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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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의 고난을 기념하는 사순절에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소추란 비극을 겪으면서 이 역사적 사건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우리는 정치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이 탄핵을 시점으로 그 동안 분열되었던 국론이 더욱 심화되고 과격해지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크게 걱정스러운 것은 지난 수 십 년간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분열과 대립은 정부와 국민, 정부와 국회, 여당과 야당, 방송과 신문 등이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고 싸워왔는데 이제는 국민과 국민이 서로 이념의 차이 때문에 대립하고 잘못되면 육탄전까지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 국민 간의 대립은 가두시위에서만 버러지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공간에서, 그것도 익명으로 상대에 대한 증오와 멸시를 내포한 언어로 수없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월드컵 때 국민 모두가 한 목소리로 “대-한민국”을 외치던 기쁨과 흥분은 어디로 사라지고 갈등과 폭행과 원수만 남게 되었습니다. 실로 불행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국민이 서로 분열되어 싸우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만일 어느 편도 아니라면 중간에 서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어느 편에 섰다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왜 거기 서 있는지 모르데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즉 그것이 우건, 좌건 혹은 중간이건 간에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튼튼히 설 수 있는 진실의 근거를 찾지 못한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서야 할 자리를 바로 찾게 되면 오늘의 위기는 극복되고 보다 성숙한 인격과 건전한 사회로 발전하는 통과제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의 시급한 과제는 우리가 설 진실의 바탕을 찾기 위해 기도하고 힘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수난에 관한 이야기를 회상하면 지금 우리가 당하는 역사적 비극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1. 우리는 예수 당시 로마 제국의 식민치하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의 분열상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지도자인 제사장, 지식계급인 바리새파, 상류계급인 사두개파 등은 로마 제국에 편향된 극우에 속하였고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열심당은 극좌에 속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회상에 실망한 금욕주의자들, 염세주의자들과 버려진 민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극우도 아니고 극좌도 아니며 금욕주의자는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느님의 통치 곧 그의 사랑과 정의를 이 땅에 선포하고 인간들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여주는 길을 스스로 택하였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모든 진리는 십자가에 못 박힐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진리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참 진리가 나타나면 그것을 희생시키는 잔인성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왜 예수를 음모하고 십자가에 죽이려고 로마권력에 고발하였을까요? 그것은 예수의 율법해석이 파장을 일으키고 그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는 것이 유대교의 기반을 흔들고 위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모든 권모술수를 동원하여 지위와 특권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가롯 유다는 왜 예수를 팔아먹었을까요? 그는 재정을 담당할 정도로 사랑받는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따르던 예수를 유대 지도자들에게 팔아넘긴 다음 로마 군대를 이끌고 자기 스승을 잡으려고 겟세마네 기슭으로 찾아갔습니다. 전통적인 신앙에서 말하자면 하느님이 인류구원을 위해 그의 아들을 희생시키는 계획에 유다를 도구로 이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는 예수의 행태가 자기의 열심당의 이념과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를 죽이려는 유대 지도자들과 야합한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와 인간생명의 존중이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알고 태도를 바꾼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길가에는 자기들의 옷을 깔고 메시아가 온다고 “호산나”라고 외치며 환영하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광야에서 떡을 얻어먹은 사람, 병 고침을 받은 사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죄를 용서받은 사람 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총독 빌라도가 재판정에서 “예수를 놓아주랴, 바라바를 놓아주랴” 고 물으니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바는 놓아달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환영하던 우매한 민중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매수되어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는데 야합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왜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하였습니까? 그는 예수를 심문한 다음 그가 고발당한 것처럼 유대인의 왕도 아니고 로마권력에 도전할 만 한 유력한 정치인도 아님을 알았고 예수는 아무 죄가 없다고 선언하면서 자기의 죄를 면하기 위하여 물에 손을 씻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명예와 지위를 보존하기 위해서 유대 지도자들의 요구와 민중의 압도적인 함성에 야합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유대 지도자, 가롯 유다, 민중 그리고 빌라도가 예수를 배반한 것을 볼 때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욕망이나 이익에 맞지 않으면 바른 신념이나 가치관도 쓰레기처럼 버리고 자기와 정반대의 이념이나 가치관과 야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인간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진리를 버리게 되고 그것을 외치는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힐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모순적인 인간역사를 만드는 비극의 원인이 아닌가 합니다.

2. 인간이 자기의 욕망과 이익을 위해서 자기의 이념이나 신념과 반대되는 것과 서로 합작하고 야합하는 것을 요즘 말로 포퓰리즘(populism)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지만 쉽게 말하면 그런 것입니다. 이것의 특징은 물과 기름을 섞는 것과 같아서 이념의 색깔을 흐리게 하고 인간의 도덕을 문란케 하며 사회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정상적인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게 되고 사회는 폭풍우를 만난 배처럼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포퓰리즘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성서에만 기록된 옛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그대로 게속 나타나고 비극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을 더듬어서 지난 일들을 회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해방 후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훈련받은 일군이 없다는 이유로 자기 민족을 탄압한 친일분자들과 손을 잡고 그들을 정부 요직에 기용하였습니다. 여기서부터 역사의 단추가 잘못 끼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1961년 군사 구데타에 성공한 박정희 씨는 서구의 자본주의와 군사독재를 합작하여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반면에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극악한 인권유린과 자유의 말살을 일삼으면서 장기집권을 꽤하였습니다. 전두환 씨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정권을 남용하였습니다.
1980년 대 군사정권의 위력이 약화되었을 때 김영삼 씨는 자기가 이끄는 민주당과 노태우 씨가 이끄는 민정당과 합작하여 민주정부를 세웠습니다. 민주주의의 신봉자이고 민주투사인 김 씨가 군사정권, 그것도 반민주적인 군사정부와 자기의 뜻을 이르기 위하여 야합한 것입니다. 그것이 만들어낸 것이 지리멸렬해가는 오늘의 한나라당 입니다.
역시 민주주의 신봉자라고 자처하고 민주투사인 김대중 씨는 자기의 뜻을 이르기 위하여 군사정권의 창시자이고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김종필 씨와 야합해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는 북한과 역사적인 거두회담을 성사시켜 국민을 흥분시켰고 이로 인해 노벨 평화상도 수상하여 국위를 선양하였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동의 없이 북한에 천문학적인 현금을 제공하므로 핵폭탄 제조에 일조하였다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송금문제로 인해 자기 참모들을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IMF의 성공적 극복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내수 경제의 진작한다는 핑계로 카드를 남발함으로써 오늘 우리 사회의 경제적 위기를 자초하였습니다.
노무현 씨의 포퓰리즘은 두 김 씨의 것과는 좀 달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코드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그 색깔이 좀 희석되었지만 소위 386세대를 중심으로 권력구조를 만든 것입니다. 이 코드에 속하는 집단들은 그것이 정부건, 열린 우리당이건, 시민단체이건 또는 시민이건 간에 시대착오적인 사회주의적 색깔이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심각성은 우리나라의 국시가 민주공화국인데 이것을 사회주의 노선과 억지로 접목시키거나 그것으로 바꾸려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년간 이 집단의 정치행태를 보면 국론을 대화, 토론, 협력을 통해 일치시키고 민생의 안전과 국가발전을 위하는 것 보다는 사회주의 이념을 강조하고 실천하려는 데서 분열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친 노동자-반 기업가, 친 하류-반 상류, 친 북-반 미 라는 등식의 분열주의를 조장하였고 더욱이 국민을 좌우로 가르고 국제적 관계에 갈등을 일으키면서 나라의 위기를 자초한 것입니다.
여기서 항상 이합 집산하는 우리 국회에 대해서는 더 말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은 국민의 국가로서 국민이 자기들의 생명과 재산과 행복을 보장받기 위하여 세우는 나라입니다. 때문에 국가는 그것들을 보호하고 보장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정부와 국회는 그것을 위해 진지하게 노력도 하지 아니하고 보장도 하지 않은 채 이념은 달리하면서도 부정부패와 당리당략에는 하나되어 권력과 이해에 따라 영합하고 야합하는 일만을 계속해 온 것입니다. 이러한 야합이 이루어진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요? 함석헌 선생은 그것을 밥그릇 싸움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서로 싸우는 이유가 이념이 아니라 이권이고 이것을 위해 싸우다 보니까 부정부패는 점점 쌓이게 되고 정치의 일차적 목적인 국민의 복리는 실종되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정부가 왜 있어야 하고 국회는 무엇 때문에 존속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오늘 친 노, 반 노 데모에 참여하는 60만을 제외한 4천만 국민은 어쩌면 농협을 설립한 농민들이 그 문을 닫아버리는 것 같이 정부나 국회의 문을 닫고 싶은 심정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회 조직이나 심지어는 교회도 포퓰리즘 때문에 그 1차적 목적인 인간의 생명과 행복과 재산에 대한 책임을 망각하면 인간과 사회는 도탄에 빠지게 됨으로 그런 제도는 폐기처분되어야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포퓰리즘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종교에도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원시종교인 무교만이 원형대로 남아있고 나머지 외래종교들을 모두 변질되었습니다. 가령 기독교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믿고 실천하는 것인데 그것이 무교와 야합해서 기복신앙중심이 되었습니다. 불교는 원래 신이 없고 스스로 불이 되는 종교인데 석가모니를 신격화하는 유신론이 되었습니다. 유교는 군자의 도인데 가부장적, 권위주의적인 통치이념이 되었습니다. 어떤 종교가 다른 문화 속에 들어가면 동화과정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변형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종교가 지니고 있는 본질이 변하면 그 종교의 의미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적 포퓰리즘을 종교학에서는 혼합주의(syncretism)이라고 합니다. 지금 대부분의 한국 종교인들은 혼합주의적 종교인이라고 해서 좋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포퓰리즘이 가득 찬 사회적 분위기 속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 왜곡된 현실을 극복하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스스로 진지하게 묻고 실천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3. 우리는 예수에게서 포퓰리즘이라는 이율배반적이고 변태적인 행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시종여일하게 자기가 선포해야 할 진리만을 외쳤습니다. 그가 말한 진리의 핵심이 마태복음 16:26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이것은 인간의 육신의 생명은 물론이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정신적 안정과 물질적 필요 그리고 사회적 환경 등 모든 조건들이 갖추어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생명과 인권과 재산을 보존하고 보호하여 영적으로, 육적으로 풍요롭게 살게 하는 모든 요소를 합쳐서 목숨이란 말로 표현된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은 바로 이 목숨이 가장 중요하고 최고의 가치이며 그 밖의 것들은 인간의 목숨을 위해 있는 이차적 수단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목숨이 하느님이 불어넣으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각에서 예수의 삶을 보면 그가 왜 당시의 좌우에 속한 사람들과 야합하지 아니하고 왕따 당하면서까지 고독하게 살아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목숨이 로마권력이나 유대종교나 열심당의 이념이나 사두개파의 물질주의와는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하고 절대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한다고 할지라도 이 목숨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면 그는 인간의 가치도, 인간의 자격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목숨뿐만 아니라 이웃의 목숨도 부정하고 파괴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세력들을 비판하고 반대하면서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소외된 사람들의 목숨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말씀과 삶 속에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헤쳐나 갈 하나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세상의 모든 것 보다 목숨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상의 이념, 종교, 물질, 환경 등을 고루 갖추었지만 인간이 무시되고 그 목숨이 희생되는 비인간적 현실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국가가 있고 정부와 국회가 정치를 하고 기업이 사업하고 학교가 교육하고 종교가 열광적인 행사를 하였지만 정작 존중되어야 할 사람의 목숨 곧 생명, 인권, 재산은 무시되고 파괴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렇듯 목숨을 부정하는 사회-정치적 환경 속에서 권력자들의 노예처럼 수동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여기에는 주관 없는 우리 자신의 잘못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의 진리로 무장된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파나 이념의 노예가 되어 6.25당시처럼 서로 분열되어 싸우고 죽이는 우매한 비극을 또 다시 연출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예수의 진리 위에 굳게 서서 목숨을 경시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거짓 지도자들과 모든 제도를 심판하고 인간생명을 존중하고 공동체가 하나되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주체성을 확립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목숨과 함께 이웃의 목숨을 도로 찾고 그것을 풍요하게 만드는 생명운동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정치는 바로 생명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지나치게 우리 자신의 목숨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사악한 세력에게 목숨을 맡겼기 때문에 속고 이용당하고 무시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러한 이념이나 정치세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예수의 제자답게 하느님이 주신 목숨을 스스로 지키고 존중하며 삶을 풍성하게 하는 복음운동에 전념해야 하겠습니다. 이것만이 온갖 악성 정치집단과 무수한 가짜 정치집단의 포퓰리즘을 잠재우고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지름길을 닦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확신 위에 설 때 고통과 위협이 따르고 어쩌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갈지도 모릅니다. 불의한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참된 진리를 십자가에 못 박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 않는 한 오늘의 갈등과 비극은 우리의 삶과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는 죽을 수밖에! 2004. 3. 21.
전도서 8:12-13, 마태 16:24:28
이계준 목사님