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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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철학자는 말하기를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동물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불행을 찾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불행한 처지에 빠졌거나 불치의 병에 걸려도 행복의 빛을 찾아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을 행복을 찾아다닌다고 해서 잘못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먹고 일하고 쉬고 사람 만나고 이야기 나누고 하는 모든 활동이 실은 행복을 추구하는 몸짓이라고 할 수 있고 거기서 만족과 불만, 기쁨과 슬픔, 쾌락과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왜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삶을 기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사람에 따라, 혹은 때와 경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여하간 인간의 행동은 자기에게 기쁨을 주는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우리 주변에는 행복한 사람보다는 불행한 사람의 수가 급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경제가 어려워지고 실직자가 늘어나므로 가정이 파경에 이르고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동분서주하다 포기상태에 빠지고 노약자들은 돌보는 사람이 없어 버려졌으니 사회의 불행지수가 상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행복의 외적 조건을 구비한 사람들이 모두 기쁘게 살고 있느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직장이 있어도 봉급이 기대 이하여서 불만이고 어떤 사들은 상사와 일에 시달려서 고통이고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 불만스러워도 마땅히 옮길 곳도 없어 고민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감원이나 조기은퇴를 걱정하느라 밤잠을 설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요즘 서울 구치소 독방 수십 개가 모두 만원사례라고 하는데, 지금 수감된 자들은 금력과 권력으로 배를 채우고 만족하게 살다가 감방에 홀로 앉아서 후회하기도 하고 배신감에 사로 잡혀 화를 내기도 하고 또는 허탈감에 빠진 상태로 재판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수감되지 않은 범법자들은 밤낮으로 기쁨을 잃고 전전 긍긍하고 있을 것입니다.
몇 일전 일간지에 서울대학에서 은퇴한 명예교수들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들의 상당수가 은퇴 후의 생활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경제사정이나 명예실추 때문이 아니라 대학이나 사회가 자기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 있는 것입니다. 평생을 연구하고 가르쳤고 아직 쓸만한 지식과 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자기들을 무용지물로 취급하니 불만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학덕을 겸비하고 사회의 최고의 영예라고 할 수 있는 대학의 명예교수란 명성을 들으면서도 자족할 수 없다니 우리 사회에 사는 사람치고 몇이나 만족하며 기쁘게 살까 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지금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삶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불만으로 가득 차게 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 곧 사회의 구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정치가 경제나 고용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패거리 싸움에만 신경을 쓰고 기업체는 투자는 하지 아니하고 해외로 도망갈 생각만 하고 각 이익집단들은 자기들의 배만 채우려고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멈출 줄 모르는 무질서와 부정부패의 관행도 그 원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사회구조와 풍조가 우리가 원하는 삶의 기쁨을 빼앗아가고 불만만 남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요소가 반드시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근본 원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를 불행하고 슬프게 하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다 깊은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그 근본 원인이란 우리의 무한한 욕망을 채워 줄 것을 밖에서 찾는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자랑할 수 있는 것으로 욕망이란 항아리를 채우려는데 그 원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부인은 자기의 인생이 80%정도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이 좋은 직장에 다니고 월급도 수준급이며 물론 바람도 피우지 않습니다. 애들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공부도 잘하고 건강하며 말썽도 피우지 않습니다. 가정은 늘 화목하고 어느 모로 보나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남아 있는 20%의 불만을 채우기 위하여 고급 옷을 사 입고 친구나 이웃에게 자랑하는 것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백화점에 자주 드나들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의 20% 불만은 채워지지 않았고 스스로 패션쇼를 계속하다 보니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찾던 행복은 계속 멀어만 갔습니다.
인생의 허무를 노래한 전도서 기자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모든 욕망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늘 잘 되는 것도 아니더라.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잠언 9:11)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기쁨과 만족이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불가사의하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밑 빠진 독”이란 속담을 자주 듣습니다. 아무리 돈이나 노력을 퍼부어도 눈에 보이는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욕망이란 그릇은 밑 빠진 독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막강한 권력으로, 무진장의 재물로, 고상한 지식이나 명예로 아무리 채워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술을 마시다가 지나치면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말이 있는 것과 같이 사람이 욕망을 채우다가 보면 마지막에는 욕망이 사람을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인격, 가정, 기업, 우정 등을 모두 박살내고 허무한 인생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기쁨을 밖에서 찾는다는 것은 이런 비극의 종말만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는다.”고 일찍이 경고하였습니다.

3. 그래도 비교적 인생을 기쁘고 만족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욕망의 독을 채워서 행복해지려는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인간입니다. 이들은 자기들 밖에서 행복을 찾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 안에서 찾습니다. 쏘크라테스나 칸트 같은 철학자들이나 톨스토이 같은 문호는 악처들 때문에 고생은 많았지만 그들은 결코 불행한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재물이나 권세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스스로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았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길이 무엇인지 말해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과 전쟁에 시달리던 시절을 회상하면 인간의 기쁨이 밖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비록 우리는 가난해도 자존심이 있었고 서로 나누어 먹으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우리는 판자촌에 살고 고학을 하면서 얼어붙은 찬밥을 뜨거운 물에 끓여서 김치로 아침을 때울 때도 불만이란 없었습니다. 우리가 입은 옷은 고작 군복을 엽색한 것에 불과했지만 우리들은 좋은 옷을 입어야 하겠다는 생각조차 한 일이 없었습니다. 이 고난과 가난이 지나면 새로운 희망의 세계가 동터 오리라는 기대와 용기만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지내고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었고 기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밖에서 찾는 기쁨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를 기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여인이 꿈속에서 시장에 갔다고 합니다. 새로 문을 연 가계에 들어갔는데 그 주인은 아름다운 천사였습니다. 여인이 이 가계에서 파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자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팝니다.” 그 대답에 놀란 여인은 생각 끝에 인간이 원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인은 말하기를 “마음의 평화와 사랑, 지혜와 기쁨 그리고 두려움과 슬픔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세요.” 이 말은 들은 천사가 미소를 지우며 말하기를 “부인, 미안하지만 가계를 잘못 찾아오신 것 같군요. 이 가계는 열매는 팔지 않고 씨앗만을 팝니다.”고 하였답니다.
이 꿈 이야기는 인간이 찾는 사랑과 기쁨이란 물건을 파는 곳도 없고 어떤 물건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 태어날 때 어떤 삶의 씨앗이란 원소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생명이던지 또는 시간이던지 또는 능력이던지 간에 인간은 그것을 가지고 최선의 노력을 할 때 거기서 참으로 원하는 행복과 기쁨, 지혜와 평화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숯과 다이아몬드가 ‘탄소’라는 꼭 같은 원소에서 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 물질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는 최고로 아름다운 보석이 되고 다른 하나는 보잘것없는 검은 덩어리가 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의 행복이란 자기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찾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정부패와 범죄 사건으로 도배한 신문 기사에서 가끔 살맛나는 기사를 읽을 때가 있습니다. 기업가들이나 부자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하는 것은 별 관심도 끌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설렁탕 집의 종업원으로, 미화원으로, 또는 가정부로 고생하면서 저축한 재산을 학교와 자선기관에 기부하는 것을 볼 때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입니다. 그들도 사람인데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면서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충동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삶의 기쁨을 밖에서 찾지 아니하고 그것을 아끼고 저축해서 어려운 이웃과 사회발전을 위해 내놓으므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찾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자기의 능력으로 어떤 영원한 기쁨을 추구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불교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본래 어떤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욕망을 제거하므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신앙은 그것이 정신적이던지 또는 물질적이던지 간에 어떤 욕망을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욕망까지도 버릴 때 마음의 평화인 열반에 들어가서 불(佛)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반면에 기독교 신앙은 하느님의 축복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가령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받은 축복이 아마도 최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축복을 받으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그것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더욱이 기도의 대부분은 축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축복받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참 신앙이란 하느님의 주신 삶의 축복에 감사하며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기에게 없는 재물이나 건강이나 세속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4.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어디서 기쁨을 찾아야 하겠는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하느님이 주신 은총이다.” 이 말씀은 유대인의 현실주의적인 사상이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생활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기쁨은 언제나 일상생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행복과 기쁨을 딴 곳에서 찾지 말고 지금 여기서, 주어진 여건에서 만족하면 기쁨이 자동적으로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잠언 6:9에는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욕심에 사로 잡혀서 헤매는 것보다 낫다.”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욕망을 버리고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릴 수만 있으면 그 이상의 행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거름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기쁨의 근원을 우리 자신 안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는 고전 3:16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홀로 있는 불행한 존재도 아니고 욕심으로 가득 찬 동물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교회생활을 수 십 년 한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내가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존재라는 존엄하고 겸허한 의식을 가진 신앙인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의 영 곧 루아흐를 우리 속에 불어 넣으셨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 곧 그의 얼을 우리 속에 넣어 주셨기 때문에 하느님은 성령으로 모든 인간 속에 깊이 현존하고 계신 것입니다. 참 신앙인이란 바로 이 하느님의 임재를 깨닫고 모시며 그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느님을 밖에서 찾지 아니하고 자기 안에서 그리고 이웃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자기 안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기쁨과 평화를 맛보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는 자기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여신을 밖에서 찾지 아니하고 자기 안에 계신 행복의 근원되신 하느님에게서 찾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장기려 박사를 흠모하고 존경합니다. 그는 50년 간 북한에 있는 가족을 그리면서 고달픈 독신생활 속에서도 오직 환자들의 생명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재물이나 명예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것이 자기에게 기쁨을 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장기려 박사는 그의 마음속에 하느님을 모시고 그의 뜻을 따라 삶으로서 최대의 기쁨이고 행복을 맛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하느님에게서 솟아나오는 기쁨을 능가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윗의 노래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원수 앞에 상을 베푸시고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주시니 나의 잔이 넘치옵니다.” 하느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신앙 하나만으로도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는 삶이 참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것은 실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느님의 영원한 기쁨과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한 가지 분명한 진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찾는 삶의 기쁨은 밖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속적인 것들 또는 부부나 자녀, 부모나 친구 심지어는 목사나 하느님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참 기쁨은 우리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어느 정도 만들어 낼 수 있고 만족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철학적인 해결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자기가 노력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철학적인 단계에서 종교적인 단계로 신앙의 힘을 통해 비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그의 영원한 샘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 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깊이 계시는 하느님을 찾고 그의 말씀을 듣고 그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구하지 않는 기쁨까지 포함한 영원한 삶의 기쁨이 축복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쁘게 사는 것 2004. 2. 1.
잠언 3:12-13, 고전 3:16-17
이계준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