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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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눈 뜬 사람이고자

 

본문: 시편 23:1-6; 요한복음 9:35-41

설교: 홍정호 목사 (2017.3.26. 사순절 제4)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내쫓았다는 말을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만나서 물으셨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선생님, 그분이 어느 분입니까? 내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그는 주님, 내가 믿습니다하고 말하고서, 예수께 엎드려 절하였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말하였다.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1.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사순절 네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요한복음 9장의 눈 뜬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눈 먼 사람 한 명을 만났습니다. 그를 만나기 전 예수님은 큰 일 하나를 겪으셨습니다. 그것을 바로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배척하던 사마리아 사람이고, 귀신이 들렸다고 믿는 한 무리의 유대 사람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할 뻔했던 일이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마음도 없는 이들로부터 배제와 축출의 대상이 되신 경험을 또 한 번 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 일을 겪으신 지 얼마 후, 예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날 때부터 눈 먼 사람 한 명을 만나게 되신 것입니다.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그는 저주받은 삶의 상징이었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랴?’ 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복잡한 사태를 단순한 인과관계의 논리로 설명해 내려는 시도는 때로 타자에 대한 폭력과 배제의 논리로 작동합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자신이 이미 안다고 믿고, 경험했다고 확신하는 한두 가지 논리로 사고를 환원하여 사태를 판단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그것은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따라 하나님나라를 이루려고 나선 제자들조차 선입견과 편견의 장벽에 가로막혔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2.

 

지금 제자들은 눈 먼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합니다. 눈 먼 이의 아픔에 공감하기보다는 율법적 판단이 앞서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회적 배제와 억눌림의 대상이 되는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이를 함께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의식 자체가 이 제자들에게는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탓하는 게 부당한 일일 지도 모릅니다.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묻는 제자들의 이 질문은 유대 사회의 율법적인 통념, 그 사고 구조에 비추어 볼 때 정당한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그래서 불행한 삶으로 내몰린 이들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범하여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라는 믿음이,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는 그런 사회 속에 그들이 몸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런 율법적 옳고 그름의 판단이 정작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한 존재의 고통에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게 만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주님에게는 율법의 전제들보다 고통당하는 한 사람의 존재가 더욱 중요했습니다. 불행의 원인을 탐색하고,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에 앞서, 그의 존재를 저 밑바닥에서부터 온통 긍정해주는 연민과 사랑의 마음, 그 애통하는 마음으로 주님은 눈 먼 사람을 바라보시며, 그의 삶이 진정으로 회복되고 변화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9:3) 그가 당하는 이 아픔은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눈 먼 자들이 눈을 뜨고, 병든 자들이 회복되고, 낙인 찍혀 배제된 이들이 온전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하신 일, 하나님께서 지금도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친히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발라주시면서,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뜨라하는 말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셨을까요? 주님은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르는 의식을 손수 행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부정한 자로 여겨져 아무도 손대는 이 없는 이의 몸에 손을 대시면서,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으셨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이 일이 있은 후 그 눈먼 사람은 눈이 밝아져 돌아갔습니다. 예수와 만나 눈 뜨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3.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가 눈을 뜬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눈 먼 거지로 살던 그가 눈을 떴다는 소식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자 그는 바리새파 사람들 앞으로 소환되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눈 먼 사람을 왜 불렀을까요? 일차적으로는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겠지만, 근원적인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눈 먼 채로 앉아 구걸이나 하며 살던 거지가 더 이상 기득권자들의 시혜의 대상에 머물러 있지 않고, 눈 뜨고 말하는 주체로 거듭난 데 대한, 그러니까 계몽의 주체로 재탄생한 데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를 소환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눈 뜬 이의 소환 사건은 민중의 계몽에 대한 기득권체제의 견제와 검열을 상징하는 것으로 저는 읽습니다.

 

계몽이 영어로 enlightenment이죠. (light)을 안으로(en)으로 받아들여 캄캄한 데서 눈을 떠 밝아지는 게 계몽입니다. 교회에서 가르쳐 주는 것,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것, 미디어에서 가르쳐 주는 것을 사람들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 이것은 스스로를 지도자나 전문가라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커다란 위협으로 간주되는 일입니다. 중세 말에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가 화형을 당한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이라는 영국의 종교개혁가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게 화형을 당할 일인가요? 그보다 백년도 훨씬 앞서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는 사후에 이단으로 판명되어서, 무덤이 파헤쳐져 부관참시를 당하고, 뼈는 태워져 그 강에 뿌려지는 참혹한 일을 겪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왜 숨어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겠습니까? 번역이라는 단순한 텍스트 전환행위가 라틴어 해석의 권위를 독점한 교회와 사제 권력에 도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라틴어처럼 일부 교육받은 귀족들에게 한정된 언어가 아닌 영어나 독일어 같은 그들의 일상어로 성경을 읽으면, 누구나 생각하게 되고, 누구나 의문을 갖게 되고, 그래서 더 이상 권위 있는 자들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 계몽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단으로 몰아 화형 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부관참시까지 하면서 박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민중이 눈 뜨는 것을 막으려고. 민중이 눈을 떠 저항의 주체로 우뚝 서는 것을 막으려고 말입니다.

 

이런 일이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을까요? 종교인뿐만 아니라, 각종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세속의 현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눈을 떠 그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전문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한계가 뻔히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중세시대에도 그 논리는 동일했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야 우리가 위대한 종교개혁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중세 스콜라신학의 찬란한 체계와 하늘의 질서를 닮은 듯한 교회의 위계질서의 맥락에서 볼 때 그들 종교개혁가들의 번역행위란 실상 무지렁이 비전문가들의 질서문란 행위에 다름없는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니 매일 공부하고 매일 기도하는 그 똑똑하고 경건한 분들이 이단을 화형 시키고, 부관참시하는 일을 죄로 여기기는커녕 하나님의 질서와 정의를 세우는 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으로 말하자면, 눈 먼 거지가 눈이 먼 채로 길가에 앉아 구걸이나 하면서 살면, 그저 목숨이나 보존하면서 어쩌다 시혜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예수를 만나 눈을 뜨고, 자기가 경험한 일을 증언하고 돌아다니면 바리새파 사람들 앞으로 소환되어 죽음의 위협 앞에 놓이는 현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4.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눈 뜬 사람을 불러 자초지정을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기 경험을 솔직하게 진술했습니다. “그분이 내 눈에 진흙을 바르신 다음에 내가 눈을 씼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습니다.”(9:15b) 그런데 그의 말을 경청할 마음이 없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적인 판단에 기초해서 사태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꼬투리를 잡고 늘어집니다. 예수께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 노동금지 의무를 위반했다는 사실을 율법적으로 적시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 눈멀었던 사람을 재차 불러 자기들이 꾸며놓은 일에 대한 자백을 강요합니다. 뭐라고 말했습니까?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9:24)

 

이것은 마치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가를 박해하고, 군사독재시절 민주화 운동가에게 자백을 강요하던 방식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저 말은 이미 정해 놓은 어떤 정답에 대하여 일체의 질문이나 도전을 용납하지 않고, 상대에게 그것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모든 시대 기득권세력에 의해 작동한 억압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눈 뜬다는 건 이러한 요구들 속에 감춰져 있는 지배자의 기만적 시선으로부터 눈을 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정해 놓은 어떤 틀로 사람이나 사태를 재단하고 판단하기보다는 예수의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한 사람의 존재를 그 존재의 밑바닥에서부터 긍정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참으로 눈 뜬 사람입니다.

 

이 눈멀었던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라는 바리새파 사람의 압박에 맞서 진실을 말할 용기가 그에게는 있었습니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9:25) 낡은 율법을 잣대로 들이대는 이들을 향해 그는 지금 생명이 회복된 사건을 증거로 내밀며 맞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율법을 통해 사람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생명을 얻도록 하고 더욱 풍성히 얻도록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그는 자기의 전 존재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대화는 점점 격해졌습니다. 급기야 바리새파 사람들은 화를 참지 못하고 말합니다. “네가 완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났는데도,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그를 바깥으로 내쫓아 버렸습니다.

 

5.

 

오늘 본문은 바로 이렇게 쫓겨난 눈 뜬 사람과 예수님이 만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도 이 이야기가 시작되기 직전 유대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할 뻔했던 상황에서 성전 바깥으로 쫓겨나신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속한 공동체로부터 쫓겨난 두 사람이 만난 것입니다.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 그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그분이 어느 분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주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여러분, 저는 주님과 이 눈 뜬 사람의 대화 장면을 묵상하면서 가슴 찡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주님은 눈 뜬 그이를 향해, 자기의 공동체로부터 외면당하며 살아오다가, 눈을 뜬 이후에도 여전히 외면당하고 있는 그를 향해 너는 이미 인자를,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다.”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지금 배제의 아픔을 겪는 이들 가운데, 지금 자기의 공동체로부터 외면당하고, 자기의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한 이 시대의 모든 작은이들 가운데 이미 와 계십니다. 우리의 할 일은 눈을 들어 이미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큰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습니다. 도대체 하느님은 살아계신 것이 맞느냐고, 하느님이 계신데 어떻게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냐고 묻곤 합니다. 이 눈 뜬 사람이 경험한 현실이 아마 그러했을 겁니다. 그가 속한 사회에서 존경받는 바리새파사람들 앞에서 참말을 했다가 낙인이 찍혀, 아무도 자기의 처지를 알아주는 이 없고, 아무도 자기의 곁이 되어 주는 이 없는 현실 속에서 그는 깊은 절망과 한숨 가운데 참으로 무거운 일상을 마주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는 바로 그 때에 주님과 만났습니다. 삶의 절망과 한숨이 깊었던 바로 그 때, 바로 거기에서, 그는 너는 이미 인자를 보았다는 주님의 음성과 마주했습니다.

 

6.

 

여러분, 눈을 뜨고 산다는 우리가 눈 먼 사람은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지금 울고 있는 이들, 지금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을 보면서도 누구의 죄 때문인가를 캐물었던 제자들의 굳은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지금 여기에 계신 주님을 만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눈을 뜬 사람이 되면,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연민의 시선으로 세상의 고통과 대면하는 사람이 되면, 그는 어디에나 계신 주님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설마 저기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겠지, 저 악마 같은 이들 틈에는 주님이 계실 리 없지하고 생각하던 바로 그 곳, 그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보다 먼저 거기에 가 계신 주님을 만나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과 연민의 눈을 떠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 계신 주님을 볼 눈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눈 뜬 이의 확신이 아니라, 눈 먼 이의 겸손으로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이 권고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무엇보다 나에게 타자로 다가오는 저들 가운데에도 주님께서 여전히 살아 역사하고 계심을 믿고 긍정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도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하고 말씀하실 줄 믿습니다. 한 주간도 우리 주님의 크신 은총과 평화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과 가정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