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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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16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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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누가복음 17: 11-19; 시편100:1-5
신반포교회 2004. 5. 16. 손원영목사

1.
어느 날 방송인 임성훈 씨가 모 TV 프로그램의 사회를 보면서, 한 여자출연자가 나오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여자만 보면 칭찬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참, 아름다우시군요. 어쩜 그리 멋있으십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사람을 만날 때, 어떻게 인사하는 습관을 갖고 있습니까? 임성훈씨처럼 칭찬하는 습관이 있습니까?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습관이 있습니까? 저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런 습관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감사합니다’ 라든지 혹은 ‘고맙습니다’ 라는 말만 들어도 우리 마음이 잔잔해져 옵니다. 아마도 그 말 속에는 우리의 가슴을 울리게 하는 어떤 묘약이 숨어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슬펐던 마음이 위로를 받고 또 용기를 얻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 삶에 보람을 느낍니다.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말을 들을 때, 더 열심히 좋을 일을 해야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한번 서로에게 인사하십시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감사하다’라는 말은 단순히 우리가 서로 만날 때 부담없이 주고받는 ‘안녕하세요’ 정도의 가벼운 의미를 지닌 언어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감사에는 우리의 삶이 녹아져 있는 마음의 언어, 존재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사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 말 속에 숨어있는 삶의 깊이를 반드시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 의미를 잘 헤아리면 헤아릴수록 우리의 삶은 더 풍요로와지고 보람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오래된 영화이지만 모두 기억하실줄 압니다. 로빈 윌리암스가 주연으로 나오는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입니다. 그 영화는 명문대학교에 수많은 학생들을 합격시키는 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명문 웰튼 고등학교의 새학기 개강식. 백파이프 연주를 앞세우고 교기를 든 학생들이 강당에 들어서면서 식이 시작되고, 이 학교에 새로 전학 온 토드는 어린 신입생들과 마찬가지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숨길 수 없습니다. 때마침 이 학교 출신인 키팅 선생님이 영어 교사로 새롭게 부임하고, 그는 첫 시간부터 파격적인 수업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오늘을 살라'(Seize the day!)라고 역설하면서 참다운 인생의 눈을 뜨게 합니다. 어느 날 닐, 녹스, 토드 등 7명은 키팅 선생님으로부터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서클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 서클을 다시 이어가기로 하고 학교 뒷산 동굴에서 모임을 갖고, 짓눌렸던 자신들을 발산합니다. 닐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연극에의 동경을 실행하고, 녹스는 크리스라는 소녀와 사랑을 이루어 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떻게 되었습니까? 닐의 아버지는 의사의 꿈을 이루어 주리라 믿었던 닐이 연극을 하는 것을 보자 그를 군사학교로 전학시키려고 선언을 하고, 꿈이 꺾인 닐은 그날 밤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키팅 선생님은 책임을 지고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마지막 짐을 꾸리기 위해 교실에 들어왔을 때, 학생들은 키팅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게 된 것이 바로 자신들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죄송한 마음과 선생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한명씩, 한명씩, 그렇게 모든 학생들이 자신의 책상에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쓸쓸하게 가방을 들고 교실을 떠나려던 키팅 선생님은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학생들의 마음을 가슴 뭉클하게 잘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키팅 선생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하는지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키팅 선생님은 그 감격을 어떻게 표현할까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유일한 단어는 오직 한마디였습니다. “고맙습니다. Thank you!"
그렇습니다. 키팅선생님의 그 말 한마디, ”고맙습니다“라는 그 한마디가 얼마나 감동적인지 모릅니다. 그 한마디가 얼마나 무게 있는 단어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감사의 말 속에 학생들의 마음이 들어있고, 선생님의 사랑이 들어있고, 그리고 그것을 보며 공감했던 우리의 마음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감사란 말은 바로 우리 존재의 언어입니다. 생명의 언어입니다. 이 말은 결코 부담없이 주고 받은 뒤 곧 잊어버리는 하찮은 잡담과 같은 말이 아니라, 우리 삶의 무게가 실려있는 말이요, 우리의 삶을 반성케 하는 말이요, 또 우리의 신앙을 점검케 하는 단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계절의 여왕이라는 이 오월은 감사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제일 많이 사용하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수없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어린이날, 자녀들에게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라고 말했을 것이고, 어버이날 “날 나아주시고 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부모님께 전화라도 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승의 날엔 스승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오월 내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등등의 감사라는 단어를 다양하게 활용하면서, 한달을 지내고 있습니다. 정말고 고맙고 감사한 계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따라서 오늘 저는 이 감사의 의미를 말씀을 중심으로 여러분과 함께 되새겨 볼까 합니다.

2.
오늘 함께 읽은 누가복음 17장의 말씀은 감사를 주제로 한 이야기입니다. 열명의 문등병자들이 예수께 소리지릅니다.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를 측은히여긴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합니다.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이렇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10명의 치료받은 문등병자중 아홉은 가버렸고, 오직 사마리아인 한사람만 예수께 찾아와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찾아온 사마리아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말씀은 감사를 주제로 한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이 말씀 속에 숨어있는 기독교적 감사의 의미를 세가지의 측면에서 함께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로 오는 본문말씀은 참된 감사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찬찬히 본문을 보시길 바랍니다. 본문에는 제사와 예물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등병자를 고치면서 하신 예수의 다른 말씀을 비교하여 보면, 여기서 그 말씀이 생략된 것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즉 누가복음 5:12-16을 보시길 바랍니다.(비교: 막1:40-45; 마태 8:1-4) 특히 5:14에 보면,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라”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오는 본문에서는 이에 대한 말씀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말씀이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복음 5:14의 말씀을 오늘 본문 속에 넣어서 읽어보면, 왜 한 사람(사마리아사람)만이 예수에게 돌아왔는지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문맥상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의 문등병자들은 유대인이었고, 돌아온 한사람은 사마리아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유대인들은 하나같이 돌아오지 않았을까? 감사의 마음이 없어서 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오지 않고,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 돌아온 데에는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놓치면 오늘 말씀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홉 명의 유대인 문등병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서 제사장을 만나 자기들의 몸을 보이고 예물을 드리며 제사를 드릴 수 있었지만, 오직 한사람만은 그가 예배드릴 성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다른 유대인과 함께 성전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이 증오하는 사마리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성전으로 가야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에 있었던 사마리아 성전은 주전 129년경에 유대인 히르카누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사를 드릴 수 없었고, 제물도 드릴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 문등병자는 다시 예수에게로 돌아온 것입니다. 아니 예수에게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기에, 자기를 낫게 해준 사람, 바로 그 예수야말로 자신이 예배드릴 ‘참 성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이러한 생각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헤롯의 성전을 대신할 성전으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 19-22). 그렇습니다. 예수가 바로 성전임을 스스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에게 돌아온 사마리아인 문등병자는 아마도 예수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이미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참 성전이신 예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께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여인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대화 중에 참된 예배에 대하여 예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1-24).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알린 것입니다. 따라서 바로 이 소문이 오늘 사마리아인 문등병자에게까지 알려진 것이 아닐까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 다시 돌아온 사마리아 문등병자는 예수를 성전삼아 그에게 참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감사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위대한 기독교적 감사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한 일이 있습니까? 그러면 먼저 지체하지 말고 예수께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예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십시오. 감사할 때는 곧 하나님께 예배할 때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둘째로 오늘 본문은 기독교적 감사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신앙으로 응답하는 것이요, 그래서 감사란 구원의 과정임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아홉명의 문등병자들도 모두 깨끗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문등병자만이 병고침을 받은 뒤 병을 고쳐주는 예수에게 아주 적절한 응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누가의 시각을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즉 누가는 고침받은 사람의 그 후 태도에 관하여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문등병자가 육체적 병고침 이외에 구원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하신 일을 보고 ‘적절히 응답’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가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본문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은 병이 치료된 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고’, ‘사례(감사)를 하였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누가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마리아인과 같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감사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적 응답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응답하는 삶, 그것이 감사의 삶입니다. 그래서 감사의 삶은 사마리아 사람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삶입니다. 바로 그것이 감사의 삶입니다. 이러한 응답의 삶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길을 돌이켜, 주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 주님께 엎드리는 사람, 그리고 그분에게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에게 구원이 이르렀음을 예수께서는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이라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는 요즈음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교리적으로 믿어 구원을 얻었다”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께서 문등병을 치료하신 일과 같은 일에 대하여 신앙적 삶을 응답했다, 감사했다, 주님께 무릎을 꿇었다”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을 향하여 하신 엄청난 일에 대하여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으시길 바랍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여러분을 구원할 것입니다. 따라서 감사는 믿음과 동의어요, 같은 말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예수의 말씀은 “감사가 너를 구원하였다”로 말로 바뀌어도 틀린 말이 아닌 것입니다. 감사는 믿음이요, 감사는 구원의 길입니다. 감사함으로 우리 모두 구원에 이르시길 바랍니다.

셋째로 기독교적 감사는 사회적으로 약자를 찾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감사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 감사하는 자인가’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열명의 문등병자 중 오직 감사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 사마리아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당시에 가장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사마리아사람은 당시에 유대사회에서 천대받던 사람들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앗시리아의 혼혈정책에 따라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에 결혼이 있었고, 그에 따라 이스라엘의 혈통의 순수성이 파괴되었다고 하면서 천대받던 사람들이 바로 사마리아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에게 와서 감사를 표시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오직 사마리아사람만이 감사하였을까? 아니 더 정확한 질문을 한다면, 왜 누가는 아홉명의 유대인이 아니라 오직 사마리아사람만이 예수에게 와서 감사하였다고 우리에게 알리는 것일까? 질문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예수의 복음이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방인에게 더 환영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치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수리아의 군대장관 나아만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문등병으로 고생할 때, 엘리사의 명령에 따라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치유된 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누가 감사하는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수리아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감사하며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 보면, 누가 감사하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홉명의 유대인이 아니라 오직 이방인 한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사람 한사람만이 오직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누가 진정으로 감사하는 사람인가? 오늘 말씀은 바로 유대인이 아니라, 그 당시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이방인이 진정한 감사의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과는 가장 가까울 수 있다는 깨달음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아가야할 대상은 분명해집니다. 우리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우리가 찾아야할 사람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잘 안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회적으로 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의 관심이었고, 누가복음의 관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관심이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시고 축복하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십시다. 이 시대의 이방인에게 다가가십시다. 이 시대의 사마리아인에게 다가가십시다. 그것이 진정으로 감사하는 삶입니다. 이렇게 이 시대의 이방인에게, 이 시대의 사마리아인에게 다가가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감사를 아는 사람이요, 이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는 참 등불과 같은 희망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3.
여러분,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예배의 언어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우리의 믿음의 언어요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사회의 가장 낮은 사람들을 향하여 관심을 갖는 사랑의 언어, 희망을 만드는 언어입니다. 모쪼록 오월 한달 감사의 계절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으면서 진심으로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