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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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이 되는 사람

 

본문: 레위기 19:1-1, 9-18; 마태복음 5:38-48

설교: 홍정호 목사 (2017.2.19. 주현 후 제7)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일부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 이르는 산상수훈은 기독교 윤리의 정수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의 양식을 갖추고 있지만, 한 장소에서 같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마태가 일괄적으로 편집한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도 산상수훈과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6:20-49) 그런데 마태복음에 비해 그 내용이 훨씬 간결합니다. 학자들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비슷한 내용을 산상수훈과 대비해서 평지설교라고 부릅니다. 마태와 누가 사이에 이런 차이가 있는 건 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을 모세보다 위대한 인물로 그려내려는 마태의 의도가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21절의 분노에 대한 교훈에서부터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이르기까지 산상수훈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는 일정한 구조가 반복됩니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라/하지 말라라는 구조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재해석을 강조하기 위한 양식입니다. 본뜻을 잃어버린 채 하나의 우상으로 전락해버린 옛 가르침에 다시금 생기를 불어넣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고, 마태복음의 기록자는 구조의 반복을 통해 그 의미를 생동감 있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개의 율법에 대한 재해석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을 돌려대어라.”(38-39)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43-44) 보복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이 말씀의 요지입니다. 말씀의 의미를 모르겠어서 문제인 말씀이 아니라, 너무 잘 알겠어서 당혹스러운 말씀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8:45)는 예수님의 음성이 오늘 본문 말씀과 겹쳐 우리의 마음을 흔듭니다.

 

2.

 

똑똑한 성서학자들이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들었을 리 없었겠죠. 이 말씀이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이냐를 두고 참 많은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 문자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주장과 이상에 불과한 말씀이라는 시각으로 양분해 볼 수 있을 텐데, 양측의 주장 모두 이 말씀은 생활에서 실천하기 힘든 말씀이라는 사실을 방증합니다. 지키기 쉬운 말씀이었다면 논란이 되지도 않았겠지요. 오늘날 이 본문은 신학과 성서학의 범주를 넘어 타자를 주제로 한 철학 담론이나 정신분석학의 중요한 주제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현대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원수라는 말, ‘이웃이라는 말, 그리고 타자라는 말은 다 비슷한 맥락에 있습니다. 원수, 이웃, 타자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내 마음 같지 않은 사람입니다. 내 기대를 벗어나고, 내 호의를 배반하고, 내 진의를 왜곡하고, 내 삶의 보람과 의미를 앗아가는 존재, 그가 바로 원수요 이웃이요 타자라는 겁니다.

 

현대사회는 어떤 면에서 이런 원수-이웃-타자와의 관계를 강요당하는 사회, 관계중독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입니다. 너무 많은 이들과 너무 쉽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인격적 만남의 기회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는 데 우리시대의 비극이 있습니다. 요새 카페인 우울증이라는 말이 있답니다.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하면서 남들과 비교해서 우울해지는 증상이랍니다. SNS에 올리는 글이나 사진들이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그 사람의 모습을 전시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죠. ‘저 사람은 저런데 난 뭘 하고 있나하는 자괴감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주위에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자꾸 남 탓을 하게 되고, 내 숟가락은 금인가 은인가 흙인가 살펴보게 되고, 자꾸만 소모적이고 부정적인 에너지로 자기를 몰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과감히 끊어내야 합니다. 사랑의 대상으로 보아야 할 이웃을 경쟁과 시기 질투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3.

 

니체는 도덕의 계보라는 책에서 기독교를 노예의 도덕이라고 조롱한 바 있습니다. 예컨대 제가 하는 이런 설교 역시 여러분에게 노예의 도덕을 설파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관용, 사랑, 겸손, 자비, 용서, 침묵 이런 건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할 상황을 견디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노예들에게나 요구되는 도덕이지, 귀족은 그럴 필요를 못 느낀다는 것이죠. 참 얄미운 말이긴 한데, 직장과 같은 조직이나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활하는 이들로서는 쉽게 부정하기 힘든 말이기도 합니다.

 

니체는 타인을 부정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노예의 도덕을 넘어, 두려움 없이 자기를 긍정하는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가 오랫동안 억압과 금지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해 온 시대를 돌아보는 서양 철학자의 관점에서 할 수 있는 말이겠습니다. 니체의 독법에 따른다면, '보복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오늘의 복음서 말씀이야말로 노예의 도덕'의 꽃이라고 말해야 할 겁니다. 보복할 수 없으니까 하지 말라고 하는 윤리를 익혀야만 하는 것이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 외에 원수를 대적할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사랑하도록 자기 몸과 마음을 길들이는 것이다, 니체는 아마 그렇게 말할 겁니다.  그것은 실제로 니체의 정신을 계승한 많은 현대철학자들의 기독교 윤리 비판의 요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른 각도에서, '관계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이 '노예의 도덕'이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면 충분할까요? 그것으로 관계의 회복에 이를 수 있을까요? 평화학에서 말하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미국 이스턴 메노나이트대학의 하워드 제어(Howard Zehr)라는 사람의 방법으로 널리 알려진 개념인데, 상대방의 위법적인 행위에 대해서 단지 법적인 처벌로 맞서는 것은 종국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용서와 화해, 진정한 평화라는 목표는 상대방을 응징하거나 처벌하는 간편한 방법으로는 달성될 수 없고, 어렵더라도 화해를 권고하면서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이 협력하는 여러 과정과 절차를 통해 달성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문제의 해결이라는 손쉬운 길로 가지 않고, 원수와 같은 상대방이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품고 함께 가려고 할 때 회복적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갚으라는 말도 복수에 강조점이 있는 율법은 아닙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힘의 균형을 위한 최후의 방어수단으로서만 폭력이 부분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정말 그렇게만 될 수 있어도 괜찮겠습니다. 그런데 한 대 맞으면 한 대만 돌려주기는 참 어렵습니다. 거기에 감정이 뒤섞이기 때문입니다. 남자애들 어렸을 때 친구와 주먹다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죠. 고만고만한 애들끼리는 누가 먼저든 한 대 때리면 곧바로 한 대가 돌아옵니다. 공평하게 한 대씩 주고받았으면 싸움이 끝나야 하는데, 한 대를 돌려받은 친구가 말합니다. “, 너 왜 더 쎄게 때려?” 그러고는 한 대를 더 때립니다. 그러면 , 너 왜 두 대 때려?” 이러다가 결국 쌍코피가 터질 때까지 싸우고 교무실에 불려가 더 혼나고 일주일 청소당번 되고 그렇지 않습니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갚아서는 관계의 회복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한 편이 져야 비로소 화해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질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니체라면 노예가 질 수밖에 없으니까 지는 거라고 비웃듯 말하겠지만, 예수님이라면 기꺼이 지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폭력은 더 큰 폭력으로 맞서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폭력의 연쇄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건 오직 급진적인 비폭력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한 게 아니겠습니까? 힘에 더 큰 힘으로 맞선다면 우리가 믿음을 선택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힘에 사랑으로 맞서려니 믿음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하고, 자기를 단련하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4.

 

지난 주 어느 식당에 갔는데, 화장실 세면대 벽면에 인상적인 글귀 하나가 붙어 있어서 사진을 찍어뒀습니다. “훌륭한 얘기 많이 하는 사람보다 삼겹살 구울 때 고기 열심히 굽는 사람이 더 훌륭하다.” , 모처럼 디테일이 살아있는 말입니다. 주일 설교 본문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꼭 저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아서 찔렸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건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라는 말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 좋은 말씀인 줄 아는데, 하라고 해서 되는 거였으면 못할 사람이 없었겠죠. 다 아는 얘기를 두고 그렇게 두꺼운 성서주석이며 윤리학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건 그게 안 되는 일이라서가 아니겠습니까?

 

사랑은 억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랑하려는 연습이 필요 없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성령 받으면 남들이 다 예뻐 보이고 사랑할 만한 사람으로 보인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의지에 바탕을 둔 노력과 연습은 분명 필요합니다. 여러분, 운전하실 때 시속 100km로 고속주행을 하면 코너링이 쉽지 않습니다. 방향 전환을 하려면 우선 속도를 줄여야 합니다.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 메타노이아가 방향 전환을 뜻한다는 걸 아시지요? 새로운 삶으로 방향을 전환하려면 먼저 속도를 줄여야합니다.

 

누군가를 시속 100km로 미워하고 있다면, 우선 미움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힘쓰십시오. 60km정도만 미워하세요. 그러다가 30km로 미워하시고요. 그러면 방향을 전환할 수 있습니다. 100km로 달리면서 갑자기 방향을 바꾸겠다고 하면 길에서 튕겨 나가서 나도 죽고 남도 죽입니다. 사랑의 윤리를 말씀드리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수행이 덜 된 사람이, 저를 포함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자기 안에 미움을 시속 100km로 품은 채 사랑을 말한답시고 올바른 말을 하면, 그 말은 자기도 죽이고 남도 죽이는 말이 될 뿐입니다. 그러려면 차라리 삼겹살을 열심히 굽는 사람이 되는 게 낫습니다.

 

5.

 

마태복음 본문에 앞서 읽은 레위기의 말씀은 마음의 속도를 줄이는 구체적인 방법이라고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19:9-10) 이 사회에 발붙일 곳 없는 나그네와 같은 이들에게 제자리를 마련해 주려는 노력이 타인을 미워하는 마음에 제동을 거는 연습이 될 수 있습니다. 저들은 노력하지 않고 무임승차하는 이들이라는 편견을 깨고 그들도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있음을 인정할 때 미움의 속도가 줄어듭니다.

 

재판을 할 때에는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여 두둔하거나, 세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편들어서는 안 된다. 이웃을 재판할 때에는 오로지 공정하게 하여라.”(19:15)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남을 헐뜯는 말을 퍼뜨리고 다녀서는 안 된다. 너는 또 네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이익을 보려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다.”(19:16) 이러한 말씀 앞에 우리를 세워가면서 사랑의 삶을 연습해야 합니다.

 

원수사랑, 비폭력, 그런 건 노예의 도덕이고, 이상주의자들이나 하는 말이라는 냉소를 멈추고, 지금 사랑의 길로 들어서십시오. 옳고 그름을 나누려는 마음을 넘어 곁을 잃어버린 이들의 곁이 되어 주는 삶을 향해 용기 있게 한 걸음을 내딛으십시오.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는 마십시오. 사도 바울의 격려를 기억하십시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6:9) 오늘 사랑의 길에 나서는 사람, 원수와 만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주님의 길에 나서는 사람은 성령께서 동행하시며 용기 주시고 힘 주시리라 믿습니다. 모든 게 단번에 변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한 주간 이 믿음 가지고 곁이 되는 삶으로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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