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높은 산

 

본문: 출애굽기 24:12-18; 마태복음 17:1-9

설교: 홍정호 목사 (2017.2.26. 주현 후 마지막 주, 변화주일/삼일절기념주일)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따로 데리고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아직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이 눈을 들어서 보니, 예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하셨다.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그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직전 주일인 산상변화주일이자 감리교회가 삼일절기념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당하실 수난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지 엿새뒤에 열두 제자 가운데 세 사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산 위에서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된 주님을 보았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주님과 더불어 말을 나누는 장면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1.

 

주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났다는 마태의 증언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아들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는 출애굽기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듭니다.(34:29)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 거기에서 사십 일 밤낮을 금식하며 십계명을 받아 판에 기록했습니다. 언약의 말씀인 십계명은 아무 준비도 안 되어 있던 사람에게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먼저 받을 그릇이 준비되어야 했습니다. 십계명은 모세라는 한 인간이 일상과 다른 높은 산에 올라, 거기에서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로 하느님 앞에 있을 때에 비로소 주어졌습니다. 시내 산을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습니다.

 

예수님의 얼굴도 해와 같이 빛이 났습니다. 마태는 모세를 통해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화해의 언약이 주어진 것처럼,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의 새 언약이 주어졌음을 알립니다. 왜 사랑의 새 언약이라고 말합니까? 주님께서 몸소 희생양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동물의 희생을 통해 신 앞에서 자기의 정결함을 얻는 행위였습니다. 구약성서뿐만 아니라, 고대 종교의례에서는 희생제의가 보편적으로 행해졌습니다. 동물을, 심지어는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듦으로써 자기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당연한 것으로, 아니 거룩한 종교적 행위로 여겨지던 세계에서 주님께서 참으로 낯선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 길은 남을 희생시켜 내가 사는 길이 아니라, 나를 희생하여 남을 살리는 길, 십자가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희생양 만들기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특히 종교적이고 이념적인 순수성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 타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지혜와 용기가 부족한 이들은 이편저편으로 편을 갈라놓고, 어느 편인지 정체성을 뚜렷이 밝히라고 으름장을 놓곤 합니다. ‘우리는어떻다고 말하면서, 자기들이 인정할 수 있을만한 그 좁은 정신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한편이 되라는 것이지요. 내 정체성은 포기할 수 없으니 네가 포기하라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나를 죽여 남을 살리는 길을 가신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자기는 털끝만큼도 손해 볼 마음이 없다면 그 믿음이 참된 것인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이기고만 싶고, 잘 되고만 싶고, 남들에게 인정받는 꽃길로만 가고 싶다면 가던 길을 멈추어 방향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놓아야 할 걸 놓지 못하면 나아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산악인 엄홍길 씨를 아시지요? 히말라야 14좌를 한국 최초로 완등하고, 세계최초로 8,000m 이상 16좌를 모두 완등한 대기록을 세운 산악인입니다. 엄홍길 대장은 2006년 로체샤르 원정 때 8000m가 넘는 정상을 불과 200m 앞두고 등정을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국내 주요 언론사와 기업의 후원을 받았고,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던 도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 대장은 정상을 코앞에 두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대원들의 안전이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그가 한 방송에 출현해 한 말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정상은 정복하는 게 아니라, 잠시 빌리는 것이다. 산이 허락해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사람들은 산악인으로서의 그의 화려한 경력과 성공에만 주목했지만, 정상을 불과 200m 앞두고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던 용기야말로 그의 진가를 드러낸 사건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무리해서 갈 수도 있었을 겁니다. 200m밖에 남지 않은 정상을 그야말로 정복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명예를 지키는 길 대신 함께 한 대원들의 안전을 택했습니다. 혼자서 빨리 가는 길보다는 느리더라도 여럿이 함께 한 걸음을 가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2.

 

로페샤르 같은 거대한 도전 앞에서만 포기가 힘든 건 아닙니다. 일상의 작은 명예와 성취 앞에서도 우리는 흔들립니다. 주님도 흔들리셨을까요? 주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당하실 수난 앞에서 당신 자신과 씨름하시고자 높은 산에 오르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상과 분리된 장소인 산은 영적인 각성과 결단,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어떤 변화이겠습니까? 자기중심성으로부터 하느님중심으로의 변화, 타인을 희생시키는 삶으로부터 나를 희생시키는 삶으로의 변화입니다. 일상의 구심력에 사로잡혀 살던 땅 위에서는 차마 하지 못했던 변화의 결단을 높은 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 읽고 가슴에 새겨 둔 어느 목사님의 기도시 한 편이 있어 소개드립니다. ‘나를 이기소서라는 제목의 기도시입니다. “더 많이 아파 아픈 이 받고/ 더 많이 잊혀져 잊혀진 이 받고/ 더 많이 없어 없는 이 받고/ 더 많이 쓰러져 쓰러진 이 받도록/ 나를 이기십시오, 주님/ 일어서는 나를 거꾸러뜨리소서,/ 나를 이기십시오, 주님/ 주저하는 나를 다시 한 번 이기소서.”(한희철, “나를 이기소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기꺼이 지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서 기도시의 저자이신 목사님께서 어느 칼럼에 쓰신 글을 다시 한 번 인용합니다. “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기꺼이 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지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기꺼이 지는 것이 순명입니다. 대통령은 백성에게 져야합니다. 그것이 마땅합니다. 목사는 성도에게 져야 합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께 져야 합니다. 그것이 지당합니다. 지지 않으려고 버티며 싸우는 것은 추한 일입니다. 마땅히 지는 것, 기꺼이 지는 것, 그것이 모든 존재의 마지막 걸음이 되어야 합니다.”(한희철, “기꺼이 진다는 것,”기독교타임즈2016.11.16.)

 

높은 산은 이렇듯 존재의 마지막 걸음을 향한 순례자의 발길이 향하는 장소입니다. 일상에서 하지 못했던 결단을 하게 되는 장소, 이기는 길, 잘 되는 길, 칭송받는 길이 200m 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기꺼이 포기하고 돌아갈 것을 다짐하는 장소가 바로 높은 산입니다.

 

3.

 

그 산에서 베드로가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17:4) 베드로는 앞선 21절에서 주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자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하고 말해서 예수님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꾸중을 들었는데, 또 이렇게 초막 셋을 지어 눌러앉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을 인간적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과 하느님의 일을 구분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은 주님의 마음으로 해야지,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하면 십중팔구 일을 그르칩니다.

 

그래도 베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교회가 좋아서 신학교에 갔습니다. 딴 일 안 하고, 교회에 초막을 셋 지어살면서 맨날 성경보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게 아예 일이 되면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인생이 참 행복하고 좋을 것 같아서 신학교에 왔습니다. 공감이 어려우시지요? 그런데 신학교에 와서는 기대했던 삶과는 다른 길이 펼쳐졌습니다. “초막을 셋 지어교회에서 사는 건 그저 꿈일 뿐이었고, 교회의 모습에 실망도 참 많이 하면서 그러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초막을 셋 지어교회에서만 살려고 간 신학교에서 저는 오히려 교회 밖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부름 받는다는 것, 그것은 여기가 좋사오니하고 내가 좋은 자리에만 안주할 수 없는 삶이라는 진실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지난 겨울 어느 대화 모임에 참석했다 불교를 공부하시는 한 분에게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불교에서 깨달음, 깨달음 하는데, 깨달은 자가 누구냐? 그는 가시가 손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눈에 박혀 있는 사람이다. 타인의 고통을 그저 손 위에 있는 가시처럼 객관적인 거리로 대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 눈에 박힌 가시처럼 불편해하고 아파하는 사람이 바로 깨달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언어로 말하자면, 십자가를 어디에 걸고 다니는 장신구로 여기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은혜 받은 사람, 믿는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십자가가 자기 눈에 박힌 채로 타인을 대할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예수의 사람입니다. 그런 이들은 타인의 고통, 이 세계의 고통과 대면하여 여기가 좋사오니하며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 하느님과 고독한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 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산 아래로 내려와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길로 나서지 못한 채 교회에, 자기의 인간적인 한계의 테두리 안에 머뭅니다. 산 위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뽑아서 데리고 간 제자들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구름 속에서 들리는 음성을 듣고 놀라 엎드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주님은 산 아래에서 당신을 따르는 길이 순탄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5:11)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주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 이제 고통이 많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에게 들려주신 주님의 음성이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산에 계속 엎드려 있고 싶은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이 음성에 힘을 얻어 사랑 없는 세상에 사랑의 편지로, 평화 없는 세상에 평화의 사도로 나서는 이들입니다. 일어나, 두려움 없이 제 갈 길을 가는 이들입니다.

 

4.

 

오늘은 변화주일이지만, 삼일절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2년 있으면 삼일운동 100주년이 됩니다. 한국교회가 계승해야 할 믿음의 유산으로 삼일정신을 꼽는 이들이 많습니다. 진리와 자유를 향한 비폭력 저항운동의 정신이 삼일운동 100주년이 다가오는 오늘날 더욱 절실히 요청되고 있기 때문이겠습니다. 삼일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진리의 오름길을 따라 자유의 높은 산을 함께 오른 이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식민통치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일어나, 두려움 없이자유의 새날을 연 이들입니다. 그들이 있어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산상변화주일에 높은 산에 올라 주님의 해와 같이 빛나는 얼굴을 만난 제자들처럼, 우리도 정신의 높은 산에 올라 진리와 자유의 한길로 일어나, 두려움 없이나아갈 믿음과 용기를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43 공생(共生)의 길 (2017.7.23.) 홍목사 2017.07.23 185
742 순례자의 길 (2017.7.16.) 이원로 2017.07.17 188
741 문화종교를 넘어서 (2017.7.9.) 홍목사 2017.07.09 263
740 주님을 모시는 사람 (2017.7.2.) 홍목사 2017.07.02 187
739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017.6.25. 청년헌신예배) 이원로 2017.06.26 265
738 희망의 사람 (2017.6.18.) 홍목사 2017.06.18 192
737 주님의 대사 (2017.6.11. 삼위일체주일) 홍목사 2017.06.12 155
736 성령으로 충만하게 (2017.6.4. 성령강림절) 홍목사 2017.06.04 169
735 그들도 하나 되게 (2017.5.28. 승천주일) 홍목사 2017.05.28 174
734 사탄을 이기는 사랑 (2017.5.21.) 이원로 2017.05.22 201
733 누구의 자녀인가 (2017.5.14. 어버이주일) 홍목사 2017.05.15 159
732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2017.5.7.어린이주일) 홍목사 2017.05.08 212
731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2017.4.30.야외예배) 홍목사 2017.05.01 175
730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교회의 중심 (2017.4.23. 창립 35주년 기념주일) 이원로 2017.04.23 174
729 갈릴리로 가자 (2017.4.16. 부활절) 홍목사 2017.04.17 172
728 망하는 은혜 (2017.4.14. 성금요일) 홍목사 2017.04.17 156
727 겟세마네의 기도 (2017.4.9.) 홍목사 2017.04.10 157
726 참사람의 길 (2017.4.2.) 홍목사 2017.04.02 166
725 참으로 눈 뜬 사람이고자 (2017.3.26.) 홍목사 2017.03.26 190
724 빌라도의 판결 (2017.3.19.) 이원로 2017.03.21 527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5 6 7 8 9 10 ... 43 Next
/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