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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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기쁜 소식`

이계준목사

이사야 11:5-9, 누가복음 2:8-14

1. 지난 19일로 제16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선이 막을 내렸습니다. 선거일 한 달 앞두고는 물론이고 일년 전부터 거리에서, 언론에서 그리고 인터넷에서 자기선전과 상대비방으로 야단법석을 떨다가 이제 온 세상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참혹한 전쟁이 끝나고 폐허 위에 내린 정적과도 같은 허탈한 느낌을 줍니다. 대선이 기독교의 대림절과 맞물려서 백화점에서도, 심지어 교회에서도 예년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정치풍경만이 압도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미 기분 상으로는 크리스마스가 끝난 듯 합니다.
정치적 메시아가 나타나면 백성들은 대개 크게 둘로 갈라지게 됩니다. 기쁜 소식을 들은 사람과 슬픈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메시아로 태어난 사람과 그 가족 그리고 메시아 만들기에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슬픈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메시아 후보로 추대되었다가 탈락한 사람과 그의 가족 그리고 그를 후보로 추대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정치적 메시아로 탄생한 지존자를 위시하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축제의 분위기 속에 도취되는 동시에 앞으로 주어질 특권을 나주어 먹는데 관심을 집중하게 됩니다. 이와 반면에 메시아를 공중에 올렸다가 고무풍선처럼 날라 보낸 사람들은 허무감과 슬픔에 눈물을 흘리고 심지어 닦아 올 핍박에 불안과 공포를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의 메시아는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을,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슬픔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은 앞으로 겪어야 할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번 대선으로 인하여 낡은 문제와 함께 새로운 문제들이 등장해서 우리 사회를 어둡게 만들고 생각 있는 사람들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번 선거가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들, 청년들과 함께 특정 지방의 적극적인 참여로 49.8%라는 득표로 승리하였다면 나머지 50%에 해당되는 패배자들 곧 특히 부한 사람, 배운 사람, 기득권층, 노인층 등과의 사회적, 심리적 갈등현상을 어떻게 치유하고 해결할 것인가 하는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현 정권이 망가뜨린 교육과 의료 정책 및 노사 관계의 해결도 긴급한 사안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새로이 대두되는 경제위기의 가능성과 북한 핵문제와 관계된 북미, 한미일 그리고 남북 관계 등 앞으로 우리가 치러야 할 전쟁이 산적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정치에 관련된 소식은 50%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만 기쁨을 안겨주는 동시에 그것도 잠시뿐 그 기쁨을 빼앗아가는 골칫거리들이 태풍처럼 엄습해 오는 것입니다.

2.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성탄절을 맞이하여 구원의 축제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이 분열과 위기가 계속되고 가증되는 현실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인지 생각해 봄으로서 메시아의 참 뜻을 찾고자 합니다.

가.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는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누가복음 2:10)고 하였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이 외치는 기쁜 소식은 정치적 메시아가 전하는 메시지와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것은 50%에 해당하는 소위 "노사모“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귀가 붙어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지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들려주는 기쁜 소식이란 언제나 한정된 사람들과 특정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TV있는 사람들이 드라마나 운동경기를 시청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오지의 미개인들은 그런 혜택을 누릴 기회와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목자에게 전달한 기쁜 소식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곧 빈부, 성, 민족, 종교, 문화의 벽을 넘어서 온 인류에게 선포된 소식입니다. 하느님께서 우주와 인류의 창조주로서 그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시는 역사(役事)는 제한되고 편협한 것이 아니라 무한하고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온 세계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땅에 내려와서 목자들에게 알려주지 아니하고 만방에 울러 퍼지게 하려고 하늘 높은 곳에서 외친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전파를 멀리 보내기 위하여 인공위성을 우주 공간에 띠우고 TV영상의 송신과 통신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좋은 소식은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함께 듣고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이 듣고 구원에 참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천사로 하여금 높은 곳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대선은 우리가 한 국가의 일원으로 책임지고 치러야하는 정치적 행동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정치적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세상에 실현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대선이 50%만의 승리로 끝난 결과 사회 구성원의 절반만 기뻐하고 만족하고 나머지 절반은 슬퍼하고 불만족하다면 그것은 한 민족 공동체로서 불행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떤 가정이나 사회나 심지어 인류 공동체 안에서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행복과 만족을 누린다면 그것은 위선적이고 이기주의적인 기쁨일 뿐이지 순수하고 온전한 기쁨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천사처럼 높은 차원에 올라서서 50%만의 기쁜 소식을 100%의 참신한 기쁜 소식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골트베르그란 마을에서 매년 크리스마스 아침 2시에 부르는 “마리엔 리드”(Marien Leid)라는 아름다운 노래가 있다고 합니다. 이 노래의 유래는 1353년 이 지방에 흑사병이 휩쓸 때 생긴 노래라고 합니다. 이 때에 희생된 사람들은 수천 명에 달했는데 사람들은 이웃과 심지어 가족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합니다. 이런 공포와 죽음의 시간이 크리스마스이브까지 계속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 자기 혼자만 살아남았다고 생각한 어떤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굳게 잠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황폐한 거리를 바라보며 옛날의 기억이 되살 아나서 크리스마스와 그 날의 기쁨과 아름다운 인정을 생각하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으니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리라! 그의 어머니는 지순한 처녀이시니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리라!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를 대적할 이 누구랴!” 그런데 가까이 있는 집으로부터 응답하는 노래와 함께 사람이 뛰쳐나왔습니다. 이제 두 사람이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할 때 무덤처럼 보이던 집으로부터 어린이, 부녀자, 남자 등 25명의 생존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거리에서 새로운 용기를 가지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감히 누가 우리를 대적하랴!” 많은 사람들이 흑사병으로 죽었으나 이 소수의 사람들은 죽지 않았다. 그들은 수많은 시신들을 묻어주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늘의 사명을 가지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소수에 해당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소수가 생명의 노래, 기쁜 소식을 전하고 나눌 때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죽음의 세계, 분열과 공포의 세계를,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과 희망의 세계로 바꿀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은 그것이 정치적이건, 경제적이건 또는 종교적이건 간에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될 때 참다운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나. 천사가 전하는 기쁜 소식의 내용은 “오늘 따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고 하면서 그 주님은 “구유에 뉘어있는” “갓난아기”라고 말하였습니다(누가복음2:11-13).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메시아로 오시는 모습은 매우 비천하고 초라하고 나약합니다. 다니엘이 예언한 바와 같이 인자로서 수천의 천군 천사를 이끌고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도 아니고 동방의 박사들이나 유대인들이 기대하였던 대로 궁전에서 왕자로 탄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천사가 전한 기쁜 소식은 가난하고 비천한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는 아기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것은 톱뉴스 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하느님의 아들의 나약하고 비천하고 가난한 모습에 참 진리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역은 그 아들이 높은 곳을 몸소 버리시고 우리가 있는 삶의 현장까지 내려오시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지없이 순진하고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목자들은 마구간을 찾아가서 갓난아기에게 경배하였습니다. 힘 있는 어른들이 보잘 것 없고 나약한 아이에게 절한 것입니다.
영원하고 절대적인 가치와 진리는 높고 힘 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낮고 천한 곳에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화려한 문명을 창조한 바벨론이나 에집트는 물론이고 현대의 막강한 이념과 군사력을 과시했던 나치, 일제 및 공산주의는 맥없이 무너지고 역사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떤 위대하고 찬란하고 권위적인 것에서는 우리의 생명이 약동하고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얼이 없습니다. 오히려 겸허하고 소박하고 나약함 속에 인간을 인간되게 하고 현실 속에서 현실을 초월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줄 알고 존중할 줄 아는 것이 목자와 같은 지혜의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해방 후의 역사만 보더라도 힘의 논리에 의하여 지배당해 왔습니다. 권력과 돈이 사회를 지배하면서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 억눌리고 착취당하는 경험을 계속하였습니다. 정당이 바뀌고 정치이념을 달리해도 권력과 힘의 논리는 여전하였습니다. 그것은 나약한 국민을 속이고 우롱하고 우습게 여기는 반면에 권력과 재물을 축적하기 위하여 온 갓 수단 방법을 모두 동원하였습니다. 그리고 형무소에는 힘없는 좀 도둑들만 가득 차고 힘 있는 큰 도둑들은 기세등등하게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활개를 쳤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정치적 메시아 시대를 맞이하여 꼭 같은 비극이 반복될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낡은 기득권 세력이 물러가는 반면에 새로운 기득권 세력인 굶은 이리 떼가 닥아 오지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힘의 논리가 나약한 자들을 지배하는 방식은 낡은 권력과 새 권력이 따로 없고 독재 세력이나 민주 세력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예수의 오심은 우리에게 새 가치관을 주셨는데 그것은 곧 “인간은 이용할 물건이 아니고 화학적 현상도 아니며 교육받은 원승이가 아니라 귀빈-VIP"라고 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는 힘 있는 자가 지배하는 날이 아니라 힘 없는 자가 지배하는 날입니다.
수년 전 미국의 저명한 잡지 중의 하나인 “The Saturday Review"에 다음과 같은 이상한 글이 실렸던 일이 있었습니다. ”어제 밤에 그랜드 이글 백화점의 수위가 지하실의 세일 판매장을 순시하다가 어떤 사람의 시체가 계산대 아래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사람은 몹시 여위고 극도로 쇠약한 30대 남자로서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의 호주머니는 비어 있었고 신분을 알아낼 아무런 단서도 없었다. 추측하기에 이 사람은 크리스마스 쇼핑하는 사람들의 발에 밟혀 견딜 수가 없어서 피난처를 찾아 계산대 밑으로 들어간 듯 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불쌍하게 죽은 사람의 손바닥에는 못 자욱이 있는데 아무도 그것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경찰들이 그의 신원을 조사 중에 있다“.
이 이야기는 오늘 기쁜 소식을 듣고 축제를 벌이고 있는 현실 속에서 힘없는 메시아는 우리의 소외된 이웃으로 희생되고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목자들이 아기 예수에게 경배 드린 것과 같이 가장 작은 자, 힘없는 자, 어쩌면 우리 때문에 소외되었을 지도 모를 이웃에게 관심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어른이 겸손하게 어린 아이에게 절하고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와 어울리고 나눔으로서 인간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사람이 살만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다.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 천사가 수많은 하늘 군대와 함께 하느님을 찬양하기를 “더 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영광은 하느님께만 드리는 것이고 이 세상에는 평화만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는 다만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로서 주어진 하느님 나라 선포에 전력한다고 하였고 모든 권위와 영광은 언제나 하느님께 돌렸습니다. 그는 자기의 놀라운 일들 때문에 주어질 수 있는 사람들의 인정과 찬사를 하느님께 향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 그는 결코 자기를 앞세우거나 높이거나 절대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선거로 정치적 메시아가 탄생한 것은 누구의 공적입니까? 당선자의 능력입니까 아니면 노사모와 그를 지원한 무리들입니까? 이 놀라운 결과에 대하여 영광을 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선자 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모두입니까? 물론 모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거름 더 나아가서 그것은 국민 모두의 영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민주주의 정신에도 맞고 사람은 곧 하늘이라고 했으니 근본 원리에도 적합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대통령 당선자나 그 주변의 무리들에게만 영광이 돌아갈 때 그것은 영광이 아니라 영멸이 되는 것입니다. 영광이 어떤 특정 인간이나 집단에게 독점될 때 그것은 무서운 파괴력이 되고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변질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땅 위에는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과 인류 역사의 궁극적 희망은 평화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주는 전쟁 후에 잠시 주어지는 휴전 상태나 치열하던 대선이 끝나고 정쟁이 소강상태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모두 거짓 평화로서 억압된 평온과 강요된 침묵만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유와 해방과 평등 안에서 살 수 없는 평화는 참 평화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곧 정의와 사랑의 바탕 위에 세워진 평화입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가 ...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끌고 다닌다”고 한 이사야의 말씀(11:6)이 이루어진 평화를 뜻합니다. 이것은 이미 피의 투쟁으로 시작하여 허무로 끝난 사회주의적 수단으로 만들 수 있는 평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손에 박힌 못자국과 옆구리에 찔린 창 자국이 우리 몸에 옮겨질 때 나타나는 자기부정을 통한 평화입니다.
평화주의의 기초를 닦은 레오 톨스토이는 전 인류가 개미 형제들처럼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비밀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 곧 예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평화롭게 사는 진리의 내용을 5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화내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맹세하지 말 것, 악에게 폭력으로 대하지 말고 무저항주의로 나갈 것,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 등입니다. 이것을 실천할 때 주님의 평화는 온다는 것입니다. 이 평화주의는 인도의 간디와 미국의 M. L. 킹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세계 평화운동에 근거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위기와 예측 불가능한, 그래서 불안과 공포의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거짓 기쁨과 하늘의 참 기쁨이 교차하는 아이로니칼한 축제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오늘 나신 그리스도를 축하하는 기쁨이 일부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세상의 기쁨을 극복하고 모든 사람들이 기뻐할 수 있는 축제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약하고 소외된 자들이 인정받고 인간으로 존중되어야 하며 우리의 자기부정을 통한 참 평화가 이 땅 위에 충만하도록 기도하고 힘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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