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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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고스와 파토스'

손원영 목사
누가 11: 42; 요한 1: 14


얼마 전 책을 읽다가 재미난 이야기가 있어서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도종환씨가 쓴, 「마지막한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사계절, 2000)이란 책에 나오는 얘깁니다. 몇 해전 어떤 회사에서 신문에 신입사원 광고를 냈는데, 그 내용이 기발해서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고 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3일 동안 밤을 새울 수 있는 사람. 3일 동안 놀 수 있는 사람. 노래방에서 서른 곡은 부를 수 있는 사람. 아버지 시계를 분해해 본 적이 있는 사람. 3개 국어는 못해도 3개국 이상을 배낭 여행가본 적이 있는 사람. 못생긴 파트너를 만나도 세 시간은 기꺼이 봉사할 수 있는 사람. 비오는 수요일에 빨간 장미를 사 본 적이 있는 사람. 차비를 몽땅 친구에게 주고 자기는 터벅터벅 걸어간 적이 있는 사람. 그리고 학교를 가다말고 무작정 여행을 떠나 본 적이 있는 사람.”
여러분,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일반적으로 회사에서 사원을 뽑을 때, 학력과 경력 그리고 인간관계에 의한 추천으로 사람을 뽑는데, 이 회사는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사람을 뽑고 있습니다. 한국창의성개발연구소의 문정화 소장의 분석에 의하면, 이 광고는 요즈음 우리사회가 어떤 인재를 필요로 하는지 잘 대변해 준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우리 사회가 지금 요구하는 인재는 공부잘하고 성실한 사람도 필요하지만, 그 보다 더 필요한 인재는 “과제에 대한 집착력, 모험심, 다양한 경험, 인간미, 그리고 기발한 생각 혹은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입니다. 아마도 이런 종류의 인재가 필요한 까닭은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를 해쳐나가기 위해서는 소위 모범생으로는 안된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창의적이고 열정이 있으며, 살아있는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 한마디로 “파토스”가 있는 사람, 아마 그런 사람이 우리 시대에 적절한 인재라는 얘기입니다. 단순한 지식을 암기한 적응적 인간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살아있는 지식을 가진 창의적인 인간을 이 시대는 요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중에 몇 개쯤 자신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옛날 대학원 시절 생각이 났습니다. 지금부터 10여 년 전의 일인데, 1월경이라고 짐작됩니다. 지도교수님을 도와 밤 10시 넘게까지 성서연구 교재를 만들고 있을 때입니다. 한참 일하고 난 뒤, 창문을 열어보니까 엄청나게 눈이 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뉴스에서는 그 눈에 대한 기상예보를 하고 있었습니다. 뉴스 보도에 의하면 오늘 눈은 수십년 만에 최고로 많이 오는 눈으로써, 한 이틀 더 올 거라는 예보였습니다. 특히 강릉과 설악산 지역에는 240cm가 넘는 눈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뉴스를 듣자마자 갑자기 그렇게 많이 내린 눈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알아보니 강릉행 기차가 다행히 밤 11시에 떠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둘러 일하던 꾸러미를 정리한 뒤, 곧장 청량리 기차역으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강릉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런데 정말 눈이 많이 온 모양이었습니다. 그곳을 향해 가다가 태백역쯤에 도착할 즈음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철로가 막혔기 때문에, 더 이상 갈 수 없으므로 다음 기차역(태백역)에서 모든 승객은 내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때 시간이 새벽 한 4시 경으로 생각됩니다. 역에 내린 뒤, 갈데가 없어서 만화방으로 가서 눈에 들어오지 않는 만화책을 보며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갈 수 없으니, 이곳에 온 이상 태백 황지에 있는 예수원이나 갔다오자. 그렇게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예수원에서 하루를 보낸 뒤, 그 다음 날에 아름답게 눈이 내린 대지를 뚫고 서울행 기차를 탔습니다. 그리고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차창밖에 펼쳐진 아름다운 눈꽃을 바라보며 촌스러운 시를 하나 지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시이지만 한번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눈가지

원주가 가까이 다가온다
동물원의 ‘잘가’라는 노래가
하얀 대지 위에 메아리쳐 들려온다

어쩜 저리도 아름다울까?
어머니 품 같은 나무가지 위의 새하얀 눈무덤
부끄러워 차마 흔들릴까
숨을 죽여본다

20년만에 큰 눈사태를 맞이했다 하지만
마음이 가난한 이에게는
이것도 아쉬운 모양이다. (1990. 2. 1)

지금 1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때 경험을 생각하면 나의 가슴은 뛰고 내가 지금 살아있음을 실감하곤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일종의 파토스적 삶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2.
저는 어제 설교를 준비하면서, 구태의연한 신앙인과 창의성과 파토스를 갖춘 신앙인이 어떻게 다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치 일류대학을 나온 모범생 사원과 비록 대학의 학력수준은 좀 떨어져도 창의성이 넘치는 사원 사이에서 후자를 선호하는 이 시대에, 과연 우리의 신앙은 어떤 신앙을 지향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모범생 기독교인이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기준에 맞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성서에 십계명이 나오니까, 한 열가지만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 보겠습니다. 첫째, 주일성수를 잘 하는 교인, 둘째, 십일조를 잘 하는 교인, 셋째, 성서를 매일 독서하는 교인, 넷째,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교인, 다섯째, 새벽예배를 비롯하여 각종 예배에 잘 참석하는 교인, 여섯째, 술마시지는 않는 교인, 일곱째, 담배피지 않는 교인, 여덟째, 목사님의 말씀에 절대 복종하는 교인, 아홉째, 유행가 안 부르는 교인, 열째, 제사 안 지내는 교인 등입니다. 이러한 교인은 적어도 한국에서 모범생 교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이 중에 어느 하나라도 안 지킨다면, 그 교인은 모범생 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는 갈지 모르지만, 절대로 한국교회에서 장로나 권사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설교를 준비를 하면서, 혼자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과연 이상의 열가지를 문자적으로 꼭 지켜야만 모범생 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열가지의 계명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이 기독교인을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규정할 수 있는 조항은 될 수 없지 않은가? 특히 요즈음 모범생이 아니라 창의성이 넘치는 신입사원만이 진정으로 회사를 살릴 수 있기에 그들을 찾느라 동분서주하는 이 때에, 우리에겐 과연 어떤 모습이 창의성이 넘치는 파토스 신앙인의 모습일까?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통적인 모범생 교인이 아니라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창의성이 넘치는 기독교인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따라서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기독교인상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파토스(pathos)란 그리스어입니다. 이 말은 격정이나 감정, 또 감정의 작용, 곧 연민의 정을 자아내는 힘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파토스가 있어서 인생이 아름다워지고, 깊이가 있어지고, 삶이 지루하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새로운 신입사원 모집 조건이 바로 파토스적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반대되는 단어가 ‘로고스’(logos)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로고스란 이치와 이성, 그리고 기독교 신학에서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로고스는 인생에서 명철한 머리의 기능을 하고, 파토스는 뜨거운 가슴과 배의 기능을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적어도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로고스 중심의 모범생 교인만을 양산해 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리공부는 하는데 질문이 없고, 성경을 읽고 외우지만 삶의 변화가 없는 로고스 중심의 모범생 교육만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새로운 기독교인의 스타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전통적 스타일이 아니라 새로운 스타일, 새로운 창의적인 기독교인을 이 시대는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기독교인은 누굴까요?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말씀인 로고스가 인간이 됨으로써 파토스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바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기독교인상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 그것은 로고스가 파토스가 된 것입니다.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만 계셨다면 우리는 합리적인 신앙, 이성적인 신앙, 그리고 율법적인 신앙만을 절대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셨기에 우리는 기꺼이 파토스의 신앙도 소중하게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이신 그리스도, 합리성을 중시하는 그리스도, 그리고 진리를 강조했을 그리스도께서 죄인들과 함께 했다는 것, 이것은 어쩌면 말씀의 왜곡이요, 합리성의 굴절이요, 진리의 부정처럼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기꺼이 영원한 진리, 곧 로고스로만 존재하지 않으시고, 로고스를 스스로 낮추어 파토스를 껴안은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요 1:14). 바로 이 정신이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기독교인상이 아닌가 합니다. 따라서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고스 신앙과 파토스 신앙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기독교인 상을 예수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3.
오늘 봉독한 누가복음 11장 42절 말씀을 포함하여 11장 37절부터 54절까지의 말씀은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들어 가셔서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에 대한 저주를 선언한 말씀입니다. 초대받아 가신 집에서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대신 오히려 그들을 비판한 것을 보면, 바리새인의 삶의 스타일에 대한 예수의 분노가 얼마나 컸음을 그리고 그의 용기가 얼마나 대단하셨는지 알게됩니다(눅11:37). 아뭏튼 저주선언은 모두 여섯가지가 나오는데, 오늘 본문말씀을 포함하여 그 중 셋은 바리새인들을 저주한 말씀이고(42-44절), 나머지 셋은 율법사들을 저주한 내용입니다(46-52절).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화있을찐저 너희 바래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누가 11: 42).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좀 딱딱하게 말씀드리면, 이 말씀은 예수께서 진리를 로고스 곧 추상적인 진리, 합리적인 진리만으로 생각하려는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에게 “화있을찐저”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로고스는 파토스를 껴안을 때만 로고스는 로고스된다고 말씀하고 계신 내용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소중히 생각하는 율법이 단지 그 의미를 상실한 채 지키기 위한 율법으로 전락하게되면, 그것은 생명을 잃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의 눈에 합리적으로 로고스적 측면에서 옳다고 볼 수 있는 율법이 공의와 사랑이 실천되는 삶의 현장에서 파토스가 배제된 채 강조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본문말씀을 분석해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로고스(구약의 율법)를 철저하게 지켰는지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바리새인들이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렸다”라는 표현입니다. 마태복음에서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박하와 운향대신 회향, 그리고 근채의 십일조”를 드렸다고 합니다(마 23:23). 여기서 운향과 회향은 사실 아람어로 같은 단어입니다. 아주 하찮은 채소입니다. 그런데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성서에는 박하에 대하여 십일조를 드렸다는 증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운향에 대한 십일조는 분명히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면, 모든 채소가 다 십일조로 드려진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꼭 드리지 않아도 되는 것들까지 십일조로 드리도록 규정해 놓았음을 알게 됩니다(김득중,「성서주석:누가복음II」, 기독교서회, 1993).
다시말해 여기서의 문제는 바리새인들이 드리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것에 대한 십일조까지 철저하게 드리면서, 즉 사소한 것에 있어서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을 지키면서도, 왜 정작 율법에서 가장 중요하게 요구하는 정의와 사랑은 드리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십일조는 철저하게 지키면서도 반드시 해야하는 공의와 사랑은 실천하지 않은 이 위선적인 모습을 예수께서는 강력하게 비판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말씀과 비슷한 평행구가 마태복음 23장 23절 나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화 있을찐저. 의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justice)와 인(mercy)과 신(trust)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합리적인 로고스 신앙만 강조했지, 공의와 사랑, 그리고 믿음 같은 파토스 신앙을 그들의 삶에서 제외시켜버렸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것을 비판하신 것입니다.

4.
여기서 우리는 본문으로부터 세가지 정도 배우게 됩니다. 첫째, 우리의 신앙은 로고스와 파토스가 조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리새인들처럼 합리성만을 중시하는 로고스 신앙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데 만족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합리성만을 절대화한 나머지 지키지 않아도 되는 박하와 회향과 모든 채소에 대해 십일조를 바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십일조를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합리성을 극대화하여 성서에도 강조하지 않는 또 다른 율법조항을 만들어 내서 그것으로 교인들을 죄짓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신앙생활하기 위해 합리성이라는 무기를 갖고, 성서에도 없는 십일조 규정을 만들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강요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의 입장은 단호합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시각은 로고스를 폐기시킨 것이 아니라 파토스로 그것을 보완하신 것입니다. 십일조를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십일조와 함께 그것보다 더 중요한 파토스를 감싸안을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공의와 사랑’입니다. 마태복음의 말씀에 따른다면, 그것은 의(justice)와 인(mercy)과 믿음(trust)입니다. 십일조가 십일조로만 존재하지 않고, 그것이 정의와 사랑이란 보자기로 써여질 때, 기독교신앙은 위대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로고스가 파토스로 자기를 변화시킬 때, 로고스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성과 합리성은 세상 속에서 사람을 살리는 의와 사랑과 신의로 육화될 때 비로소 지성과 합리성이 완성된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바로 로고스의 전문가들이 파토스의 삶에 의미를 주지 못하고 또 그 열정을 상실한데 있는 것 같습니다. 지식인들이 대학이나 연구소의 벽에 갇힌 채, 연구만을 위한 연구, 연구비만을 챙기기 위한 논문을 쓸 때, 그것은 바리새인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됩니다. 특히 로고스의 지성인들과 신앙인들이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저버리고 개인적인 탐욕과 비리에 연루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한없는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께서는 로고스 신앙은 파토스의 신앙으로 육화되어 서로 조화를 이룰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둘째, 로고스와 파토스의 신앙 중 굳이 우선순위를 둔다면, 예수께서는 먼저 파토스의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로고스와 파토스의 균형 및 조화가 중요하지만, 그래도 더 무엇을 강조해야 한다면, 그것은 파토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론보다 실천을 더 중시하라는 말씀이요, 십일조에 대한 종교적인 규정보다 정의와 사랑 그리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즉 앎보다 삶이 더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아는 것과 사는 것이 함께 가야겠지만, 굳이 우선순위를 매긴다면, 앎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삶이라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저는 우리 시대가 다른 어느 시대보다 실천이 중요한 시대라고 믿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많은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사람은 많으나 존경할 사람이 없고, 지식인은 많으나 인재가 없다.” 이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지식인은 많고, 과거보다 학력수준은 높지만, 가방끈이 긴 만큼 인간의 됨됨이가 거기에 따라주지 않는다는 아쉬움입니다. 한마디로 실천하는 지식인, 양심적인 지식인, 곧 파토스가 있는 지식인이 과거보다 없다는 한탄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교인들이 정말로 실천적인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서 몇 귀절 좀 더 많이 알았다고 자랑하는 교인보다는 묵묵히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 십일조를 남보다 많이 한다고 뻐기는 교인보다 자기가 속한 조직이나 공동체 속에서 정의를 실천하는 신앙인,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예배에 많이 참석한다고 떠벌리는 교인보다 직장의 동료나 이웃들에게 의리를 지키고 사랑을 전하는 신앙인, 바로 이런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셋째,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역설의 신앙’을 배웠으면 합니다. 십일조와 같은 율법조항을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정의와 사랑을 강조하신 예수의 말씀은 바로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 절묘하게 완성되었습니다. 함께 공존하기 힘든 로고스와 파토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는 예수의 말씀이 아마도 이것을 뜻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서로 이질적인 것과 같은 로고스와 파토스가 십자가 위에서 가장 비극적인 모습으로 조화를 이룬 것입니다. 이것이 역설의 신앙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영원하신 하나님, 진리 자체이신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바로 로고스인 그분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수치의 상징인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비극적인 모습으로,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인간과 우주의 구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요, 기독교 진리의 역설입니다.
저는 우리 신앙인들이 이러한 역설의 삶을 살았으면 어쩔지 생각해 봅니다.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지만, 그러나 머리를 넘어서는 신앙을 우리는 가졌으면 합니다. 합리성만을 중시하는 이 시대에 삶과 죽음이 한짝이라는 역설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참 인생은 죽음이 언젠가 우리를 찾아오기에 진정한 인생이 되는 것 같습니다. 죽음을 언제나 의식하고 살아가는 삶, 그 삶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선 삶이 됩니다. 그러기에 슬프면서도 아픔다운 삶이 됩니다. 어느 회사의 신입사원 광고에 나타나듯이,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상은 역설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고통 속에서 기쁨을 발견할 줄 알고,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줄 알고, 죽음 속에서 영원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테러의 현장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끝없는 존경심과 사랑을 잃지 않는 사람, 바로 이런 역설의 진리를 품고 있는 인간을 우리 시대는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역설의 삶을 살다간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섬김을 받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이기고자 하는 자는 지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하며, 살고자 하는 자는 죽어야 한다는 역설의 진리를 스스로 실천했던 분입니다. 기독교인이란 바로 이런 예수의 정신과 삶을 따르는 무리라고 할 때,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 가장 가치있는 삶이란 바로 이런 역설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우리는 고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계는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불안해 하고 있고, 정치-경제적인 어려움은 이미 우리의 삶이 되어버린지 오래입니다. 바로 이때, 우리 기독교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저는 오늘 감히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로고스와 파토스가 조화를 추구하는 신앙을 갖자고 말입니다. 그리고 굳이 그 둘 중에 우선순위를 둔다면, 실천하는 신앙인이 먼저 되자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슬픈 현실 속에서도 희망과 인간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말기를 부탁드립니다. 바로 이 고난의 시대는 이와같은 창의적인 신앙인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아멘.



내가 눈을 찾아 떠난 이유는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어색함을 덮을만한 손결함과 깨끗함으로 사랑을 포장해야 한다.
이것이 곧 사랑의 고백을 시작하는 순서이며
이것을 '선물'이라 이름한다.

나를 낳은 대지에 사랑을 고백하는데도 같은 것이 필요하다.
나의 순결함과 깨끗함으로
사랑이라는 나의 존재를 대지에게 바치고 간다.
이것이 가장 기쁜 나의 노래이며 행복이다.

엷은 미소로
나의 사랑을 전달하는데 도와준
'눈'이라고 불리우는 나의 동반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1990.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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