 살면 된다는 것 그리고 너는 나를 위해야 희생하라는 등의 극단적이 자기중심주의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무자비한 생존투쟁의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고 우리 모두가 이런 비참한 현실을 만들어 내는데 직, 간접으로 일조를 했다고 말해서 잘못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자연의 순기능과는 달리 자타의 삶과 사회 전체를 파괴하는 역기능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다음과 같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도 지금까지 세상에 속하여 생존투쟁의 원리에 따라 살아 왔다면 우리 자신이 비 기독교인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만일 생존투쟁의 원리가 신앙인의 삶의 원리가 아니라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무름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사람이니까 비록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 갈 수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다른 원리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다른 원리를 가지고 다른 차원에서 살아감으로서 어떤 삶의 보람 같은 것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원리를 찾기 위해 성서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 곳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 세 가지 말씀에서 신앙인의 삶의 원리를 찾고 세상에서 쓰던 생존투쟁의 원리를 버리므로 참신하고 보람찬 삶을 지향해 나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사무엘 하 23:13-17에는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농사를 걷어드리기 시작할 때 불레셋 군대가 쳐들어 왔습니다. 다윗은 산 위의 요새에 있었고 불레셋 군대의 진은 베들레헴에 있었습니다. 이 때 다윗이 목이 심히 말라 누가 저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을 길어다 줄 수 있겠는가 물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가장 용감한 장군 셋이 적진을 뚫고 들어가서 물을 길어다가 다윗에게 바쳤습니다. 물을 받아든 순간 감격한 다윗은 이 물을 자기가 마시지 아니하고 야훼께 바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이 물을 제가 어찌 감히 마시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을 걸고 다녀온 세 용사의 피가 아닙니까!”
우리는 여기서 삶의 첫째 원리를 발견합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은 자기 본위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우선으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내가 먼저 먹고 마시고 나의 이익을 위해 모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귀한 것을 먼저 하느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하느님께 물을 바치면서 용사의 피라고 하였습니다. 피란 곧 생명입니다. 실상 물과 피는 모두 생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다윗이 이 물을 용사들의 피라고 하면서 바친 것은 곧 자기의 생명을 바친 것과 같습니다. 예수께서도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마태 16:26)라고 말씀하면서 인간에게 최고의 가치는 생명임을 밝혀 주셨습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첫째 원리는 우리의 생명 곧 우리의 삶 전체를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헌금하고 예배드리고 하는 일상적인 종교행위를 하느님께 헌신하는 일과 동일시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교회 생활에만 몰두 하고 가정과 사회생활은 세상의 생존투쟁의 원리를 따라 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신앙인의 길에서 멀리 떠나간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기의 입김인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우리의 생명을 그에게 바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란 우리의 육신의 생명이나 삶의 일부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소유 전체를 바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과 지식, 물질과 권력, 명예와 지혜 모두를 하느님의 뜻을 위해 사용되도록 날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하는 성실한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여우와 원숭이와 토끼가 하느님께 찾아가 자신들의 됨됨이를 자랑했습니다. 그 때 하느님이 갑자기 시장기가 든다고 하였습니다. 모두 존경하는 하느님을 위해 음식을 구해오겠다고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잠시 후 여우는 잉어와 새를 물어 왔고 원숭이는 도토리를 들고 왔는데 토끼만 빈손으로 돌아 왔습니다. 토끼는 얼굴을 붉히며 모닥불을 지핀 다음 불 속으로 뛰어들며 말하기를 내 고기가 다 익으면 잡수시라고 하였습니다. 토끼의 진심을 알게 된 하느님은 그의 됨됨이를 높이 평가해서 유해나마 길이 우러러보라고 달에다 옮겨놓았다고 합니다. 이 우화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고 또한 우리가 헌신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삶 전체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야고보서 4:1-10의 말씀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싸움과 분쟁의 원인이 욕심에서 나오는 것인데 욕심의 만족이 없으면 살인하고 탐내도 얻지 못하면 싸운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진정한 삶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구하지 않기 때문이고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과 가까워지면 하느님의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복종하고 마음의 악마를 물리치므로 하느님과 가까워져서 깨끗한 손과 순결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삶의 두 번째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세상의 것들을 쟁취하기 위하여 생존투쟁을 버리지 말고 오히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욕심과 탐욕, 쾌락의 악마와 싸워 이기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원수와 싸워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보이는 재물이나 지식이나 권력을 경쟁과 투쟁을 통해 쟁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실로 어렵기도 하고 아무리 고매한 인격자고 신앙인이라고 할지라도 패배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계속적으로 솟구치는 온갖 욕망과 탐욕과 쾌락이란 악마와 싸워 이긴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싸우는 전쟁 가운데 가장 어려운 난공불락의 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싸워 이기지 못할 때 평생 쌓아올린 인격과 신앙의 상아탑이 한 순간에 무너지게 됩니다. 결국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할지라도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면 패배자로 추락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장점도 되고 단점도 되는 것은 인간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연, 학연, 지연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정이 많은 민족이라 가족이나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각별한 친절과 후대를 베풉니다. 반면에 모르거나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냉대하는 것이 우리의 습성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관계가 긍정적인 것 보다는 부정적인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인적 또는 집단적 욕망을 채우려는 동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가 없어지지 않는 근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그것이 개인적이던, 가족적이던, 사회적이던 간에 인간의 욕망과 탐욕과 관계된 유혹과 죄악의 티끌마저도 털어버리는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철저하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되려면 때로는 가족이나 친구들과도 원수라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과 사람에게 죄를 범하므로 불의하고 부끄러운 인간으로 낙인찍히는 것 보다 옳은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러운 재물을 만졌다면 불결한 손을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깨끗하게 씻어버리고 탐욕에 싸인 흑심을 지녔다면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흰 눈과 같은 청결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세상 보다는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참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인생의 최후 순간에 성만찬을 들면서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는 무기로 온 세계를 지배하려다가 실패하였으나 나사렛 예수는 사랑으로 세계를 지배하였다.” 나폴레옹은 자기의 욕망을 투쟁이란 잔인한 수단으로 성취하려다가 결국 실패자가 되었고 예수는 자기의 욕망을 극복하고 세속적인 악과 싸워 이기므로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깨끗한 손과 순결한 마음의 대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세번째로 마태복음 10:34-39의 말씀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평화를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일으키려고 왔고 부부 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보다 자기 부모나 자식을 더 사랑하는 자는 그의 제자로써 합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39절은 우리가 익히 아는 말씀으로 가장 극단적이고 역설적인 것입니다. “자기의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위의 말씀에서 삶의 세 번째 원리를 찾습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참 평화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동시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자기희생만이 참 삶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죄악과 무질서가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황폐한 현상을 그대로 덮어두는 형식적인 평화는 별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오히려 가족 간에 대립과 갈등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해소되어야 하며 각기 자기를 부정하는 십자가를 질 때만 참 삶의 의미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제3의 원리는 실상 우리가 익숙한 생존 투쟁의 원리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이고 실제 생활에 적용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고집하는 경우에는 100% 손해를 각오해야 하고 또한 우리의 생명의 불안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옳은 길인 줄 알면서도 손해가 두려워 딴 길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인의 대표적인 성격이 “빨리 빨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것은 “절대로 손해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몫을 절대로 양보하거나 빼앗길 수 없다는 심리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타협, compromise 즉 함께 약속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처럼 모든 생명은 어느 누구의 희생 없이 생길 수도, 자라날 수도 없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묻혀 썩어야 새 싹이 돋아납니다. 낙엽이 떨어져서 거름이 되어야 초목이 자라납니다. 하나의 생명은 10개월이란 긴 시간동안 어머니의 고통을 먹고 자라나서 세상에 태어납니다. 전쟁은 많은 젊은 피를 흘린 다음에 평화를 가져옵니다. 3D기업에서 희생하는 외국 근로자 없이 중소기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과 고난의 삶과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에게 하느님께 도달하는 생명의 길을 마련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의를 위해 우리의 삶을 회생하지 않는 한 나의 구원도, 인류의 구원도, 역사의 구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미국을 위시한 세계열강들이 자기희생의 마음을 가추지 않는 한 자기 나라와 함께 모든 나라와 인류의 평화를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에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금년에 동인 문학상 수상작은 서석제씨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하였다”라는 소설입니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요약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황만근은 어느 시골에서 6.25당시 유복자로 태어났고 자식을 양육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용하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납니다. 그는 지능이 낮기 때문에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동리에서도 천덕꾸러기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리 사람들은 만근에게만 구준 일, 어려운 일을 모두 시키며 부려먹습니다. 만근은 싫어하거나 힘든 줄도 모르고 일당도 받지 않으면서 열심히 도와줍니다. 결국 그는 자기희생을 통하여 자기 가정과 동리에 없어서는 아니 될 존재가 되지만 그는 아무런 인정도, 대접도 받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사회현실을 풍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를 좌우하면서 모든 실속은 다 챙기는 동시에 사회를 망가뜨리는 현실 속에서 바보스럽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민초들에 의해 공동체는 생존한다는 말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황만근은 현대판 바보 예수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이란 자기 몫이나 목숨을 챙기고 인간의 칭찬이나 대접에 받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을 위해 자기 생명을 기꺼이 바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존 투쟁의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원리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신앙적이고 인격적인 결단이 요청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선택해야 할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삶의 원리 입니다. 그것을 선택하는 이유는 우리의 궁극적인 삶의 가치와 목적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하느님께 우리의 삶 전체를 바치는 헌신이고 둘째는 우리 안에 있는 욕망과 탐욕과 쾌락의 죄악을 몰아내고 깨끗한 손과 청결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고 셋째는 그리스도의 참 평화를 위해 그를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자기부정의 길을 걸어가므로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이 삶의 원리를 실현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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