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질서 `

이계준목사

잠언 21:21, 로마서 1:18-23

지난 주간에는 스승의 날이 있어서 집에 제자들이 보내 온 꽃바구니와 화분 때문에 어둡던 방안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꽃이란 우리의 생활공간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공간까지 아름다운 색채와 향기로 가득 채워 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즐거움과 생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꽃과 자연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꽃을 사랑하는 것은 단지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통해 기쁨을 가져오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꽃은 보이지 않는 이면에 깊은 진리를 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연의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꽃은 자연의 질서를 따라 자라고 꽃피고 시들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는 시간이나 성장의 조건도 모두 자연의 질서에 따라 결정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초목이나 농작물까지 기후와 우량과 토양에 따라 파종과 성장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태초에 만드신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면서 존재하고 소멸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자연의 질서를 무시하거나 파괴하면서 살아가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그 질서를 존중하므로 자기 자신의 삶을 가장 아름답게, 가장 성실하게 살아갈 따름입니다.
한번은 어느 나라에서 가을 추수 때 농림부 장관이 참새는 곡식에 백해무익한 것이니 소탕하라는 포고문을 공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총을 쏘아댔고 구물은 치는 소란을 벌여 얼마 안가서 참새의 씨가 거의 마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곤충이 떼를 지어 다니면서 농작물에 피해를 주었습니다. 농림부 장관은 부랴부랴 다시 대책을 세웠는데 그것은 값비싼 살충제를 뿌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살충제는 곡물의 가격을 비싸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 건강에도 큰 해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때야 비로써 참새는 곡식을 축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농작물을 보호도 해 주는 매개체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자연에는 어떤 질서가 있는데 이것을 인위적으로 고치려고 하면 무리와 피해가 따르는 것입니다.
로마서 1:20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본질이 자연의 질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자연의 질서를 보고 하느님을 알게 되고 자연의 일부인 우리 인간도 그 질서를 배우고 따라야 할 의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2. 물론 우리 인간은 비록 자연의 한 요소인 흙으로 빚어 만들어진 존재이지만 여타 자연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자기의 영을 불어 넣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다른 자연이 없는 영성과 자유를 지닌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종교적 행동을 일삼게 되고 또한 이와는 반대로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거슬러서 반역하는 죄도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엄연한 사실은 인생의 4계절에 나타나는 生老病死란 과정을 통해서 밝혀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연과는 달리 인간은 이 자연의 이치를 무시하거나 역행하려는데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진시 왕의 묘책인 불로초를 찾다가 못 찾고 곰의 발바닥을 먹는 지경에까지 갑니다. 그러나 종당엔 그것을 먹은 자나 안 먹은 자나 모두자연의 질서에 순응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 인간에게는 자연과 달리 우리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책임 있게 살아가야 할 인간의 질서라는 것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자연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잠언 21:21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의와 신의를 좇아서 살면, 생명과 번영과 영예를 얻는다.” 이 말씀은 인간이 지켜야 하는 도덕적 질서인 동시에 사회적 질서이기도 합니다. 이 질서를 잘 지키면 ‘생명과 번영과 영예’를 얻는다는 놀라운 약속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이 약속은 축복되고 풍요로운 미래의 환상을 보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생활과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정의와 신의를 지키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을 파괴하고 역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정의를 지키는 일에 모범을 보여야 할 사회 지도자들이 자기 욕망 하나를 다스리지 못한 나머지 심판대에 오르고 옥고를 치르는 일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마음에 참회하는 심정보다는 마치 정의를 위해 희생양이 된 듯 자처하므로 참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신의를 지키고 신뢰사회를 건설할 책임적 위치에 있는 종교인이나 교육자들이 자기 명예와 권력에 사로 잡혀 신뢰를 잃어버리므로 교인이나 제자들을 낙심케 하고 사회의 도덕적 기강을 혼란케 하니 이 사회의 미래가 암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 순간적인 쾌락과 현실적인 이득에 얽매여 정의와 신의를 헌 신짝처럼 내버리고 생명 대신에 죽음을, 번영대신에 멸망을, 영예 대신에 불명예를 선택하고 있으니 한숨 밖에 지울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질서를 무시하고 파괴하는 자들도 결국에는 자연의 이치를 따라 그 생명이 다하는 날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심판의 순간에 하느님 앞에 서서 자기변명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진리를 깨달을 날이 올 것입니다.
병원에서 사회사업가 두 사람이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 1천여 명과 대화하면서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 당신이 혹시라도 이루지 못하고 죽을지 몰라 걱정하는 일이나 또는 건강을 되찾으면 꼭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많은 대답은 첫째로 평소에 친지와 이웃에게 많이 베풀지 못한 것이 제일 마음에 걸리기 때문에 더 오래 살게 되면 많이 베풀며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화해할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았기 때문에 화해하지 못하였고 용서해 줄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살게 되면 화해와 용서하는 일에 힘쓰므로 마음을 가볍고 깨끗하게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고 싶었던 일을 기어코 하겠다는 것입니다. 돈이나 이견의 차이, 건강이나 위험, 피곤이나 귀찮음 때문에 하지 못한 일들을 후회하며 더 오래 살게 되면 반드시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연의 질서’와 함께 ‘인간의 질서’를 따라 성실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제한되어 있으며 더욱이 욕망의 노예가 되기 쉽기 때문에 자연의 질서나 인간의 질서를 제대로 따라 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히려 정의와 신의를 따라 살려고 원칙을 세우고 그대로 실천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에게는 보다 많은 유혹과 고난이 닥쳐오는 것이 우리 인생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욥이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부심과 위신을 가지고 모든 난관을 극복하면서 정의와 신의의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거룩한 뜻을 이르려는 자녀들을 방관하지 않으시고 지혜와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3. 우리는 지금 매우 혼탁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글의 생존투쟁을 가리켜서 “약육강식”이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이 곧 우리 사회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어떤 정신적 원리를 존중하는 곳도 아니고 우리가 성실히 지켜야 할 도덕적 의무를 칭찬하는 곳도 아닙니다. 죽은 동물 하나를 놓고 자기만 많이 먹겠다고 서로 싸우고 죽이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입니다. 또한 그것은 원칙 없이 싸우는 프로 레슬링 경기와도 같습니다. 어떤 반칙을 해서라도 이기면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력 있는 자, 금력을 가진 자, 온갖 이익집단들이 자기들의 욕망을 위하여 광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소외되거나 불만족한 개인들은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이웃의 재물을 강탈하거나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병리적 현상마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이렇게 삭막하고 피비린내 나는 세상에 산다고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원리를 따라 조용히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의 자녀 되는 특권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신의를 좇아서 살면 생명과 번영과 영예를 얻는다”는 말씀 가운데 ‘정의와 신의’는 하느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고 싶은 축복의 조건입니다. 정의라는 것이 사회적 윤리개념이라면 신의는 개인적 윤리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기독교 윤리학에서 사회윤리와 갱인윤리를 구분한 적이 있습니다만 지금은 둘은 연계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사회적 행동과 개인적 행동이 서로 겹쳐진 면이 없지 않으나 혼합될 수 없는 측면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의란 ‘종속적 정의’, ‘분배적 정의’, ‘보복적 정의’ 등으로 구분하지만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이 사회생활에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사회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7에서 정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에게 의무를 다하십시오. 조세를 바쳐야 할 이에게는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바쳐야 할 이에게는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이는 두려워하고 존경하해야 할 이는 존경하십시오.” 우리가 이 말씀을 오늘의 현실에 적용해 본다면 사회의 법질서를 준수하고 모든 사람들의 인격과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사회 질서를 위해 만든 법조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의 삶을 보다 안전하고 풍성하게 만들기 위하여 주신 계명인 동시에 이것을 실천하는 것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는 그의 자녀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신의(信義)란 ‘믿음이 옳다‘ ’옳은 믿음‘이란 뜻으로 사람에게 믿을 수 있는 존재로 인정받는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자비(mercy)또는 친절(kindness)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신의란 말을 인격적인 성실성이란 말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성실성이란 한 인격이 양심을 지키고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 감당하며 이웃에 대하여 관심과 배려를 나타내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기적 욕망을 억제하고 어떤 환경에서나 하느님과 사람 앞에 부끄럼 없이 깨끗하게 살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완수하며 가족과 친지와 이웃에 대해 사랑과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우리는 성실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희생이 따르지 아니하고는 도달할 수 없는 인생의 가장 높은 정상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정의와 신의를 좇아 살면 생명과 번영과 영예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정의와 신의가 삶을 위한 운동이라면 생명과 번영과 영예는 그 운동에서 오는 상금이고 축복의 면류관입니다. 우리는 수고하지 아니하고 큰 상을 바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의 과거를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향하여 다름 질 친 다음 하느님이 예비하는 월계관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실로 우리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정의와 신의의 길을 다 간 후 우리에게는 영원한 축복이 주어지는 것은 하나의 귀한 보나스요 특권이라고 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도리를 다 한 것뿐인데 우리에게 하느님과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니 말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나약한 육신을 가지고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의 자녀에게 주시는 참 자유와 기쁨에서 오는 삶입니다. 하느님은 또한 우리에게 그의 나라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가식 없이 나타내고 우리의 소유를 아낌없이 사랑으로 나누며 부족함 없이 즐겁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존경과 영예를 받으며 격조 높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말든, 거들떠 보든 말든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인정하는 존경과 영예만 얻는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약하고 죄 많은 우리가 받기에는 매우 송구스런 주님의 귀한 선물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부자 집에 머슴 둘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주인이 머슴들을 불러 놓고 말하기를 “내일 너희들을 독립시켜줄 터이니 그 기념으로 오늘은 새끼를 꼬도록 하여라. 새끼는 가늘고 길게 꼰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주인의 말에 한 머슴은 더 없이 고마워서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으로 밤을 새며 열심히 새끼를 꼬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머슴은 주인이 마지막까지 부려먹는 것에 심사가 뒤틀려서 새끼 꼬는 시늉만 하다가 잠을 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날 주인은 머슴들에게 꼰 새끼를 가지고 광 앞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광문을 활짝 열고 독립할 밑천으로 각자 꼰 새끼줄에 엽전을 꿸 수 있는 것 꿰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삶이 고달프다고 할지라도 정의와 신의의 새끼를 열심히 꼽아 봅시다. 그래서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인 생명과 번영과 영예를 많이 꿰는 축복을 함께 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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